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34)
  • 78화

    “이건 뭐라고 불러?”

    “샤힘. 과즙이 풍부하고 물이 많아 목을 축이기에 좋은 과일이다.”

    “그렇구나. 그럼 이건?”

    “파즈. 별로 맛이 없고 딱딱하지만 영양소가 높다. 반드시 겉껍질을 까고 먹어야 한다.”

    “손이 많이 가는 열매로구나.”

    탈출 2일 차.

    비칸은 정말 모든 것에 능숙했다.

    적에게 들키지 않게 불을 피우는 것도, 은신할 만한 동굴을 찾는 것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해 오는 것도.

    반면에 레그리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신황청엔 수많은 책이 있었지만 이 세계의 과일이나 약초. 혹은 독초에 대해 설명을 해 둔 사전 같은 건 없었다.

    그런 것 따위 예비 황태자비가 될 신성인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겠지.

    철학, 문화, 역사 그리고 언어. 혹은 간간이 소설책 정도만 있을 뿐인지라 레그리아는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러니 전적으로 비칸에게 의지할 수밖에는 없었다.

    “먹어라.”

    “고마워. 구운 열매, 맛있다.”

    소금도 후추도 없지만 잔불에 노릇하게 익혀진 열매는 먹을 만했다. 뒷맛이 쓰긴 해도 음식에 투정을 부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레그리아는 비칸이 제 몫으로 준 생선 한 마리와 열매를 모두 먹어치우고 천천히 쓰레기를 정리하려 했다.

    “내가 한다.”

    “하지만… 나도 돕고 싶어.”

    “필요치 않다. 들킬 거다.”

    그러나 비칸은 그녀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남은 생선 뼈와 열매의 껍질, 씨를 모아 묻는 것도 모두 그가 한다.

    레그리아는 무력감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은 그가 내린다. 그녀가 해야 할 건 오직 수긍뿐.

    정리를 하러 나간 비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레그리아는 몸을 옹송그렸다.

    최대한 벽에 등을 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무릎을 세워 끌어안으면 콩벌레가 된 것처럼 등이 도르르 말린다.

    스스로의 체온이 반쪽짜리 위안을 제공해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

    “…….”

    아니, 사실은 안정 따위 조금도 되지 않았다.

    셀린은 괜찮을까. 디트리히는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영지로 돌아갔을까.

    표드르는, 표드르는 어떻게 되었을까.

    폭주를 일으켜 마귀가 된 신성 기사는 붙잡히는 즉시 폐기 처분을 당한다.

    이지가 다시 돌아오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표드르의 경우엔 따로 짝이 없는데도 스스로 폭주한 경우이고, 신분이 워낙 높다 보니 여러 천사들이 달려들어 진정을 시킬지도 몰랐다.

    ‘목숨은 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미안해서 어찌 살아. 이 죄책감을 안고 어떻게 행복해질까.

    ‘나는 여기서… 빠져나갈 순 있는 걸까.’

    괜히 저 하나 때문에 사람 여럿이 위험에 처한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사실이었지만…….

    ‘아니, 이런 생각 하지 말자.’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비트리체가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었잖아. 행복해지라고. 몸을 내어준 걸 욕되게 하지 말라고.

    이기적으로 살라고.

    레그리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부정적인 생각을 모두 모아 제 안에 쑤셔 박았다.

    “물이다.”

    “아, 고마워.”

    아무래도 어둠 속에 홀로 파묻혀 있다 보면 사람이 조금 처지고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인 모양이다.

    돌아온 비칸이 내미는 나뭇잎 잔을 받아든 레그리아는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그러는 동안 비칸은 새벽 내내 체온을 유지시켜 줄 모닥불을 다시 피웠다.

    미약한 온기가 반짝거리며 주변을 비추자 그래도 조금 힘이 났다.

    어쩌면 비칸이 돌아왔기 때문일 지도.

    레그리아는 혼자 있는 게 지독하게도 싫었다.

    침묵도 싫다. 온갖 잡생각이 들끓게 만드니까.

    그래서 레그리아는 비칸이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두려고 노력했다.

    “그 풀은 뭐야?”

    “오자크. 상처 회복 약초다.”

    “그 옆의 긴… 강아지풀 같은 건?”

    “부르담. 마취 풀이다.”

    오자크는 톱니처럼 삐죽삐죽한 약초였다. 부르담은… 부들이나 강아지풀과 비슷한 생김새였는데, 비칸은 먼저 그걸 억센 손으로 움켜쥐어 비볐다.

    그러자 익히 아는 푸슬푸슬한 느낌이 아니라 손바닥의 열과 마찰되어 약초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비칸은 말없이 그걸 제 등에 발랐다.

    문제는…… 워낙 등판이 넓다 보니 잘 발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할게.”

    “…….”

    “내가 하게 해줘. 당신도 상처가 빨리 나아야 하잖아.”

    “…부탁하지.”

    다행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라도 있어서.

    허락을 얻은 레그리아는 벌떡 일어나 부르담을 움켜쥐고 빠르게 비볐다. 이내 끈적해진 약초를 그의 등에 조심조심 발라내던 레그리아는 문득 흉터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것은 곪았고, 어떤 것은 터져서 더 손쓸 수가 없을 만큼 심히 흉이 졌다.

    모두 채찍을 맞으면서도 버틴 흔적이었다.

    “라히크가… 원하는 정보를 당신이 갖고 있었어?”

    이전에는 만나기만 하면 탈출 계획을 논의하거나 정신 접촉을 해야 했기에 이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하나 이제는 시간이 많고 무슨 말이든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다.

