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34)
  • 79화

    “용은 실존한다. 하지만 죽어 가고 있다.”

    확신이 깃든 나직한 말투에는 듣는 사람마저 믿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레그리아는 홀린 듯 용을 상상했다.

    아마도 강대하고 거대할,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이 땅에 데려오는 마법을 부릴 수 있었을…….

    ‘최초의 원흉.’

    만약 비칸이 말하는 모든 전설들이 오래전에 정말로 일어났던 일이라면 오늘날 그녀가 이 동굴에서 숨죽이며 있게 된 건 모두 용 때문이다.

    필요하여 데려왔으면 다시 돌려보내 줘야 할 것 아닌가.

    눈살을 찌푸리며 괜스레 탓을 해 보던 레그리아는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만.’

    처음에 데려온 존재가 있다.

    ‘그 말은.’

    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솔직히 그렇잖아.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에 ‘길’이 존재한다면 오는 것만 할 수 있을 리가.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간 알-마하카가 있어?”

    “그 어떤 알-마하카도 본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았다.”

    “원했으면 갈 수 있었단 거야?”

    “용이 아프지 않다면.”

    비칸을 채근해 답을 얻어낸 레그리아는 하나하나 차근히 생각을 이어 보았다.

    그러니까 그 용의 병을 치료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 아닌가. 그러면 어쩌면 그녀는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갑자기 환희가 차올라 레그리아는 파르르 떨었다.

    희망이, 있다!

    이제 무엇도 없다고 여겼는데 아직 매달려 볼 구석이 남아 있었구나. 초원국에 용을 만나러 가면, 그러면. 그러면…….

    ‘멍청한 소리를 또 하는구나.’

    그렇게 비트리체가 남을 함부로 믿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레그리아는 제 속에서 왈칵 차오르는 빈정거림에 번쩍 치켜들었던 고개를 서서히 다시 숙였다.

    얼마나 매달릴 곳이 없었으면 저런 어린아이 동화 같은 소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을까 싶어 스스로의 처지가 애잔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자기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설화나 전설이 왜 설화나 전설이라 불리겠는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멍청한 생각 그만하자.’

    지금은 보다 현실적으로 굴어야만 한다.

    정치적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초원국으로 가는 건 자살 행위였다.

    ‘라히크는 아리툼과 전쟁을 치를 작정이야.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누구도 없어.’

    늦든 빠르든 결국 라히크는 군사를 이끌고 남하할 것이다. 초원국에 있다간 그대로 전쟁에 휘말려 죽을 게 뻔했다.

    아니면 전쟁의 협상 도구로 쓰여 다시금 그의 품에 던져지거나.

    그러니 초원국엔 가서는 안 된다. 아무리 기대고 싶어도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 하자.’

    레그리아는 본래 숲을 빠져나가자마자 모스그라토 대공령에 숨어들 작정이었다.

    에화나 모스그라토 대공과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들의 위세를 빌려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거긴 황태자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영토니까.

    대공령은 드넓으니 관광 도시가 여럿 있었는데, 레그리아는 개중에서 ‘웁살라’란 도시에 스며들 작정이었다.

    물론 거기까지 가는 게 위험하고도 어렵지만 남장을 한다면 가능하리라.

    14일째 되는 날, 그녀에게 필요한 건 어느 불운한 병사의 옷이었다.

    “있지, 비칸. 초원국은 어떤 곳이야?”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결론을 내리니 편안해졌다.

    레그리아는 희망이란 들끓는 솥에 스스로를 던져 넣지 않기로 했다. 산 채로 삶겨지는 건 사양이다.

    희망을 갖지 않고 무모한 행동을 포기하면 마음이 이리도 편한 것을.

    “벨리그레엄 인은 초원국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샤-히메룸이라 부른다.”

    “무슨 의미야?”

    “태양이 전사들의 영혼을 이끄는 땅.”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잔잔하고 묵직한 음성과 어우러져 듣기 좋았다.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커다랗다.

    그녀 하나 정도는 품어 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아침은 태양이 떠오름과 동시에 시작된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은 비칸의 두 눈이 꿈을 꾸기라도 하는 듯 몽롱한 빛을 띠었다. 오랫동안 돌아가지 못한 고향을 떠올리는 듯했다.

    “각 씨족들이 모두 모여 오늘의 축복에 감사하는 기도를 올리지. 그러고 나면 어른들은 각기 아이를 씻기거나 먹을 것을 마련하며 분주히 움직인다.”

    “특이하다. 아침부터 사냥을 가는 거야?”

    “일부 사냥조는. 사냥에 흥취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요리를 도맡는다. 샘을 담당하는 자들은 두 개의 조로 나뉘는데, 하류조는 양과 말과 소를 이끌고 강의 하류로 가 물을 먹인다. 그러는 동안 상류조는 사람이 마실 물 을 떠오지.”

    “합리적이네. 각자 할 일이 나누어져 있구나.”

    아마 아주 바쁠 것 같다. 북적거리고 소란스러울 테지.

    머리핀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울릴 듯 고요한 복도와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뜰. 대체적으로 정적이고 가라앉은 분위기의 신황청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겠지…….’

