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34)
  • 72화

    바로 그 순간, 레그리아 기사들의 시선을 느꼈다.

    무언가를 재어 보고 판단하고자 하는 눈빛들.

    저들은 재판관은 아니었으되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확인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다.

    ‘아. 내가 보여 주기를 바라는 거구나.’

    이러한 일을 해낼 담력이 있음을. 라히크의 짝으로 어울린다는 것을. 그 자격을 증명해 내기를 원하는 거다.

    그러니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또한 누구도 저 가여운 스콰이어를 구해 주지 않을 것이다.

    스콰이어가 죽을지언정, 그녀는 여기서 석궁을 쏘아야만 하니까.

    처절한 회피 끝에 결국 현재 상황을 인정한 레그리아는 석궁의 각도를 최대한 높게 맞추려 애를 썼다.

    그렇게 몇 초 뒤. 완벽하게 머리를 비껴나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자 그녀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라히크의 추가적인 개입을 막은 것이다.

    혹시라도 그녀가 해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아슬아슬한 선까지 손을 잡아당길까 싶어서.

    “!”

    쐐애액!

    결정은 어려우나 쏘아 날리는 것은 쉬웠다.

    허공을 찢는 거센 파공음. 그 사이로 역시나 라히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는 게 들렸다.

    그 끝에 닥쳐온 것은 누군가 목덜미를 잡고 뺨이라도 내리치는 듯한 거센 충격.

    쾅!!!

    화살이 스쳤을 뿐인데 스콰이어가 서 있던 나무 과녁이 산산조각 나 부서졌다.

    졸도할 것만 같아 당장 주저앉고 싶었으나 그녀가 사람인 이상 그럴 수가 없다.

    스콰이어가 살아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확인을 해야만.

    혈류가 치솟고 갈비뼈를 부숴 압착시키는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찾은 적 없던 신이 지금만큼은 간절하였다.

    부디 저자를 죽이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 이렇게 빌 테니까…….

    “아깝군. 조금만 더 아래로 두었더라면 맞추었을 텐데.”

    “…하.”

    다행이다.

    정말 유감이라는 듯한 라히크의 한마디에 잔뜩 참았던 숨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부풀었던 폐가 제자리를 찾고 꼬였던 장기가 비로소 원위치 되는 듯한 기분.

    다리가 후들거려 결국 풀밭 위로 내려앉고 만 그녀의 머리 위로 라히크가 짧은 통보를 했다.

    “사흘 뒤, 검투 시합 때 데리러 오겠다.”

    “잠시만.”

    비척거리며 일어선 레그리아는 반파된 과녁과 엉엉 울고 있는 스콰이어에게 흔들리는 시선을 보냈다.

    거칠게 부서지고 쪼개어진 나뭇조각이 꼭 지금 제 모습 같다. 근육이 놀랐는지 벌벌 떨려 손이며 팔에 힘조차 줄 수가 없었다.

    ‘온몸이 아려.’

    라히크가 내어놓는 시련은 그게 어떤 것이든 괴로웠지만 오늘은 유독 혹독하였다.

    “잠시 기다려, 라히크.”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새까만 구둣발이 들어선다.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단정한 그것은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듯 태연했다.

    저와는 달리 언제나 완벽하고 고아한, 날 때부터 흠집 하나 없었을 사내.

    이 남자가 무너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언젠가 너도 이런 고통을 똑같이 되돌려 받기나 할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제 의지 없이 흔들리고, 가까이 오기만 해도 긴장되고, 초조하고, 두려운.

    네게 공포를 학습시킬 수는 없을 테니 차라리 나를 사랑이라도 하기를.

    그러면 지금 이게 어떤 마음인지 명확하게 가르쳐 줄 수 있을 텐데.

    공포와 사랑은 양면 거울처럼 그 양상이 닮아있었다.

    “당신, 나를 사랑해?”

    “이상한 것을 묻는군.”

    “그래, 그렇지. 우리 사이에.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기분이야. 사랑한다고 해 줄래?”

    라히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웬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다는 낯이어서 실소가 샌다.

    라히크는 사랑을 모른다. 공포 또한 몰랐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처참해졌어야 했는지도 가늠하지 못할 테지.

    “나는 있잖아, 라히크. 당신이 나를 사랑하길 원해. 아주, 아주 많이.”

    그래서 언젠가 떠난 나를 그리워하며 오늘 이 순간을 지독하게 후회하기를 기도한다.

    이런 소원도 들어주는 신이 있다면 레그리아는 영혼이라고 바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빗나가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맞혀서 눈이나, 귀나, 목덜미를 다치게 했다면. 과녁조차 부숴 버리는 저 화살이 전도유망한 스콰이어를 불구로 만들었더라면.

    그 목숨을 앗았더라면!

    그럴 수 있었다. 방금 그녀는 누군가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고….

