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34)
  • 76화

    * * *

    표드르가 속에서 역류해 왈칵 차오르는 피를 다시 삼켜내며 묵묵히 숲 안쪽으로 ‘순찰’을 가겠노라 선언한 바로 그 시각.

    말에서 내린 레그리아는 라히크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저게 다 무슨 소리인지 설명해.”

    누구도 듣지 못할 줄 알고 마구 떠들어 대던 작자들은 이번 검투 시합에 따라온 귀족들이었다.

    애초에 이 행사에 기사만 참관할 수 있다는 법은 없다.

    그러다 보니 나이 지긋한 귀족들이 제 아들을 데리고 온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 그녀의 등 뒤에서 바짝 얼어붙어 있는 자들은 개중에서도 눈에 띄던 면면이었다.

    할 말이 있는지 라히크 쪽으로 다가오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눈치여서 기억이 난다.

    “저 사람들이 하는 말. 똑똑히 들었으니 발뺌하려 들지 마.”

    노을이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라히크가 그녀를 실망시키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상처를 받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럼 그렇지’ 정도의 감상일 뿐.

    똑같은 패턴에 몇 번이고 뒤통수를 얻어맞아 왔다. 이제 더는 사양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녀가 여기에서 목청을 높이는 건… 라히크에게 분노하거나 배신감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시간을 끌고 있었다.

    라히크가 비칸과 싸우지 못하도록.

    라히크가, 비칸을 상처입히지 못하도록.

    “모르말라 가루가 임신을 또 할 수 있게 만든다니? 분명히 약초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하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임신을 또 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약초였던 거야? 신성 기사를 한 명 낳게 하는 걸로는 모자랐니? 신성인들이 아이 낳으라고 이 세계에 던져진 줄 알아?”

    일부러 입술을 깨물며 화를 내자 라히크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주름진 미간을 문지르며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레그리아의 등 뒤를 노려보았다.

    비밀 대화를 들킨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귀족들은 마치 죽일 듯한 시선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벌 떨어댔다.

    “나는 네게 거짓을 말한 적 없다.”

    “하, 그래. 진실을 숨겼을 뿐이겠지. 약초인 건 맞으니까.”

    라히크는 침착했다. 저렇게 태연하게 굴 거라고 생각이야 했지만, 정말 그렇구나.

    레그리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좀 더 화가 난 척 비꼬아댔다.

    “아아, 이거구나? 당신의 비책. 그래서 당신은 내가… 당연하게 아이를 여럿 임신할 수 있다고 단언한 거야.”

    “…….”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약초를 먹이고 있었으니까. 아니지. 모르말라를 넣어 목욕하고 잘 때도 향을 피워 두었으니 아주 그냥 절여 놓은 거네.”

    신랄하게 외치는 와중에 귀족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려는 기색을 보였다.

    레그리아는 곧장 고개를 돌려 그들을 노려보고는 한마디 한마디, 짓씹듯 내뱉었다.

    이번엔 진심이 그득 담겨 발린 한마디였다.

    “나는 아기를 뽑아내는 방앗간 같은 게 아냐. 나 외의 다른 신성인들도, 마찬가지지.”

    “그래서.”

    “사람으로 대해. 너와 똑같은 사람으로. 신성인도 사람이야.”

    라히크와 그녀가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대화.

    처음 몇 마디는 부분 부분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나 그 다음은 똑똑히 들었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근처까지 다다른 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떠들어댔으니 말이다.

    “황태자에게 가서 책임을 물어야 하오.”

    “그렇소이다. 우리의 다 속은 거요! 그 어린놈이 한 말을 믿었을 뿐인데. 우리에겐 책임이 없소!”

    “위대하고 신성한 모르말라 가루가 재임신을 가능케 한다! 그건 헛소리인 게 틀림없소!”

    “내 손자 놈이 얻은 신성인은 모르말라 가루를 먹고도 애를 낳자마자 죽…… 히익!”

    라히크의 귀신같은 얼굴을 발견한 귀족들이 입을 다무는 바람에 그 이후는 듣지 못하였지만, 조각만으로도 충분히 퍼즐은 맞춰졌다.

    “아이는 내가 갖고 싶을 때. 내 남편과 상의해서 가질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라히크가 인상을 구겼다.

    실로 철통같던 태도에 처음으로 간 균열이 기뻐, 레그리아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네 모범생 놀이에 어울려 줄 생각 없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칸은 이제 어디쯤 왔을까.

    ‘라히크와 싸우게 둬선 안 되는데.’

    멀쩡하고 건강한 상태로도 라히크보다 아주 약간 약할 것이다. 그러니 붙잡히지 않았겠나.

    헌데 지금처럼 몇 달씩이나 햇볕 한 점 보지 못한 상태라면 라히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장 안전한 건 비칸이 여기서 라히크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남은 힘이라도 잘 보존해서 숲을 빠져나가는 거야.’

    그걸 위해서라면 지금 그녀가 해야 할 건 시간 끌기다.

    무슨 말이든 내뱉어서 라히크가 목표한 장소에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니면 한 시라도 늦게 가게 하던지.

    “난 너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 조금도 없어. 널 좋아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건 더더욱 아니야. 내 옆에 오는 것조차 소름 끼쳐.”

    그녀의 선 넘은 도발에도 라히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한 번 말아 쥐었다가 다시 풀었을 뿐.

    그건 마치 ‘상대할 가치도 없다’라는 듯 보였다.

    “일텐버그 후와 포어프로이테 백을 정중히 모셔라. 모르말라 가루의 효능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이니 검투 시합이 끝나고 천천히 듣겠다.”

    “복명.”

    라히크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나무 그림자를 헤치고 새카만 옷을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기척조차 없이 다가와 귀족들을 연행하는 그들의 의복은 꼭 암살자 같았다.

