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34)
  • 81화

    * * *

    라히크는 지금껏 살며 이보다 더한 분노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제 손안에 있어야 할 것이 빠져나갔다.

    제법 예뻐하고 귀여워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딴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발목의 힘줄을 끊었어야 했다.’

    반항할 때마다 한쪽씩 끊어 두었더라면 지금도 그의 품 안에 얌전히 있었을 텐데.

    반항을 귀엽다 귀엽다 하고 저항하는 것을 예쁘다 봐준 것이 문제다.

    앙탈 부려도 집짐승으로 있을 거라 여겼지 감히 담을 넘어 가출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찾는다. 찾기만 하면, 이번에는 결코 어디에도 빠져나갈 수 없게 하겠다.’

    무릎뼈를 으스러트릴까. 그도 아니면 두 손을 묶어 긴 줄에 이어 황금 새장 안에 가둬 놓는 게 나을지.

    어떻게 해야 그 반반한 낯짝이 무너지고 일그러지며 반성을 할까.

    ‘착오였다.’

    처음부터 부러트렸더라면. 그랬더라면 저리 앙큼한 배신 따위, 할 수 없었을 텐데.

    제 품에 다가와 안길 멀쩡한 다리보다 영영 도망칠 수 없는 부러진 다리가 더 어여쁜 것을 알면서도, 아프다며 울까 싶어 오냐오냐하느라 욕심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이 그르쳐진 것이다.

    시답잖은 배려나 하여서.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격노는 일주일째 레그리아를 찾아내지 못하자 더더욱 치솟아 이제는 주변인들에게 공포를 자아내고 있었다.

    “전하. 세비레이크 경은… 오늘도 의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천사로 안 된다면 아무나 하나 데려와서 강제로 짝을 맺게 하라.”

    “그…러면 세비레이크 가문에서 반발이 심할 겁니다. 세비레이크 경 본인도.”

    조슈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라히크를 말려 보려 애를 썼다.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이 역할을 넘겼겠지만 여기서 황태자에게 감히 말이라도 붙일 수 있는 건 오직 조슈아 한 명 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뱉은 바른 말이었다.

    “만약.”

    “…….”

    “신성 기사단장이 이번 예비 황태자비의 도망에 조금이라도 관여한 정황이 나올 시.”

    “예, 예에.”

    “세비레이크가는 전원 황궁 앞에서 머리를 박고 사죄를 올려야 할 것이다.”

    차분하여 얼핏 이성적인 듯 보이는 말투였다.

    그러나 조슈아는 지금 제 주군이 얼마나 미쳐 돌아 있는지 잘 알았다.

    일단 황태자 라히크는 어려서부터 한 번 미쳐 버리면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소심하거나 타인을 두려워해서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황태자는 지금 먼 곳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지금 황태자의 머릿속엔 끔찍한 상상이 오가고 있겠지.

    가장 무서운 점은 라히크에게는 그 상상을 현실로 바꿀 힘도, 재력도, 심지어는 권력까지 있다는 점이었다.

    눈치를 보던 조슈아는 이내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전하, 하지만 만에 하나 도망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냥 숲 안에서 길을 잃은 것일 수도….”

    월급 주시는 분이 도망이라 단정 지으니 거기에 반발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맞습니다! 도망친 레그리아 님을 잡읍시다!’라고 하면 안 된다.

    그건 훌륭한 수하의 본분이 아니었다.

    보통 그런 식으로 눈치 없이 지껄이는 놈은 목이 빨리 떨어지기 마련.

    조슈아는 이 상황에서 제 주군을 진정시킬 수 있을 만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 숲이 어디 좀 깊습니까? 게다가 말이 멋대로 달려 나가지 않았습니까. 어디서 낙마라도 당하신 걸…지도…….”

    그래, 도망보단 낙마가 낫잖아.

    조슈아는 황태자의 반응을 기다리며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이 숲에 풀어놓은 기사와 병사가 몇 명이지?”

    “어… 1,832명…입니다.”

    “그렇게 많은 병력의 눈을 피해 일주일이나 숨어 있을 자신이 있나?”

    “어… 없죠.”

    X발.

    제 무덤을 팠다는 걸 깨달은 조슈아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여자는 아직 숲에 있다. 내게 보란 듯 욕설을 뱉고 사라진 걸 보면 계획된 도망일 터. 도와준 자들이 있을 거다.”

    “저, 전하. 정말 죄송합니다만… 절대 반항하는 게 아니라요. 레그리아 님이 아직 숲에 계신다고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육감.”

    다른 사람이 내뱉었다면 우습다고 배꼽이라도 잡았겠지만 황태자는 아니었다.

    이 나라의 황태자에게는 정말로 육감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걸로 전쟁터에서 몇 번이고 아군의 목숨을 구해내지 않으셨던가.

    결국 제 주인의 기분을 좋게 만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숲속 긴급 수색을 중단시키거나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가여운 공무원인 조슈아는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표드르 이안 세비레이크 경이 깨어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막사를 향해서였다.

    ‘하아. 그냥 좀 좋게좋게 가면 안 되나.’

    막사 앞에 선 조슈아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적당히 네네 하면 될 걸. 짝이 되어서 황태자에게 평생 예쁨받을 수 있다는데 뭘 그리 싫다고 발악을 하는 건지.’

