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34)
  • 80화

    그로부터 며칠이 더 흘렀다.

    비칸은 결코 한 자리에서 하루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아무리 능숙하게 흔적을 지워도 마찬가지로 능숙한 추격꾼들은 알아내고야 만다. 같은 장소에서 버티고 있는 건 도망 다녀 본 적 없는 사람이나 하는 짓.

    바람의 흐름과 숲의 움직임, 수런거리는 새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던 비칸은 이내 인간이 없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파악해 냈다.

    “가야 한다.”

    “응.”

    다행히 이 바깥 여인은 징징거리거나 울어대며 그를 난감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의연하게 견뎌내 당혹스럽게 만들었지.

    비밀 통로를 이용해 그를 찾아왔을 때부터 담력이야 알아보았고 그걸 몇 달씩이나 하면서도 들키지 않은 건 솔직히 감탄스러웠다.

    영리함과 차분함, 섬세한 주의력.

    그녀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이 저주받은 땅이 아닌 초원에 강림했더라면 가장 훌륭한 알-마하카가 됐을지도 모르지.

    그랬다면 어쩌면,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모든 부족원 앞에서 선언하였을지도 모른다.

    이 여자를 짝으로 맞이하겠노라고.

    “비칸, 물이야!”

    레그리아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길게 뻗은 나뭇가지며 웃자란 풀들을 헤치지 않고 사뿐사뿐 피해 움직였다.

    살랑거리는 속 드레스의 밑단 아래로 뻗은 두 발목이 시선을 잡아끈다.

    나비가 앉기라도 한 듯 움푹 들어간 뼈마디며 동그란 발꿈치가 눈에 아프도록 박혀 들었다.

    “아, 시원해…!”

    불그스름한 머리칼이 햇볕 아래에서 불꽃처럼 반짝였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가 찰박거리자 물방울이 아롱지며 여기저기로 튄다.

    묵묵히 지켜보던 비칸은 턱이 으스러져라 힘을 주며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본디 아직 짝이 없는 알-마하카에겐 함부로 눈길조차 줘선 안 되었다.

    그들은 용이 데려온 이방인으로, 귀히 여겨지는 존재이니까.

    바깥 여인이라도 알-마하카인 이상 그는 최대한 존경과 존중을 내보여야 했다.

    “비칸! 비칸도 들어와. 씻어야지.”

    “……나중에.”

    “잠시 있다가 또 나무 위로 올라갈 것 아니야? 얼른 와. 한곳에 머물 시간 별로 없잖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달콤한 목소리가 그를 유혹해 왔다.

    아니지. 그녀는 그저 씻으라고 하는 것뿐이니 그의 음탕한 육신과 마음이 문제였다.

    ‘미치겠군.’

    비칸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억눌렀다.

    초원에서 여인들은 여인끼리 몰려다니며 씻는다.

    그때 그 어떤 남성도 근처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게 초원의 법이었다.

    헌데 제 앞에서 저리 새하얀 다리를 내보이며 상처에 물을 끼얹고 있으니 비칸은 진심으로 딱 죽을 것 같았다.

    씨족의 어른들은 이제 갓 성인이 된 사내들을 보며 ‘너희는 강하다. 하지만 멍청하지. 세상은 연약하지만 똑똑한 여인들의 손에서 돌아가고 있단다.’라고 했었다.

    그때는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지금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듯했다.

    레그리아가 지금 그에게 다가와 저 보드랍고 하얀 몸으로 안겨들면 이성 따위는 금세 날아가 버릴 테니.

    ‘전방에 위험한 짐승이 세 마리. 후방에서 인간들이 다가오고 있군. 아직 거리는 있는 편이다.’

    그를 음욕의 도가니에서 구해 준 것은 새들의 경고였다.

    비칸은 계곡물의 하류 쪽으로 걸음을 옮겨 등 위로 차가운 물을 뿌렸다. 그러다가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 그는 이내 열이 오른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함이었다.

    “비칸?”

    “후우.”

    “괜찮아?”

