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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2/134)

82화

‘움직여선 안 돼.’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한다. 아주 미미한 움직임 한 번으로도 라히크는 그녀를 잡아챌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된 침대에 누울 수 없었다 뿐이지 유희나 다름없었어.’

쫓기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지금부터는 모든 게 달라지리라.

뒷덜미가 서늘하다. 식은땀이 뚝 하고 떨어질 것 같아 레그리아는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도망치는 계절이 여름인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무성한 나뭇잎이 그녀와 비칸의 모습을 지워 준다.

일주일 정도 도망 다닌 덕에 향수의 냄새도 완전히 지워졌고 지금은 이 숲에서 나는 냄새가 그녀에게도 똑같이 났다.

샘물이나 바람, 부식토와 솔방울이 내뿜는 자연스러운 향 같은 것.

그러니 라히크가 후각으로는 그녀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

그때, 비칸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앞에 손을 뻗었다. 손등을 위로 하고 천천히 아래로 내리는 손동작은 ‘가만히 있으라’는 뜻.

비칸이 도망 첫날 가르쳐준 것이다.

초원의 전사들이 사냥을 할 때 쓰는 수어(手語).

그가 너무도 침착하기에 레그리아 역시 볼썽사납게 굴지 않을 수 있었다.

“전방에는 무엇도 없습니다, 전하.”

“후방에도 무엇도 없습니다, 전하!”

넓게 퍼졌던 수색조가 라히크에게 보고를 올려 왔다.

“그렇다면 위를 찾아야겠군. 그렇지 않은가.”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근사하다 생각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넓은 나뭇잎 사이에 몸을 감춘 채 금발의 사내를 바라보던 레그리아는 문득, 그가 참 완벽하다는 생각을 했다.

도망하느라 며칠 새 엉망진창이 된 그녀와는 달리 라히크는 여전히 말쑥한 차림이다. 어느 것 하나 어긋나지 않은 황태자의 예장은 라히크가 이 사태에 그다지 충격받지 않았음을 시사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제 손아귀에 마땅히 있어야 할 물건이 사라져 화가 났을 뿐, 슬퍼하는 기색은 아니다.

하긴, 라히크는 원래 그런 남자이니까.

“전하, 궁수 부대가 도착했습니다.”

“나무를 올라라. 예비 황태자비와 납치범을 찾는 이에게는 후하게 포상하겠다.”

라히크의 명령에 한 무리의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사기를 돋웠다. 모두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등에는 화살 통과 활을 지닌 자들이었다.

손에 두꺼운 밧줄을 쥐고 있는 걸 보니 저걸로 나무를 오를 셈인 것 같은데.

어쩌나 싶어 비칸을 돌아본 순간, 레그리아는 움찔하고 놀랐다.

하필 비칸 역시 새로 나타난 궁수 부대를 보느라 상체를 숙이고 있어 입술이 닿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예쁜 청회색 눈동자가 살짝 커지는 걸 목격한 레그리아는 민망하여 얼른 고개를 원위치로 돌렸다.

‘아, 다음 수신호. 저들이 오를 때… 우리도 움직인다. 안겨라.’

새끼손가락을 세 번 까딱이는 건 ‘오르다’라는 뜻. 검지를 왼쪽으로 쿡쿡 찌르는 건 ‘떠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 검지와 중지를 꼬는 건 ‘안기다’라는 의미였다.

레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하는 수 없이 다시 몸을 돌려 비칸의 목에 팔을 걸었다. 그러느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번엔 괜찮았다.

궁수들이 나무를 타고 올라 여기저기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으니까.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안은 비칸은 숨죽인 채 대기했다.

그의 굵은 허벅지 근육이 긴장한 채 부푸는 것이 느껴진다. 네발 달린 짐승이 쏘아져 나가는 것처럼, 그는 온몸의 근육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았다.

“어…!”

그리고 마침내, 눈 밝은 누군가가 멍청한 소리를 질렀을 때. 기민하게 상황을 알아차린 라히크가 장전된 석궁을 쥐고 조준한 바로 그 찰나.

비칸이 몸을 날렸다.

“컥!”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던 궁수가 비칸에게 떠밀려 아래로 떨어진다. 그 뒤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눈을 감은 채 매달려 있는 것에만 집중했으니까.

“잡아라!”

“저기다!!”

“비전하께서 다치면 안 돼! 놈의 발목을 쏴라!!!”

쾅! 콰앙!

거대한 화살대가 마치 폭격처럼 나무를 부쉈다. 비칸은 화살보다 2초씩 빠르게 움직였으나 그런들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파스스, 쿵!

눈앞에 존재하던 나무가 반으로 쪼개어지더니 옆으로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더 갈 길이 없다. 앞으로 향하던 비칸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경로를 수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멈춰라.”

비칸의 앞길을 막은 건 당연하게도… 말을 타고 따라붙은 라히크였다.

서늘한 음성에 눈꺼풀을 들어 올린 레그리아는 결국 라히크를 눈에 담고 말았다.

순금을 녹여 만든 듯한 피조물이다. 정복의 신이 사랑할 만한 외양이었다. 짓밟고, 거머쥐고, 소유하는 것이 당연한 존재.

