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34)
  • 73화

    해당 스콰이어는 며칠 전, 술집에서 취해 난동을 피웠다고 한다.

    자신이 황궁 기사의 종자라는 걸 내세우며 거만을 떨었다지.

    하필이면 퇴근하는 조슈아의 눈과 귀에 그 장면이 박혀 들었으니 재수가 없는 편이라 볼 수도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런 사사로운 일들이 라히크의 귀에까지 들려오진 않으나 공교롭게도 놈은 다음 서임 명단에 올라 있었으므로 조슈아는 즉각 보고를 올렸다.

    그러므로 이것은 치죄다.

    억울하다면 항명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오르거나, 어떤 짓을 하여도 용서될 수 있는 실력을 지니면 된다.

    반역만 아니면 라히크는 공을 세운 자에게 너그러이 굴 의향이 있었으므로.

    “어라? 석궁 개량에 성공하셨다고 좋아하시더니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레그리아 님이 도저히 시연을 못 보이시겠다던가요?”

    “아니.”

    “하긴, 비전하께서는 상당히 대범한 구석이 있으시니까요. 잘 설명드리면 이해하시고 쏘실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이번에 레그리아가 직접 무기 시연을 보이게 된 것은 모두 조슈아의 아이디어였다.

    레그리아는 차세대 황태자를 낳을 모후로서 존중을 받기야 할 것이다.

    다만 라히크의 위대한 정벌 계획을 생각하자면 고작 그 정도로는 모자라다.

    예비 황태자비는 기사들의 존중과 신뢰를 넘어 존경을 얻어야 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라히크가 나라를 오래 비워도 그동안 내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기사들이 스스로 레그리아를 인정하고 존경하며 또 하나의 주군으로 믿고 따른다면 벨리그레엄은 안팎으로 단단히 다져져 무너질 틈이 없을 터.

    물론 뭐 그렇다고 해서 레그리아가 검이라도 들고 날뛰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무기를 만지는 것에 거부감이 크지 않음을 내보이고, 실제로 사용을 해보는 대범함을 드러내는 정도면 족했다.

    어떤 악재가 닥쳤을 때 레그리아가 나라를 이끌어갈 만하다는 걸 보이는 것이니까.

    그래서 라히크는 레그리아가 스스로 석궁을 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게 강요라 느껴졌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거기서 피하는 추태를 보였다간 당장 내일부터 어떤 소문이 퍼지겠는가.

    군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이 나라의 안주인 될 자가 소심하고 유약하여 그러하다고 떠들어 댈 게 뻔했다.

    그러므로 그의 선택은 옳았다.

    옳았을 터인데.

    “그녀가 내게 사랑하느냐 묻더군.”

    “예에?”

    “우스운 소리지. 실존하지도 않는 것에 왜 그리 목을 매는지.”

    없는 개념이다.

    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다들 그토록 받고 싶어 하는 건지.

    “음… 전하. 저는 전하를 주군으로서 존경합니다만… 이따금 걱정이 됩니다요.”

    조슈아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비전하를 좀 더 다정히 대해 주십시오. 사교계에서 필요에 의해 만나는 영애들에게는 잘하시지 않습니까.”

    “지금도 충분히 다정하지 않은가.”

    “그럼 조금 더 자상하게요. 사랑이라 느낄 수 있게 거짓으로 대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라히크는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그는 황제가 될 사내다.

    황제는 무릇 설명을 듣는 자이지 하는 자가 아니므로 라히크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다만 조슈아의 말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명령을 내렸다.

    “신방 준비를 해라.”

    “신방이요? 결혼하고 나면 첫날밤에 드는 그거요?”

    “신황청에. 좀 더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면 되겠지.”

    귀하게 여겨지고 싶다 하였나.

    이 세상에 황태자인 그보다 그녀를 더 귀하게 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존재치 않는다.

    그간 몸을 맞댄 장소가 별로라 느껴져 앙탈하는 거라면 신방을 설치해 주면 되는 것 아니겠나.

    성마르게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던 라히크는 이내 머릿속에서 레그리아에 대한 생각을 깔끔히 지워냈다.

    지금은 검투 시합이 더 중요했다.

    “검투 시합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초원국 최고 전사의 손목을 묶어 둔 줄은 일부러 느슨하게 해 두도록 조치하려 합니다. 부디 신나게 날뛰어주면 좋겠군요.”

    이번 무대는 라히크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고 벨리그레엄의 기사들을 복속시키는 자리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모두의 앞에서 초원의 야만인을 짓누를 것이고 그 장면을 본 벨리그레엄의 기사들은 아리툼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단 믿음을 가질 터.

    “포로들에게 고기를 배불리 먹여라. 쉬이 끝날 잔치를 원치 않는다.”

    “예, 전하.”

    그리고 맹수들은 굶긴다.

    먹기 좋게 살집이 오른 사냥감을 놓칠 녀석들이 아니지.

    ‘어디 한번 네 힘을 내보여 보라.’

    라히크는 저를 향한 건방진 두 눈을 생각했다.

    하늘을 베어 담아둔 듯한 푸른 눈동자는 도통 꺾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투악의 최고 전사, 비칸.

    그는 이번 검투 시합에서 라히크가 가장 고대하는 사냥감이었다.

    * * *

    남의 머리와 사과. 둘 중 하나를 쏘아 맞혀야 했던 그 날 이후, 레그리아는 미친 듯이 작곡에 매달렸다.

    라히크에 대한 분노를 원동력 삼았더니 불가능이란 없었다.

