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에이, 너무 나간 생각이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쥐라는 동물이 본디 이렇게 사람의 손을 잘 타던가?’
아닐 텐데.
한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조그만 쥐의 움직임에 신경이 쓰인다.
녀석은 그녀의 어깨를 타고 놀다가 다시 바닥으로 뽀르르 내려갔는데, 편리성을 위하여 드레스에 달아둔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게 아닌가.
마치 이대로 자신을 방에 데려가 달라는 것처럼.
“비, 비전하… 혹시 갔나요?”
“응, 갔단다.”
“휴우우. 다행이에요.”
아까부터 눈을 꼭 감고 있던 셀린은 아주 손가락 사이로 조그맣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레그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구간을 한 바퀴 돌다가 눈이 마주친 말 한 마리를 향해 조용히 웃어 보였다.
‘비밀로 해 주기야.’
푸르릉.
말이 알겠노라 고갯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콧김을 뿜었다.
생쥐는 그녀의 주머니 안에서 몸을 만 채 조용히 있었다. 불편할 텐데 기특하게도 찍찍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이제 그만 올라가야겠어. 날씨가 영 서늘하구나.”
“그, 그렇지요? 모시겠습니다!”
침실로 돌아가겠노라 하자 셀린이 반색하며 마구간을 뛰쳐나갔다. 그 뒤를 느릿하게 따르며 레그리아는 기도했다.
부디 이게 초원의 최고 전사가 보낸 어떠한 신호이기를.
레그리아는…… 황가고 모스그라토 대공가고 다 지긋지긋했다.
* * *
오늘은 무도회 다음 날이므로 하루 종일 휴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슈만 부코바츠도 내일 오기로 하였고 역사나 언어를 가르치는 교사의 방문도 내일이다.
그러므로 레그리아는 방 안에서 누구도 없이 푹 쉬겠노라고 선언했다.
“들어오지 마. 혼자 조용히 독서하고 싶으니.”
“네, 비전하.”
에오스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고 이내 혼자 남은 침실 안.
레그리아는 이불을 뒤집어쓰곤 주머니에서 생쥐를 꺼내놓았다. 혹시라도 작은 발이며 코가 다칠까 싶어 아주 조심스럽게.
“안녕?”
넌 여기 왜 온 거니?
혹시 어떤 임무를 띠고 온 걸까?
속삭이듯 인사를 전하며 손가락을 뻗자 생쥐가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을 했다.
그녀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 보이는 모습에 괜히 실없는 웃음이 샌다. 그러던 레그리아는 이내 미소를 거두고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만에 하나… 비칸이 널 보낸 거라면, 내가 너를 알아보았노라 는 표식을 좀 전해 주었으면 해.’
서랍장에서 얇고 짧은 레이스 리본을 찾아낸 레그리아는 그걸 생쥐의 꼬리에 달아 주었다.
레이스는 가벼워서 불편하지도 않고 혹시 뛰다가 떨어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에게 증표를 받은 생쥐는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켜더니 뒷발을 탕탕 굴렀다.
뭔가를 요구하듯이.
‘아, 배가 고픈 걸까?’
그녀의 방 안에는 언제나 손쉽게 입을 달랠 수 있도록 견과류가 박힌 쿠키 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쿠키를 꺼내 잘게 쪼개어 부스러기를 만들어 주자 생쥐는 신이 난다는 듯 코를 옴씰거리며 잘도 먹었다.
그렇게 삼십 분 쯤 지났을까.
“……!”
배가 빵빵해진 생쥐가 갑작스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긴 우호적인 빛에 레그리아가 움찔한 사이 생쥐는 벽난로 쪽으로 재빠르게 달려갔다.
‘벽난로?’
탓, 탓, 타! 딸깍.
오후인지라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숯이 된 나무에 잔열이 남아 있다.
불을 완전히 끄기 위해 레그리아가 물동이를 껴안고 달려가는 그 사이, 생쥐는 솜씨 좋게도 뜨거운 곳은 피해 벽난로 안으로 쏙 들어갔다.