그는 여전히 우월을 담은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지금 돌아오면 이번 한 번은 실수로 여기고 덮어 주지.”

“그것참… 눈물이 날 만큼 후한 제안이네.”

“용서받을 기회는 지금 한 번뿐이다. 멍청한 선택을 하지 말라.”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 비칸의 심장 고동이 빨라진다. 펄떡이는 역동적인 맥박과 함께 체온이 올라갔다.

숲의 동물과 교감하고 있을 때면 늘 이러했기에 레그리아는 놀라지 않았다. 괜히 멈춰 굳어 있는 비칸을 흘긋 볼 것도 없었다.

그러는 대신 레그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럼 이 사람은?”

“그 야만족을 염려하는 모습을 내 앞에서 보일 필요는 없을 텐데.”

“내가 얌전히 돌아가면, 이 사람은 초원에 돌아가게 해 줄 거야? 아니잖아.”

라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습다는 듯 픽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낼 뿐이었다.

“더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넌 충분히 나를 긁어 놓았으니. 수습이 될 때 내려와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라히크의 수하들이 나타났다.

마귀도 잡는다는 석궁을 든 병사들이 하나같이 흉흉한 빛으로 비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이 없어진 순간부터 밤낮 없이 수색을 해야만 했을 테지.

거칠어진 얼굴이며 핏발 선 눈에 깊어진 증오심이 일렁인다.

저들은 비칸을 쏴 죽이는 것에 조금의 죄책감이나 망설임도 없을 터였다.

라히크는 사람을 조종할 줄 안다. 증오와 분노가 쌓이도록 유도를 해두었을 테니 여기서 그녀가 모든 걸 포기한다 하여 비칸이 안전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비웃음이나 사겠지.

레그리아는 보란 듯 비칸에게 더욱 바짝 안겨들었다. 마치 한 몸처럼. 그러자 나무 아래에 선 라히크의 미간이 확실히 좁혀들었다.

“쏠 테면 어디 쏴 봐. 나도 같이 죽여.”

“레그리아.”

“나는 레그리아가 아니야. 그렇게 부르지 마. 네가 붙인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

레그리아는 조용히, 하지만 또렷하게 부정했다.

그 외에 달리 불릴 이름은 없지만 그럼에도 라히크의 면전에서 그건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언제고 한 번은.

“예비 황태자비께서 끝내 실성하셨군.”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결국 이런 것이었다.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급소를 피해 쏘라.”

명령은 차가웠다.

레그리아는 저를 향하는 수십 발의 화살을 오연히 응시했다. 한쪽 입매를 비틀어 올린 채로.

사실은 두려웠지만, 살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지만.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한이 있어도 제 발로 내려가진 않겠노라.

그녀의 저항에 라히크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아아악! 배, 뱀!”

“독뱀이다!”

콰직!

누군가 잘못 쏜 화살이 레그리아의 머리칼을 스치며 먼 곳의 나무에 박혀들었다. 날카로운 화살촉 탓에 끊겨 버린 머리칼이 뽑힌 깃털처럼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느리게 하강하는 붉음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레그리아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풀숲 사이사이로 머리가 역삼각형인 독뱀이 우글거렸다.

즉사하진 않겠지만 하나같이 물리면 크게 고생할 만한 종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컥, 커헉….”

미끈거리는 몸통이 사람들의 발목이며 팔뚝, 목을 휘감아댄다. 차르르 하며 혀를 내미는 소리가 마치 웃음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뱀 떼는 라히크를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쓸모없는 것들. 이런 잔재주에.”

짧게 혀를 찬 라히크가 전신에서 악귀처럼 서슬 퍼런 기세를 분출했다. 뱀들은 저를 찍어 누르는 먹이사슬 상위층의 위압감에 놀랐는지 썰물처럼 몸을 피했다.

단 1분 간 벌어진 일.

그러는 동안 비칸은 이미 그녀를 안고 자리를 박차 달려 나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추격전의 시작이었다.

* * *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을 듯하다. 사방에 사람이 깔렸어.”

“……그렇구나. 괜찮아, 예상한 거니까.”

달이 뜬 시각.

레그리아와 비칸은 어느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제는 위험해서 불도 피울 수 없다.

비칸은 나뭇잎을 대충 긁어모은 것을 쌓고 그 위에 그녀를 앉혔다. 그러고는 피곤할 텐데도 곧바로 동굴의 입구를 향하며 경계를 섰다.

“조금 자도 돼. 내가 한두 시간쯤은 지켜볼 수 있어.”

“아니, 그러면 잡힌다.”

용기를 내어 입을 벌렸지만 역시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다리를 모으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레그리아는 아까부터 발이 욱신거린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일주일 내내 신고 있었더니 가죽끈이 살갗을 파고든 것이다.

비칸이 신경 쓰이지 않게 조심스레 발을 내밀어 끈을 풀던 레그리아는 발등에 피가 배어났음을 알아차렸다.

‘아파라.’

내일쯤에는 아예 뛸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쩌지.

아직 견뎌야 할 시간은 많이 남아있는데…….

“발.”

“응?”

“주물러 주겠다. 피로가 빨리 풀릴 거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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