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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77/134)
  • 77화

    창졸간에 벌어진 일.

    무심코 뒤를 돌아본 레그리아는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는 라히크와 눈이 마주치곤 흠칫 놀랐다.

    그에겐 육감이 있었지, 참.

    “X 까.”

    레그리아는 입으로 흉측한 욕설을 그려냈다. 라히크에게는 가 닿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의외로 그의 낯에 새파란 분노가 넘실거렸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표드르가 검을 내리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막아야 했던 라히크는 끝내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일단은 성공적인 도망의 시작이었다.

    * * *

    ‘이 말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말등에 달라붙은 채로 숨을 죽인 레그리아는 온갖 잔가지며 나뭇잎이 몸을 스칠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쓸모없는 드레스 같으니라고!

    보온 기능도, 편의성 기능도 없는 이 형편없는 옷가지는 심지어 치렁치렁하고 펑퍼짐하기까지 했다.

    그 탓에 도망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말은 방해물을 피해 요리조리 잘도 달리는데 그녀의 옷가지가 나뭇가지에 걸려 우드득하고 뜯어내야 했던 게 벌써 몇 번째였다.

    ‘점점 손에서 힘이 풀려.’

    말에 타고 있는 건 절대 편하지 않았다. 승마 역시 명실상부 스포츠이지 않은가.

    어제부터 내내 신경이 곤두서서는 모든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였기에 레그리아는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아, 이제 진짜 못 버티겠…어.’

    고통에 몸부림치던 레그리아의 손아귀에서 고삐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자신이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한 상태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그녀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조심해라.”

    낮으면서도 둔탁한 음성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도 거대하다 싶을 정도로 광활한 흉부와 바짝 말라붙은 살결, 사나운 근육 따위가 남자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아, 포근한 냄새가 난다.

    그는 강하기에 지키는 자, 비칸이었다.

    “무사히 왔군. 고맙다, 친구.”

    푸르릉.

    그녀를 한 팔로 꽉 안은 비칸이 다른 손으로는 말의 목덜미를 두드려 주었다. 말은 별것 아니었다는 듯 뽐내며 대답하고는 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비칸은 말에게서 말고삐와 안장을 벗겨내 태초의 모습으로 만들어준 뒤, 엉덩이를 툭 쳤다.

    “거래는 끝났다.”

    그 모든 과정을 느리게 눈으로 좇던 레그리아는 말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허억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다.

    “그것, 벗어야 한다.”

    “응.”

    “네가 끌려간 듯 꾸미겠다.”

    비칸을 만났다는 안도감은 잠깐이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

    표드르가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라히크가 이길 것이고 뒤쫓을 게 분명했다. 그러기 전에 빠져나가야 하는데.

    비칸은 레그리아가 벗어 던진 겉드레스를 쥐고 이리저리 뜯어 뭉개놓았다. 그러고는 몇 가지 흔적을 더 만들었는데 초원인들이 그녀를 질질 끌고 간 것처럼 꾸미는 듯 보였다.

    그동안 레그리아는 초조하게 등 뒤를 흘끔거렸다.

    이러고 있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라히크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불안감이 뱀처럼 기어올라 양처럼 순결한 목을 옥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외의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 업혀라.”

    이 위험천만한 탈출 앞에서 두 사람이 정한 규칙은 단 하나였다.

    판단은 비칸이 한다. 그녀는 따를 뿐.

    레그리아는 머리칼이 뜯겨나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칠게 금 장식품을 빼내 바닥에 던졌다.

    고통 덕에 정신이 추슬러진다.

    이를 악물고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짜인 등에 업히자 비칸이 그대로 나뭇등걸을 박차고 위로 치솟았다.

    하늘을 붉게 달구던 석양이 자취를 감추고 이젠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비칸에게 매달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를 오가던 레그리아는 메슥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토악질이 쏟아지려는 걸 참고 또 참았다.

    다행스럽게도 우트가르드의 나무들은 끝을 모르고 뻗어 있다. 지금은 나뭇잎이 무성한 계절, 여름.

    그녀만 주의하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그저 새의 날갯짓으로 여겨질 터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무를 훌쩍훌쩍 잘도 오가던 비칸이 우뚝 멈추었다.

    왜 그러나 싶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지만, 그녀의 눈엔 보이는 게 무엇도 없었다.

    그저 암흑일 뿐.

    “조용히.”

    그를 부르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비칸이 아주 낮게 속삭였다. 그러더니 그녀를 나뭇가지의 두꺼운 부분에 앉혔다.

    당장 더 이동하려는 것 같진 않아 레그리아는 이번에는 나무에 매달린 채 바르르 떨었다.

    나무 위가 너무 높아서 그런지 서늘하다. 아니면 그냥 긴장 탓일지도.

    무엇이 문제든 살갗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

    그렇게 레그리아가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는데 앞쪽 어딘가에서 나뭇가지가 부드럽게 튕기는 소리가 났다.

    이제까지 계속 비칸이 내던 소리였기에 레그리아는 의아해졌다.

    그는 여기에 있는데?

    또 누가 맞은편에서 오고 있는 건가? 나뭇가지를 밟고?