    어떠한 표식도 없어서.

    “저들은 누구…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다. 불안감이 훅 끼쳐왔지만 목소리를 떨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언제나 그렇듯 감정 통제 연습 덕분이다.

    라히크는 주춤거리며 끌려가는 귀족들의 등을 느른히 훑으며 말고삐를 쥐었다.

    “황태자 직속 비밀 호위대다. 처음 보겠군.”

    황궁에 소속된 호위 기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간 정보를 무수히 수집했지만 저건 몰랐던 사실이다. 변수였다.

    ‘안 되는데.’

    비칸은 라히크에게서 그녀를 탈취해 달아나는 것만 해도 버거웠다. 저들의 공격까지 다 받아낼 수 없을 터.

    레그리아는 손가락 끝이 떨리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제게 손을 뻗는 라히크를 고집스레 거부했다.

    “싫어. 타지 않을 거야.”

    “오늘따라 앙탈이 심하군. 슬슬 봐주고 넘어가는 것도 지겨워지려 한다.”

    “그런 식으로 네가 모든 걸 다 결정하지 마. 내게도 마음이 있고 의지가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게 있고 하기 싫은 게 있는 법이야. 넌 잘난 황태자 교육을 받아서 참고 사는 게 익숙할지 몰라도… 난 아니야.”

    까칠한 태도로 말을 이을 때마다 라히크는 점점 더 무표정이 되어 갔다.

    반대로 레그리아는 속이 시원했다.

    몇 달 내내 하고 싶은 말을 못 해서 얼마나 갑갑했던가. 수많은 어이없고 황당한 일들 앞에서 고분고분하게 구느라 속이 썩어 문드러졌다.

    ‘해가 거의 넘어가고 있어.’

    주변에 어스름이 내려앉을락 말락 하는 시간.

    이런 시간대를 보고 개와 늑대가 구분되지 않는 시간이라 하던가.

    레그리아는 저를 낚아채 줄 그림자를 간절히 기다렸다. 이제 곧이다. 표드르가 나타나고, 뒤를 이어 비칸이 올 시간.

    “전하! 피하십… 컥!”

    그런데 그때였다.

    “전하께 가기 전에 힘을 빼 둬야 한다!”

    “공격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환청처럼 어디선가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그리아와 라히크의 고개가 동시에 소음의 진원지를 향해 돌아가고,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두 사람은 각자가 해야 할 동작을 취했다.

    “물러나라. 마귀는 본능적으로 신성인을 공격한다.”

    말고삐를 움켜쥔 레그리아는 제 앞을 막아선 라히크의 경고에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저쪽에서 스산한 기운이 번져온다. 바람에 실린 피 냄새는 오늘 맡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비렸다.

    쾅!! 쾅! 쾅!!!

    살이 떨릴 듯한 굉음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대포나 폭탄이 없는 세계인데도 폭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스르르. 쿵!

    빛이 휘둘러지며 눈앞이 점멸하자마자 거대한 나무가 쓰러진다.

    그 뒤에서 나타난 건…….

    “표드…르 경?”

    “크르르르…….”

    작은 질문에 돌아온 건 짐승과도 닮은 위협적인 울음이다.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한 눈에도 보였다.

    ‘미쳤어.’

    분명 그녀는 자신을 위해 남에게 희생을 요구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남아 행복으로, 자유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표드르가 이런 방식을 택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

    마귀화라니!

    스스로 폭주를 일으켜서 라히크의 시선을 붙들어둘 작정이었나?

    ‘이미 마귀화가 많이 진행되었어.’

    고운 얼굴 곳곳에 핏줄이 불거져 있다. 이지를 잃은 두 눈은 동공부터 흰자위까지 새빨갛게 물들었고 멍하니 벌려진 입에서 긴 숨이 새어 나왔다.

    그 뒤에서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선 기사들이 다시금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표드르는 신성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자들 중에서도 강자인 것이다.

    헌데 이성이 없으니 어떻게 이길까.

    “표드르 이안 세비레이크 경. 이건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라히크는 이미 검을 곧추세운 채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레그리아는 등자를 밟고 조심스럽게 말에 올라탔다.

    “전하!”

    “지원하겠습니다!”

    “생포합니까? 아니면 죽입니까?”

    비밀리에 라히크를 따라다니던 호위들이 속속들이 등장해 진형을 만들었다. 레그리아는 생각보다 더 많은 숫자에 잠시 말을 잃었다.

    ‘아. 표드르는 다 알고 있었겠구나.’

    이날, 라히크가 열댓 명도 넘는 호위를 붙인 채 다닐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저런 결론을 내린 것이다.

    기사단장 정도 되는 급이 폭주하면 그걸 막기 위해 모두 뛰어나올 것이다. 그러면 비칸이 그녀를 낚아챌 틈을 확실하게 만들 수 있다.

    마귀는 자신의 허무를 채우기 위해 신성인을 노린다.

    이건 상식 중의 상식.

    호위들이 표드르를 막아낼 수는 없다. 힘을 빼놓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러니 라히크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결국은 싸워야만 할 것이다.

    ‘난 이 틈에 달아나야만 해.’

    표드르의 희생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생각하며 피부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억세게 말고삐를 쥔 찰나였다.

    눈 깜빡할 사이 라히크와 표드르 사이에 첫 번째 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레그리아는 자신이 탄 말이 푸르릉하고 콧김을 내뱉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흔드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다가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듯 앞발로 땅을 차기까지.

    말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라지만 이건 분명 이상한 행동이다.

    모두가 표드르에게 집중하느라 그녀에 대한 감시가 옅어진 찰나.

    뭔가를 직감한 레그리아는 말고삐를 놓았다.

    말은 누군가의 부름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 스스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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