    무력한 제물을 향해 죽음을 쏘아내는 기분은 이루 말할 것 없이 좆같았다.

    언제고 그녀가 저 과녁 앞에 설 수 있음을 알기에.

    “걱정할 것 없다. 결혼 후에 나는 네게 충실할 테니. 남편으로서, 아비로서 의무를 다할 것이다.”

    “…그래, 그러겠지. 사랑하지도 않는데 아이는 왜 원해? 후계자 때문에?”

    “오늘따라 실로 이상하게 구는군. 나이가 차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일구는 것은 제국 신민으로서의 책무다. 나는 황태자이니 그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야 하고.”

    모범.

    라히크가 집착하는 단어.

    가슴이 할퀴어진다. 뻔히 예상한 대답이었는데도.

    그러나 이 상처를 안고 혼자 울고 싶은 그런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있지, 소망이 있어.”

    라히크에게 똑같이 상처를 입히고 싶다.

    그 바람 하나가 성대를 열어 갈라진 목소리를 억지로 뱉어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이 사랑받는 거야. 소중하고 또 소중하게. 귀히 여겨지고 싶어.”

    레그리아는 심히 메말라 있는 흙구덩이였다. 누군가 적선하듯 뿌려주고 가는 물 몇 모금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녀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을 원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기를. 그리하여 가진 것이 서로에게 서로 뿐이기를.

    라히크는 눈가를 실긋이 찡그리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래서 귀히 여겨 주고 있지 않은가. 석궁을 쏘아 볼 기회는 흔치 않다. 그보다 석궁과 이 대화에 무슨 연결 고리가 있는지 모르겠군.”

    대체 너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

    레그리아는 비칠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억지로 버텨 섰다.

    그런 다음 의관을 올바로 정돈한 뒤, 라히크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겨 올렸다.

    “사랑해.”

    내동댕이치듯 아무런 가치 없이 던진 거짓 고백. 진심 한 톨 섞이지 않은 것.

    역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을 자아내 원하는 말을 들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도.

    * * *

    그리 늦지 않은 시각에 황성으로 돌아온 라히크의 기분은 상당히 저조한 상태였다.

    그의 눈치를 보던 부관들이 조슈아의 앞에 은근슬쩍 서류를 놓고 뒷걸음질로 사라지는 걸 보았지만 그럼에도 라히크는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을 펴지 않았다.

    “사랑해.”

    신황청에서 나와 이곳까지 오는 긴 시간 내내 환청이 들린다.

    아니, 환영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몸은 익숙한 집무실에 있으되 정신은 여전히 우트가르드의 고즈넉한 뜰에 뿌리박힌 듯했다.

    ‘왜 대답을 하지 못하였는가.’

    이게 지금 라히크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질문이다.

    황태자로서 키워진 그는 언제고 정답이 준비되어 있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에겐 걸어가야 할 길이 명확했고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도, 흔들린 적도 없었다.

    그저 정해진 대로 걷기만 하면 될 일인데 어찌하여 그것조차 하지 못하는 건지, 주변을 돌아보며 한심하다 여긴 적도 많았다.

    검을 잡고 휘두르는 법, 사회적 문제, 정치, 종교적 이슈에 관한 것, 백성을 돌보는 일, 민심을 달래는 방법, 서류를 읽고 쓰고 처리하는 효율적인 일 처리 방식 등.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그가 모르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방금 레그리아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새어 나온 한마디에 대해서는 답할 길을 찾지 못하는 중이다.

    ‘딱히 대답을 요구한 것도 아니어서 그런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되짚어보면 ‘사랑해’라는 말에 앞서서 레그리아는 ‘당신, 나를 사랑해?’라고 질문했다.

    이것은 완벽하게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으므로 그는 ‘그렇다’라고 답을 내놓았어야 옳았다.

    아까의 상황에서 벗어나 찬찬히 복기하니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상한 것을 묻는다’라고 한 대답은 잘못된 것이었다.

    레그리아를 길들이기 위해선 거짓 마음 정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어째서 말문이 막혀왔는지.

    ‘분명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 그건 실재하지 않는 감정이다.

    라히크는 단언했다.

    몸을 부대꼈기 때문에, 함께 지낸 시간이 있으므로 생겨난 친밀감 정도라면 모를까.

    라히크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자기실현의 일종이었다.

    자신은 뭔가 다르다, 남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다는 증거를 상대로부터 굳이 받아 내고자 하는 것.

    소멸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자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헛된 희망을 좇아 서로에게 기대어 안온을 찾는 행위.

    그런 한심한 것을 그가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쯧.’

    라히크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왜? 이런 짓을, 대체 왜 하는 거야?”

    어린 스콰이어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리라 명한 것엔 별 이유가 없었다.

    그저 레그리아의 눈길이 보다 오래 닿았고 그게 불쾌했음이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편협하지 않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