    말이 안 되는 가정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관자놀이에 둥글게 맺혔던 식은땀이 녹색 잎사귀 사이로 툭, 떨어진다.

    그와 거의 동시에 레그리아는 비명이 나오려는 목을 움켜쥐어 억지로 참았다.

    귀신처럼 무서운 맹수의 눈이 지척에 있었다.

    크르르.

    놈의 울음이 길고 날카로웠다.

    순간, 구름 사이로 달이 고개를 내밀어 지금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포식자를 비춰주었다.

    황갈색 털을 가진 거대한 몸집. 새카만 점이 박혀 있는 걸로 보아 표범이거나 치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레그리아는 놈의 외양에서 그보다 더한 공포를 느꼈다.

    송곳니가 마치 엄니처럼 길게 뻗어져 나와 있다.

    저기에 한 번 물리면 뼈째 바스러질 거다.

    흥미로운 눈빛을 하고 그녀를 훑고 있는 저 놈에게서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믿을 것이라고는 비칸의 동물 지배 능력 뿐.

    “…….”

    거대한 덩치를 더더욱 크게 부풀린 비칸은 그녀의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놈의 노란 눈깔과 고요히 시선을 맞춘 채 호흡을 느리게 할 뿐.

    비칸이 하는 양을 본 레그리아는 두려워 달싹거리는 입을 꾹 닫고 진정하려 애를 썼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라히크가 기르는 맹수 중에 저런 놈이 있었던가?

    그건 모르겠다.

    있었더라도 아마 비밀 병기 같은 것이라 그녀에게 보여 주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저 기세는… 인간에게 길들여진 것 같지 않아.’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놈은 이 우트가르드의 숲의 지배자다. 틀림없었다.

    무릇 모든 생태계에는 피라미드의 꼭짓점을 차지하는 왕이 있기 마련이니까.

    “크르릉.”

    그녀와 비칸을 훑던 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맞은편의 나뭇가지에 그대로 엉덩이를 내리고 앉아버렸다.

    그러고는 아주 여유 넘치는 태도로 앞발을 핥았다.

    저게 호의의 표시인지 아니면 좀 기다렸다가 먹어 치우겠다는 뜻인지 몰라 뻣뻣하게 굳은 찰나, 비칸이 앓는 소리를 냈다.

    “왕이 시험하고자 한다.”

    “시험…?”

    “왕은 네가 이 숲의 것이라 여기고 있다. 빠져나가려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한다.”

    “!”

    이건 생각지도 않은 걸림돌이다.

    눈앞이 핑글 돌 뻔했지만 레그리아는 버텼다.

    그래, 쉽지 않을 거라 여겼잖아.

    레그리아는 스스로를 달래며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대?”

    “버티라는군. 해가 열네 번 떠오르는 날까지. 다른 인간들에게 잡히지 않고.”

    2주!

    말이 쉽지, 지금 당장 빠져나가야 하는데 14일이란 시간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레그리아는 라히크를 꼭 닮은 오만한 짐승을 있는 힘껏 쏘아보았다. 참으려 했으나 결국 왈칵 차오른 눈물이 눈가에 고이고 말았다.

    대체! 대체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녀를 막아 대는 걸까.

    꼭 온 세상이 나서서 그녀가 달아날 수 없게 막아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뚫고 나갈 수는 없는 거야?”

    “이 숲의 왕은 신수다. 평범한 동물이 아닌 신수는 그 누구에게도 지배당하지 않는다.”

    비칸의 음성이 차분하고 흔들림 없었다.

    그녀만큼이나 이 숲을 떠나고 싶을 비칸이기에 레그리아는 애써 실망감을 주워 삼킬 수 있었다.

    “나는 왕과 싸울 수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거나 죽더라도 은혜는 갚는다. 그러나 내가 무너지거나 왕이 죽을 시, 왕의 동족이 모두 너를 공격할 것이다. 그 틈에서 혼자 빠져나갈 수 있겠나.”

    “……아니. 없어.”

    레그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지도 않은 방해였지만 어쩔 수 없다.

    말이나 곰보다도 더 거대한 저 맹수의 두 눈에는 분명한 지성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아주 즐거워 보인다.

    여기서 발버둥 치면 그녀를 잡아먹을 정당한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라히크 같은 놈.

    레그리아는 속으로 그렇게 욕을 하는 걸로 분을 삼켰다.

    “왕의 동족이 우리 주변을 돌며 감시하겠다고 하는군. 대신 14일 째까지 살아남는다면 이 숲을 나갈 가장 안전한 길을 알려 주겠다고 한다.”

    맹수는 목을 울리며 그르르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걸 어떻게 알아듣고 해석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레그리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는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어쩌면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누가 도망친 예비 황태자비가 보름씩이나 이 숲에 숨어 있을 거라 여기겠는가.

    라히크 역시 외부로 인력을 돌릴 테니 어쩌면 보름 뒤, 외부 인력이 더 멀리 떠났을 때쯤에 나가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정해졌군. 묵을 곳을 찾지.”

    다시 그녀를 업은 비칸이 날래게 움직였다.

    긴 도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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