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34)

70화

5. 탈출(Fliehen)

피아노의 선율이 경쾌하게 허공을 내달렸다.

활짝 열어 둔 창문을 통해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계절. 초여름.

덫에 걸린 듯 괴로웠던 겨울을 벗어나 봄을 넘어, 드디어 이날이 도래했다.

여름을 맞은 신황청은 언제 어둡고 칙칙했냐는 듯 눈 닿는 곳곳이 죄 화사했다.

하늘하늘하고 얇은 커튼으로 새 단장을 한 커다란 창문과 그 앞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거기에 앉은 붉은 머리칼의 여인도, 희고 고운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연주도 이제는 신황청에서 익숙해진 풍경 중 하나였다.

“그렇지요. 거기서는 더 빠르게!”

오늘은 슈만과의 수업이 있는 날이다.

이제는 더 배울 것이 없어 수업이라는 취지에 맞지는 않았으나 그 외에는 달리 붙일 이름이 없다.

이 풍요롭고 행복한 순간을 이를 수 있는… 조금 더 특별한 단어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슈만과의 수업은 한 주 중,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레그리아가 버티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기도 했다.

“실로 천재이십니다! 어쩜 이런 작곡을 하시는지요?”

“칭찬이 과하네.”

“아닙니다. 말주변이 없어 칭찬이 모자란 거지요. 진심으로 부럽기 그지없어요. 어떻게 명곡만을 이리 쑥쑥 뽑아내시는지…!”

슈만은 오늘도 그녀의 자존감을 올려 주는데 큰 일조를 하였다.

자신 역시 사람인지라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잘한다, 좋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슈만은 늘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어 줬고.

레그리아가 민망하여 볼을 붉힐 정도로 말이다.

‘떠나면 슈만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 그 하나가 아쉬워.’

그녀의 평생에 슈만보다 더 좋은 음악적 이해자를 또 만날 수가 있을까.

불운과 불행이 겹쳤던 삶인지라 슈만 같은 사람은 너무나 귀했다.

하지만 떠나면 두고 가야 하겠지.

그래도 그녀의 남은 평생 동안 슈만과 함께했던 기억만큼은 오래도록 빛을 발할 터였다.

아마 죽는 날까지도 잊지 못하겠지.

“참, 그렇지. 비전하, 이번에는 피아노 독주곡 말고 교향곡을 한 번 작곡해 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교향곡? 내가 그렇게 어려운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비전하께오서는 여러 악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으십니까. 피아노를 특별히 잘 치시는 것뿐이지 다른 악기가 어떠한 소리를 품었는지… 어떻게 해야 잘 어우러질지도 아시니까요.”

“으음.”

“이 슈만은 믿고 있습니다. 비전하께서는 이미 모든 악기의 선율이 상상만으로 들리는 경지에 이르셨다고요.”

슈만이 손을 뻗어 마치 지휘를 하듯 움직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고아하여 눈길이 간다.

몇 달 동안 친해지며 깊이 알게 된 슈만 부코바츠는 그녀의 이상향이나 다름없었다.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거든.

슈만에게는 평소엔 투덕거리지만 그래도 힘든 순간, 어려운 때에는 도움이 되고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이 있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자식들도 있었고, 슈만을 존경하는 제자도 많았다.

음악계에서의 입지는 또 어떠한가.

슈만은 레그리아가 가지고 싶었던 그 모든 걸 이미 갖고 있었다.

하지만 샘이 나지 않는 건 슈만의 인품이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기 때문이겠지.

혹은 나이를 뛰어넘어 그들이 진정한 친구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그리아는 라히크가 준 것은 대부분 싫어했지만 딱 하나. 슈만과 연결해 준 것만큼은 감사히 여겼다.

“참, 결혼식 드레스는 고르셨는지요? 저번 주만 해도 도무지 고를 수 없다 하셨잖아요.”

“고르긴 했다네.”

“어떤 걸 입으실지 참으로 기대가 되옵니다! 분명 눈부시게 아름다우시겠지요.”

아니, 그 드레스는 분노한 라히크의 손아귀에 갈기갈기 찢길 운명이야.

레그리아는 잔잔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이 결혼이 너무너무 기다려지는 사람처럼. 황태자비라는 영예를 누리고 싶다는 듯이.

그녀는 그렇게 제 속내를 감춰왔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가면무도회에서부터 오늘까지.

“심포니라…….”

이윽고 슈만이 돌아간 뒤, 혼자 남아 건반을 쓸어보던 레그리아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암호로 이루어진 심포니를 만들어 볼까.

물론 그건 아주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라히크에게 내지르고 싶었던 모든 말들을 음표에 담아 연주가 가능한 곡으로 만들어야 하니 쉬울 수가 없겠지.

하나 한번 생각을 시작하자 슈만의 장담대로 환청이 들려왔다.

격하게 일어난 풍랑처럼 거칠고 무도한 분위기로 곡을 짓고 싶다. 어느 부분에선 불협화음이 들어가 위협이라도 하는 양 굴어보고 싶었다.