    광기 어린 그녀의 두 눈은 에오스나 호위 기사마저 움찔하게 만들 만큼 안광이 번들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검투 시합 당일.

    암호문으로 이뤄진 심포니가 완성되었다.

    제목은 <과녁>.

    그 내용은 대부분이 고상한 욕설이다.

    “환복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잉크병이 다 닳을 때까지 써 내려간 종이는 소중히 모아 베개 밑에 두었다.

    나중에 발견하거든 해석하려고 애를 써 보던지.

    레그리아는 옷을 입히러 들어온 에오스의 손길에 몸을 내맡긴 채 오늘의 계획을 차근차근 되짚어보았다.

    ‘준비는 완벽해.’

    비칸은 쇠약해진 상태였다.

    몇 달 내내 태양을 보지 못한 채 갇혀 고문을 당하니 건강할 리가 없지.

    그러나 그의 내면은 달랐다.

    ‘내 도움 덕에 비칸은 충분히 동물을 부릴 수 있어.’

    그리고 우트가르드의 숲에는 동물이 많이 산다.

    비칸은 나뭇가지에 앉은 올빼미의 시야를 공유하고, 바닥을 기는 뱀의 진동을 함께 느낄 수 있노라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고 단순히 눈과 귀가 아닌 오감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하기에 탈출에 무리가 없다고도 했지.

    레그리아는 이제 그를 믿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표드르도.

    그간 예비 황태자비로서 연회에 참석하면 레그리아는 꼭 슈만과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표드르나 디트리히.

    둘 중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오고는 했다.

    레그리아는 새롭게 작곡하고 있는 곡의 일부라며 악보를 자랑했고 그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녀의 계획이 무모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번 곡은 별로입니다’라고 하거나, 괜찮다 싶으면 ‘기대가 됩니다’라고 하면서.

    그건 모두 다 라히크가 악보에 암호가 숨겨져 있음을 알지 못했기에 가능한 속임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실패하면 안 된다. 라히크는 두 번 당해 줄 만큼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니까.

    오늘 달아나지 못하면 모든 게 끝.

    훨씬 숨 막힌 상황에 놓이게 되겠지.

    “잘 어울리십니다.”

    “고맙네.”

    희고 가느다란 목에 사냥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걸이가 걸린다.

    오늘 그녀도 라히크와 함께 말을 타고 다니겠지만 주체가 되지는 못할 거라는 표식이다.

    레그리아가 승마를 할 줄 알고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편한 승마복이 아니라 치렁치렁한 드레스나 입힌다는 건 의도가 뻔하지.

    어떻게 해야 에오스의 눈을 피해 바지를 안에 덧입을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하던 레그리아는 문득 에오스가 머뭇거리며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전하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오늘 아침에 황태자 전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다만 비전하께서 알고 계시는 것 같지 않아… 알려드리려 합니다.”

    뭐기에 저러는 걸까.

    에오스가 저렇게 미심쩍게 구는 일은 잘 없었기에 불안감이 치밀었다.

    오늘의 완벽한 계획에 조금의 어긋남도 생겨선 안 되는데.

    “…이게 대체 뭐지?”

    “신방입니다.”

    “신방이라면… 누가 결혼을 하기라도 하나?”

    이윽고 에오스가 그녀를 이끈 곳은 자주 가 본 적 없는 어느 침실 앞이었다.

    문이 활짝 열린 채 하인들이 짐을 나르고 있다.

    바닥엔 융단 카펫을 깔고 침대 주변으로는 꽃을 뿌렸으며 온 사방에 향내가 진동했다.

    전체적으로 붉고 어두운 톤의 신방은 야릇하고 은밀해 보이기는 했지만 레그리아의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검투 시합이 끝나면… 비전하께서 들게 되실 겁니다.”

    “내가 여기에?”

    “…예. 혹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최대한 반영하여 마음에 드시게 바꾸어 놓겠습니다.”

    에오스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쭉 끼쳐 왔다. 확연한 깨달음이 닥쳐온 탓이다.

    ‘라히크가 나를 취하려 한다.’

    이번에야말로 끝까지.

    그녀의 의사는 조금도 없이, 인간 사냥으로 흥분한 육신을 달래려는 용도로 이런 걸 설치하라 한 거겠지.

    그런 의도가 빤히 읽히는 것만 같아 헛웃음이 나지만 상관없었다.

    ‘오늘 내가 도망치려 한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구나, 너.’

    그거면 됐다.

    “비전하! 이제 내려오시래요!”

    그때, 셀린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알렸다.

    에오스와 그녀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을 깨 준 게 고맙다.

    레그리아는 부러 셀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셀린, 너는 내가 소중하니?”

    “네에에? 다, 당연하지요!”

    “그러면 내가 또 위험에 처하면 구하러 올 거야?”

    “왜, 왜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세요….”

    셀린의 강아지 같은 눈매가 금세라도 울 것처럼 촉촉이 젖어 들었다.

    신황청 문 앞에 선 레그리아는 다정하게 미소하며 셀린의 손을 꼭 잡았다.

    “꼭 구하러 와야 해. 알았지?”

    나를 구하러 와야 네가 사니까.

    레그리아는 자신이 떠난 자리에 셀린을 희생양으로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비전하.”

    “레그리아 님.”

    너른 뜰을 왁자지껄하게 채우던 목소리들이 그녀의 등장과 함께 잦아들었다.

    레그리아는 기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라히크를 향해 다가갔다.

    “나의 비께서 오셨군. 포로를 끌어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