    에휴.

    이해가 가지 않아 조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만약 그가 레그리아 님의 몸을 차지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과는 많은 것이 달랐으리라.

    일단 조슈아는 제 손에 들어올 황금 같은 권력과 신분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이 나라의 수많은 영애들 역시 마찬가지지 않나.

    그런데 대체 그걸 왜 거부해?

    게다가 이번 대 황태자비는 아주 운이 좋았다.

    이보다 더 운이 좋을 수는 없을 정도다.

    다른 신성인들, 특히 이전 대 황후들은 모두 일찍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신성인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무려 전군을 결정하지 않으셨나.

    초원 연합국을 정복하고 야만인들이 치사하게 저들만 꿍쳐 놓고 처먹고 있는 귀한 열매인지 뭔지를 얻어내면 앞으로 그 어떤 신성인도 급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뿐일까.’

    어쩌면 통일 제국의 황태자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조슈아는 정복 전쟁을 치러내기 위해 황태자 진영의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르말라 가루가 신성인이 임신을 여러 번 할 수 있게 만든다는 헛소문을 내고,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아치우고.

    그걸 위해 신성인은 ‘임신 중에는 죽지 않는다’라는 여론도 만들어냈다.

    남은 건 황태자비 즉위 이후, 가짜 임신을 세 번쯤 시켜서 가짜 아이를 데려와 낳은 척하면 되는 거였는데.

    뭐, 열매를 정말로 구한다면 진짜로 임신하셔도 되고.

    앞으로 어떻게 전쟁 자금을 충당하고 귀족들을 뼛속까지 발라먹을지 다 계획을 세워 두었던지라 그 계획의 주축인 황태자비의 행방불명은 조슈아를 진심으로 짜증 나게 만들었다.

    “문 열어요.”

    “조슈아? 왔니.”

    “인사는 됐고, 문이나 열어요. 상태 보게.”

    표드르 이안 세비레이크가 왜 갑자기 폭주를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다.

    이전부터 차근차근 미쳐 왔던 건지, 아니면 일부러 자기 자신을 폭주 상태로 밀어 넣은 건지.

    의사들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니 결국은 본인이 깨어나야 치죄를 할 수 있을 터.

    “어떻습니까? 씨시 아주머니.”

    “어떻기는. 이리 부서지고 저리 부서지고. 내면이 아주 엉망이야.”

    얼음장 같은 미인이 누운 방 안은 매캐한 궐련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슈아는 보란 듯 켈록거리며 씨시 아주머니의 손가락 사이에서 궐련을 빼앗아 들었다.

    “아, 이런 것 좀 피우지 마세요! 명색이 천사가, 환자 옆인데!”

    “내놔라, 이놈아. 젊은 놈이 다 늙은 할멈을 핍박하는구만.”

    “건강도 좀 챙기시고요. 씨시 아주머니가 없으면 천사들을 누가 관리합니까?”

    꼭 재고 관리를 할 담당자가 없어진다는 투에 씨시의 주름진 눈가가 꿈틀했다.

    그러나 황태자의 최측근과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다.

    무엇보다 세비레이크 경이 폭주를 일으켰단 말에 한달음에 달려온 이유가 있지 않은가.

    씨시는 궐련의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똥줄 탄 개처럼 그러는 걸 보니 아직도 찾질 못했나 본데. 그 여자.”

    “황태자비 전하와 관련된 이야기는 할 수 없는 거 아시죠?”

    “알지. 여기까지 쫓아온 꼴을 보니 눈에 훤히 보여서 문제지.”

    씨시는 입매를 비틀었다.

    도망쳐. 도망쳐라, 레그리아.

    본래 이름을 빼앗겨 버린 딸아.

    ‘우리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너는 벗어나기를 바란다.’

    부루퉁한 조슈아의 꼴을 보며 씨시는 독한 연기 너머에서 낄낄거리고 싶은 제 욕망을 억눌렀다.

    예비 황태자비라는 그 아이는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아, 이 애는 이 세계에 파랑을 불러일으키겠구나.

    희망이 꺾인 눈이 아니었다.

    이 낯선 세계에 순응하며 살아가려 하는 자의 눈빛도 아니다.

    봄이 되면 기어코 다시 돋는 새순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제 의지와 고집을 담아 앙다물린 입술과 차분하지만 누구의 명령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표정.

    거기서 씨시는 확신했다.

    이 애는 한계가 올 때까지는 참고 또 참는 아이다.

    그러나 한번 터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지.

    노도처럼 밀려갈 너를 응원한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천사들은 하나같이 같은 마음이었다.

    미안하지만 세비레이크 경이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그래서 증언할 수 없기를.

    그러니 차도가 없는 거야 당연한 일.

    죽은 것처럼 숨조차 거의 쉬지 않는 기사를 흘긋 훑으며 씨시는 끝내 키들거렸다.

    조슈아 쪽으로 심술궂게 연기를 뿜어내면서.

    예비 황태자비가 사라진 지 어느덧 8일째였다.

    * * *

    그리고 그 새벽, 레그리아는 바짝 얼어붙은 채로 긴장했다.

    라히크가 바로 아래에 있다.

    이 나무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붙잡힐 정도로,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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