    물속에서 빠져나오자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진다. 그러느라 하필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칼이 뺨 위로 닿아와 비칸은 이대로 다시 계곡에 처박히고 싶은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비칸은 조신하지 못한 제 아랫도리를 몹시 꾸짖으며 찬 물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아래가 가라앉을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는 탓이었다.

    “나 데리고 다니는 거 피곤하지.”

    “…….”

    “조금만 더 버텨 줘. 이제… 일주일 남았으니까. 그 뒤엔 귀찮게 안 할게.”

    하지만 그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레그리아는 갑작스레 사과를 해 왔다.

    이해할 수 없는 경로에서 튀어나온 말에 비칸은 무어라 대꾸해야 좋을지 가늠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슬픔과 미련,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띠며 일그러진다.

    아무래도 그녀는 지금 자신이 짐이라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별로.”

    “응?”

    “잘 버텨 주고 있다. 귀찮지 않다.”

    씨족의 어른들은 늘 그에게 가르쳤다.

    말은 꺼내지 않으면 모른다.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은 잠들어 있는 땅 뱀을 찾아 달라 조르는 것과 진배없다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 누가 땅 뱀이 여기에 있겠거니 하고 알겠는가?

    그와 같이 남성과 여성은 대화를 하여야 하며 말로써 서로를 알아가고, 표현을 하여야 한다.

    어린 날부터 받아 왔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너는 초원인이 아니다. 헌데도 지금까지 눈물 한번 보이지 않았다. 너는 충분히 강한 알-마하카다.”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비칸은 근처에서 풀을 뜯던 사슴 몇 마리와 정신을 공유하여 이쪽으로 오던 인간들 쪽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하지만 명료하게 답을 주었다.

    “짐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 너는 나를 풀어 주었고, 내가 다시 태양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거기에 감사한다.”

    “……고마워.”

    놀란 듯하던 레그리아의 두 눈이 이내 휘어졌다.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가며 그녀는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서져 내리는 듯한 햇살, 적당하게 불어오는 숲의 바람 그리고 졸졸 흐르는 개울.

    그 모든 것과 이질적인 빛깔을 띤 여인은 실로 불꽃의 정령 같아 저도 모르게 목이 멨다.

    아름다운 레그리아.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은 듯 보이지만 불은 그럴 수 없지. 어디에서 피어오르든 지독하게 밝아 눈에 띄고 마니까.

    “……가야 한다.”

    “응, 가자.”

    어둔 밤을 밝혀 주는 불은 초원에서는 굉장히 위험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자연에서 온 게 아닌 용이 준 것이 바로 불이지 않나.

    일렁이는 모양새가 너무나 매혹적이라 눈을 뗄 수 없으나 함부로 손을 대면 다치게 된다. 불에 미혹되어 집어 삼켜지고 말겠지.

    그가 보기에 레그리아는 불처럼 위험한 존재였다.

    비칸은 신황청에 갇혀 있는 동안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수많은 쥐를 부려 그들의 눈과 귀로 신황청을 오가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레그리아가 처음 이 땅에 강림한 날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

    암살자들이 찾아온 날. 황태자가 그녀를 멋대로 다루던 날. 그녀가 숨죽여 혼자 울던 날.

    비칸은 그 모든 날을 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묘한 흐름이 있다.’

    원하든 원치 않던 레그리아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초원이든 아리툼이든 벨리그레엄의 귀족이든… 혹은 신황청이든.

    레그리아를 아는 모두가 그녀를 원하게 되어 있었다.

    이번 대 황태자비. 라히크 바라키엘 벨리그레엄의 것. 황태자를 공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무기라는 건 바로 그런 의미였다.

    아마 레그리아는 이 숲을 벗어나는 즉시 또 누군가에게 추격을 당하겠지.

    ‘갈 곳이 없다면 초원으로 함께 가자고…….’

    그리 제안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에게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의 부족 투악에선 난리가 날 것이다. 질색하고 싫어하겠지.

    레그리아를 미워하기보다는 그녀가 불러올 수 있는 피와 쇠의 냄새를 꺼리는 것이다.

    투악은 다른 부족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전투를 지양해 왔으니까.

    허나 젊은 전사들은 조금 다를 것이다.

    최고 전사인 그가 나서서 그녀를 지키겠노라고, 악마와 악마가 이끄는 군세가 무섭지 않다 선언하면 다들 동조할 터.