그가 늘 그녀를 위협하였듯이…….

‘이번엔 내가 너를.’

저도 모르게 음정을 흥얼거리며 레그리아는 깃펜을 움직였다.

질감이 거칠고 나쁜 이 세계의 종이는 처음엔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사용할 만했다. 펜촉의 끝이 날카롭게 긁어내리는 소리가 듣기 좋기도 했고.

“…….”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참 집중을 하던 레그리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갔으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고 걸리는 부분이 생긴 탓이었다.

하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목과 어깨가 뻐근하기도 했고.

그때였다.

“다 썼나?”

“……!”

그녀의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레그리아는 펄쩍 뛰고 말았다.

비명을 내지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지.

“라히크! 대체 언제 온 거야.”

“글쎄. 모르겠군.”

작곡에 푹 빠지는 바람에 노크를 하는 것도, 문고리가 돌아가며 열리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라히크는 문에 기댄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움직이자 다가온 듯했다.

“기척을 내지 그랬어.”

“방해하기는 싫어서. 무얼 하고 있었지?”

“비밀.”

“새로운 곡을 만드나 보군.”

비밀이라 했는데도 라히크는 책상에 놓인 악보를 가져가 햇볕에 비춰 보았다. 마치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쓰인 글이라도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그러던 그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악보를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너무 걷지 않는 것도 좋지 않다. 산책을 하지.”

“어쩐 일로 왔어? 검인지 활인지 때문에 요즘 바쁘다며.”

“군부에서 연구 중이던 신식 무기 건이다. 얼추 해결이 되었고.”

“그렇구나.”

요즈음 라히크와 그녀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라히크가 변한 것은 없으나 레그리아가 달라졌다.

그에게 맞추어 좀 더 유순하게. 그를 심하게 자극하지는 않는 쪽으로.

그건 마치 반항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고 이러한 생활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유함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라히크는 보름에 한 번씩은 그녀를 시험하고 몰아붙이며 그의 기저에 깔린 의심을 진실로 바꿀 흔적을 찾으려 들었으나 소용없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심 정황 같은 건 전혀 없으니까.

레그리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라히크 역시 멍청하지 않지.

그러므로 레그리아는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전제는 세 가지.

첫째, 그녀와 비칸이 비밀 통로를 통해 만나고 있다는 건 절대 들키지 않아야 한다.

둘째, 라히크는 의심할 거리가 없이 깨끗하다면 그걸 더 의심하여 파고들 자다. 집요하니까.

즉, 라히크가 미세한 의심을 계속 품고 있는 게 가장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가 그녀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해야만 하고.

셋째, 혼자 목욕을 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목욕에도 이유를 붙여야만 한다.

그걸 모두 충족시키기 위한 미끼는 바로 승마였다.

처음 마구간에 간 날 이후로 레그리아는 한 주에도 몇 번씩 승마를 즐겼다.

좀 거친 방식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 쓰도록.

그런 다음 어떤 날은 시중을 받아 씻고, 어떤 날은 혼자 씻는 것으로 기분에 따라 달리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혼자 씻겠노라 하는 게 그리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라히크는… 내가 말을 타고 숲을 빠져나가려 한다고 의심 중이고.’

하지만 내버려 두는 건 실제로 말을 타고 숲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간 알아본 결과, 우트가르드의 숲은 그 자체로 미로였다. 오죽하면 별명 자체가 나무의 미로일까.

게다가 지금은 숲 곳곳에 산발적으로 신성 기사가 퍼져 있었다.

온 대지가 울리도록 말을 타고 빠져나간다는 건 어불성설.

“오늘도 승마를 할 텐가.”

“응. 그럴래.”

“말에 올려 주지.”

너는 정말 악취미다.

레그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라히크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한 낯가죽을 꾸며내었고.

그녀가 말을 몰아 달아나려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기꺼이 안장에 태워 주는 친절이라니.

새장을 빠져나가도 더 큰 유리 온실에 갇혀 있을 뿐, 도망 갈 수 없다는 뜻 아닌가.

그의 매너는 너무나 오만했다.

“혼인식 날에는 아리툼에서 국빈이 올 거다.”

“읏…!”

“그 저열한 자들 앞에서는 조금의 틈도 내보여선 안 된다는 걸 잊지 말라.”

그녀를 앞에 태우고 함께 말에 오른 라히크는 서슴없이 얄쌍한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더운 사내의 몸에 붙여진 하체에 열기가 스멀스멀 오른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그 기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라히크를 진정시키고 그를 유하게 만들기 위하여 기꺼이 바쳤던 숱한 밤의 시간들…….

어둑하고 붉은 장면들이 유리 조각처럼 쪼개어져 아래를 찔러댄다.

이제 레그리아의 육신은 라히크와 몸을 붙이기만 해도 들뜨고 욱신거렸다. 끝까지 간 적 한번 없음에도.

라히크는 그런 레그리아를 안다는 듯 피식 실소하더니 메마른 입술을 귓전에 붙였다.

“이 배에 아이가 여럿 들어설 날이 기다려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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