    자꾸 욕심이 난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그 정 많을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보고 싶은 것이다.

    실상은 누구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을 텐데.

    “당신은 사냥조였어?”

    “여덟 살부터.”

    “와, 그때부터 기골이 장대했던 거야?”

    “또래 아이들보다는.”

    신기하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으니 별의별 상상을 다 하게 된다.

    드넓은 초원과 부드러운 풀숲 사이를 마구 뛰어다닐 아이들 같은 것. 잘은 모르지만 강가엔 물푸레나무 같은 것이 자라지 않을까?

    부드럽게 휘어지는 나무로 탄력 좋은 활을 만들리라. 아이들은 자신만의 활과 화살, 칼을 갖게 되는 게 꿈이겠지.

    “얼마나 평화로울까…….”

    무심코 중얼거리자 비칸이 낮게 실소했다.

    “보이는 것만큼 평화롭지는 않다. 오히려 치열하지. 하루하루가 투쟁이니까.”

    “그래?”

    “우리는 한 지역에서 오래 살지 않는다. 4년 정도 지내면 반드시 다른 곳으로 옮기지. 그 주변의 풀을 양 떼와 소들이 다 먹어치우면 초목이 더는 자랄 수 없으니까. 그렇게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또 다른 곳으로. 4년마다 모든 짐을 싸서 이사를 다니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듣고 보니 그렇겠다. 건물을 세우고 땅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연과 함께, 자연을 돌보면서 살아가니까.”

    초원인들은 기본적으로 유목 생활을 한다.

    커다란 텐트를 집 삼아 지내는데, 따지자면 그 생활 양식은 몽골인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럼 있잖아, 또 궁금한 게 있는데…….”

    레그리아는 그 밤이 다 가도록 초원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물었고, 비칸은 묵묵히 답해 주었다.

    궁금한 건 왜 이렇게나 많은지.

    라히크에겐 묻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는데 비칸은 달랐다.

    밀폐된 공간인지라 남녀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은 수를 셀 수조차 없이 많았으나 레그리아는 이상하게 두렵기보다는 다정함을 느꼈다.

    사실 이게 바로 레그리아가 원하는 다정함이었다.

    그녀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어깨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녀의 질문에 최대한 상세히 대답해 주려 노력하는 것.

    무언가를 숨기거나 감추거나 혹은 장난을 치려고 하지 않는 것.

    비칸은 시종 진중했고 존재만으로도 대단히 안정감을 주었다.

    그녀가 본 그 어떤 남자보다도 체구가 장대하다 보니 거기에서 주는 포근함 같은 것도 무시할 수 없을 테지.

    비칸은 최소한 제 여자만큼은 완전하게 지켜 주고 최대한 행복하게 해 주려고 노력할 것 같았다. 자식이 생긴다면 좋은 아버지가 될 것 같기도 했고.

    ‘행복하겠네. 비칸의 짝은…….’

    그런 생각을 하며 꾸벅꾸벅 졸던 레그리아는 저도 모르는 새 툭 기대고 말았다. 근육으로 덮인 팔뚝이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떨어져 나가기가 어려웠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보니 자야 할 시간에 자질 못해 피곤이 누적된 탓이었다.

    ‘일어나면… 미안하다고, 해야…….’

    깜빡깜빡.

    의식이 점멸한다.

    다음에 찾아온 건 꿈도 없는 잠.

    어느덧 레그리아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

    그리고 비칸은 그런 레그리아를 바라보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사가 될 자였다.

    여덟 살부터 숨 쉬듯 사냥을 했고 열다섯부터는 전투를 치렀다. 열일곱이 되자 승리는 언제나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열여덟엔 다른 부족의 여자들이 그에게 다가와 추파를 던졌다.

    그러므로 비칸은 여인에 대해 어색함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언젠가 자신의 짝이 될 알-마하카를 어떻게 귀히 대해야 하는지를 일찍부터 씨족 어른들에게 배웠으며 아래에 달린 것을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도 받았다.

    체모가 굵어지고 완연한 수컷으로 자랐을 때쯤엔 저보다 먼저 어른이 된 씨족 사내들이 밤에 제 짝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려 주었다.

    자지러지는 교성을 지르게 하는 법, 신음하며 허리를 뒤틀게 만드는 법. 그리하여 제 만족이 아닌 짝의 만족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법 같은 것들.

    저마다 제 비법이라고 소곤대는 것을 들으며 비칸은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최고 전사의 짝은 해당 부족의 알-누히람이 정한다.

    투악의 알-누히람은 비칸이 최고 전사의 영예를 입은 날부터 짝지어 줄 알-마하카를 찾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쯤은 찾아 두었겠지.

    부족으로 돌아가면 곧장 성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바깥 여인과 이런 식으로 접촉하는 건 옳지 못하다.’

    못한데.

    “으음….”

    레그리아의 머리가 미끄러져 내려가려 했다. 그 순간, 비칸은 어마어마한 순발력을 발휘하여 그녀의 뺨을 손으로 받쳐냈다.

    말캉.

    갓 태어난 새끼 양보다도 부드러운 피부가 손바닥 안에 휘감기자 본능적으로 아래가 불끈 솟아올랐다.

    불가항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