    비칸은 지나치게 과묵한 사내였기에 레그리아가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정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을 테니까.

    “처음 당신의 존재를 알았던 날. 당신이 침을 뱉어서 라히크의 주의를 끌어주었던 날 말이야. 그날, 분명 라히크는 근거지에 대해 물었어.”

    끔찍한 핏빛 기억을 되짚던 레그리아는 부르르 떨었다. 비칸 역시 좋지 못한 기억이겠지.

    오자크를 돌에 찧어 진액을 낸 레그리아는 등 위로 부드럽게 펴 발라 주었다.

    비칸은 아까보다 좀 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많이 중요한 곳이야? 무엇이기에 당신이 끝까지 지켜내려 했는지… 아냐. 언급해서 미안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서 꺼냈던 레그리아는 그대로 혀를 씹었다.

    비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밝히지 않은 것인데 그에 관한 화제를 입에 올려서 어쩌겠다고.

    비칸의 기운이 싸늘해진 건 아닐까 싶어 염려스러웠으나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비칸에게서는 여전히 미미한 열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녀가 말실수를 했음에도.

    “알-마하카에게는 질문할 권리가 있다.”

    잠시 뒤, 비칸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전사는 알-마하카의 간청을 거부할 수 없다. 그것이 간청이라면 답하겠다.”

    “……아니야. 만에 하나… 내가 잡히면. 내게 어떤 정보도 없는 쪽이 나아. 내게 알려 주지 마.”

    피해 끼치고 싶지 않다.

    레그리아는 거세게 고개를 내젓곤 그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더욱 집중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예민한 손끝은 아주 미세한 상처마저도 전부 찾아냈고, 별달리 할 일도 없었으므로 레그리아는 굉장히 섬세하고 꼼꼼하게 약을 발랐다.

    부욱- 부우욱-.

    저 멀리서 기괴한 새의 울음이 들려온다.

    그들이 숨은 지대 높은 동굴은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는 높이였으나 어떻게 생긴 새인지는 볼 수가 없었다.

    세상이 너무 어두웠으므로.

    이제 약 바르기도 다 끝났고, 무얼 해야 할까. 돌벽을 기어가는 다리 많은 벌레의 숫자라도 세어야 할까.

    할 것이 없어 레그리아의 두 팔에 힘이 빠져나간 찰나였다. 비칸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 것은.

    “태초에 용이 있었다.”

    “응…?”

    “용은 둥근 세상을 알처럼 품었다. 세상이 충분히 따뜻해지자 최초의 균열이 생겼다. 계절이 생긴 것이다. 용의 머리와 팔이 있던 곳은 봄이 되고 용의 배가 있던 곳은 여름이 되었으며 용의 꼬리가 있던 곳은 가을. 그리고 용이 품지 못해 그늘이 진 곳이 겨울이 되었다.”

    “재미있는 설화네. 그럼 초원인은 용을 신으로 섬기는 거야?”

    “그렇다.”

    비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콧잔등에 새겨진 상흔이 모닥불의 잔열을 받아 마치 금빛으로 보였다.

    “이후, 용은 영원한 봄과 여름의 땅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서 만물의 생장을 지켜보고 격려하였으며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어 지성을 주었다.”

    “그게 인간이야?”

    “아니. 동물이다. 인간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지. 용은 인간에게 날카로운 발톱과 털가죽 대신 지혜와 불을 주었다. 그렇게 세상에는 동물과 인간이 생겨났다.”

    이건 또 새로운 시각의 설화네.

    비칸의 말투는 딱딱했지만, 내용이 흥미로워서 어느덧 집중하게 되었다.

    레그리아는 자신이 비칸 쪽으로 저도 모르게 몸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은 지혜로 새를 모방하여 노래를 불렀다. 용은 노래하는 인간을 특별히 좋아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우리의 알-누히람이다.”

    “알-누히람?”

    “벨리그레엄에서는 샤먼이라 부르더군.”

    그러니까, 무당 같은 존재인 거다. 용과 인간을 이어주고 용의 의지를 전하는 이들이겠지.

    역시나 신기했다.

    “세상이 아름다워지자 용은 긴 잠에 들었다. 그러다 한 번씩 깨어나 세상을 둘러보고 아름다우면 만족하고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잠꾸러기 용이네.”

    조금 웃음이 난다. 어쩐지 용이라는 전설 속 생물이 귀엽게 느껴진 탓이었다.

    “용은 최초의 알-누히람과 짝을 맺어 자식을 낳았다. 그들은 전사를 열 명 낳았는데 반은 용이며 반은 인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용의 힘을 쓸 때마다 고통스러워했다.”

    “저런.”

    “고민하던 용은 전사의 짝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용이 만든 피조물은 어떻게 해도 용의 힘이 깃들 수밖에 없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용은 다른 세상에 잠시 다녀오기로 하였다. 그곳에서 용을 타고 온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를 일러 알-마하카라 하였다.”

    “…신성인?”

    “알-마하카는 다른 땅에서 온 구원자라는 뜻이다.”

    초원국에서는 신성인이 굉장히 신성시되고 있구나.

    최소한 벨리그레엄처럼 제멋대로 유린하려 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 용이 초원국에 있는 거야?”

    이건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는 순진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레그리아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가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는 시선에 움찔하고 말았다.

    ‘아니, 진짠가…?’

    조금 당황스럽다. 용에 대한 게 진짜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으니까.

    그런 레그리아를 향해 비칸이 나직하게, 투박한 어조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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