    다만 그래서 문제였다.

    비칸은 레그리아가 얼마나 평화를 원하는지 알았다.

    그녀는 늘 쫓기는 듯했고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단 한 번도 편안해 보인 적 없다.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적도 없었다.

    언제나 씁쓸함이 가미되어 있었지.

    헌데 초원으로 데려가도 되겠는가.

    그가 돌아가는 대로 전쟁은 벌어질 것이다.

    젊은 전사들은 더는 참지 않으려 했다. 이끌 자만 있다면 모두가 싸우고자 한다.

    비칸은 투악 족을 이끌 차세대 족장이었으며 투악의 최고 전사다.

    그는 용을 만난 자였다.

    그러니 결코… 부족을 배신할 수 없다. 부족에 해가 되는 결정도 내릴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해?”

    침묵하는 그를 올려다보며 레그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조금 움찔거릴 때마다 비칸은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기에 차마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 두 사람은 몸을 겹쳐 포개어 앉은 상태였다.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이게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비칸은 오늘 밤, 동굴이 아닌 나무 위에서의 노숙을 택했다.

    여기서 가까운 동굴 근처에 인간들이 덫을 놓고 있다는 이야기를 동물들에게 전해 들은 것이 이유다.

    다만 문제는 그가 아닌 레그리아였다.

    노끈이라도 있으면 허리를 나무에 묶은 채 잠들면 되겠지만 그런 건 있지도 않다. 그대로 두면 졸다가 나무에서 떨어질 건 불 보듯 뻔한 일.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나무의 기둥에 등을 기대어 앉고 품 안에 레그리아를 가두는 것.

    “사.”

    “사?”

    무심코 사심이라고 내뱉을 뻔했다. 때마침 부엉이가 울어 대어 말을 멈출 수 있어 다행이었지.

    비칸은 짧게 고개를 내젓곤 그녀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네가 살던 곳의 이야길 해 봐.”

    “내가… 음. 별로 재미있진 않을 텐데.”

    “무엇이든, 부디.”

    비칸은 이를 악물었다.

    레그리아는 지나치게 달콤한 체향을 풍긴다. 그는 신체가 건강한 데다 젊었기에 이 보드라운 여인을 이겨내는 게 너무나 고역이었다.

    차라리 채찍을 맞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내일쯤이면 그자가 숲을 불태우려 하겠지. 하지만 반대에 가로막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나올까.’

    레그리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비칸은 부엉이 한 마리의 시야를 공유했다.

    어둔 숲을 활강하며 아직 안전할 만한 곳이 있는지를 살핀다.

    레그리아와 그에겐 불운하게도 숲의 곳곳에 인력이 깔려 있다. 암흑을 틈타 이동하며 덫을 놓는 신성 기사들을 확인한 비칸은 서서히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잘 피해도 이 숲 전체에 사람이 깔린다면 달아날 길이 요원해지기 마련.

    결국은 싸워서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 만한 자들이 수색하는 곳만 골라 다니는 수밖에.

    반은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또 반은 주변의 기척에 집중하던 비칸은 이윽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만약.”

    “응?”

    “황태자와 내가 싸우게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숲의 왕이 내린 14일이란 기간 내내 운이 좋을 수만은 없다.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왕의 수하로 보이는 맹수들이 그들의 주변을 떠돌며 일부러 추격꾼과 마주치게 하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래 봤자 대부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지만 단 하나.

    황태자만은 이야기가 다르다.

    제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었다.

    그건 경험의 차이이자 나이의 차이였다.

    비칸보다 황태자가 나이가 더 많으니 실전 경험의 폭과 너비가 다를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내일부터는 숲의 경계로 서서히 이동하려 한다. 먹을 것을 거의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응, 알았어.”

    그날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새벽 다섯 시.

    희미하게 동이 트기도 전.

    비칸은 다급한 손길로 레그리아를 깨웠다.

    “…?”

    소스라치며 정신을 차린 레그리아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찾아라.”

    멀지 않은 곳에서 날카롭고 차가운,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히 이 근처에 있다.”

    그것은, 라히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