거의 묘기에 가까운 솜씨였다.
멍하니 바라보던 레그리아는 문득 의아해졌다.
이 벽난로 안, 어디에 생쥐가 들어갈 길이 있는 거지?
물론 벽난로는 아주, 아주 컸다.
이 넓은 침실을 따스하게 데우려면 작아서 될 일은 아니지.
당연하게도 겨울이므로 지금까지 불이 꺼진 경우가 없었고 레그리아는 몸을 숙여 안쪽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옷을 입고는 볼 수 없어.’
몸에 검댕이 묻을 것이다.
고민은 짧고 결정은 빨랐다.
레그리아는 곧바로 문을 열어젖혀 셀린을 불렀다.
“목욕물을 준비해 주렴. 숙취가 심해서 편두통이 있어. 혼자서 천천히 씻고 싶구나.”
“호, 혼자서요? 제가 시중을 들어드리지 않아도 될까요…?”
“사색을 즐기고 싶으니 방해하지 말았으면 해.”
가슴이 뛰어댄다. 하지만 평소와 같이 차분하게 대꾸한 레그리아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견습 신관들이 물을 데워 오고, 나무 욕조를 안에 들이고, 향기가 퐁퐁 나는 비누며 꽃잎 따위를 두고 갈 때까지.
두 시간 내내 조용히. 석상처럼.
부산떨던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로 그 순간.
레그리아는 스스로 옷을 벗었다.
‘제일 좋은 핑계야.’
씻느라 다 벗고 있으니 호위 기사는 이 순간만큼은 문 앞에도 있어선 안 된다.
나신 상태의 황태자비 근처에는 아무리 호위 목적이라도 남성이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직접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니 에오스 역시 함부로 문을 열진 않을 것이다.
대신 창문 아래쪽 길에 기사와 병사 숫자가 더 늘어날 뿐.
레그리아는 그놈의 법도라는 것에 처음으로 감사하며 벽난로에 물동이의 물을 살짝 부었다. 많이 티가 나진 않고, 불은 꺼질 정도로만.
그런 다음 검댕이 묻어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안쪽을 더듬자 길쭉한 구멍이 만져졌다.
아마 이게 연기를 빼내는 관일 테지.
하지만 그녀의 경우 안쪽 벽면을 건드리지 않고 중간에 손을 넣어서 괜찮은 거지, 생쥐가 여길 밟을 것 같진 않았다.
여기도 뜨겁거든.
‘하지만 만약 여기 어딘가에….’
딸깍.
더듬더듬 안쪽을 훑어내던 레그리아의 검지가 뭔가에 걸렸다.
혹시나 싶어 살짝 당기자 약한 힘으로도 충분히 내려갔다.
그래, 생쥐가 밟거나 매달려도 내려갈 만큼.
손아귀에 힘이 없는 어린아이가 당겨도 당겨질 만큼.
그리고 다음 순간.
레그리아는 희열에 차서 부르르 떨었다.
벽난로의 안쪽, 오른편 벽면이 아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아주 은근하고 은밀하게.
게다가 안쪽에선 아까 그 생쥐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없어. 레이스 리본이 없어…!’
헉.
찰나, 숨이 들어차 레그리아는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온 가슴이 웅웅거리며 뛰어 대어 추운 것도 모르겠다.
레그리아는 속에 입는 얇은 네글리제를 단단히 말아 쥐고 다른 손엔 등불을 든 채 비밀 통로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안쪽에는 통로의 문을 닫을 수 있는 레버처럼 생긴 게 또 있었기에 레그리아는 안전하게 몸을 감출 수 있었다.
어둡고, 무릎으로 기어가야 하지만 몇 번이고 이와 비슷한 일을 해 본 그녀로서는 정말이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생쥐는 기다렸다는 듯 앞을 박차고 나아갔고 레그리아는 아주 열심히 그 뒤를 따랐다.
켜켜이 쌓여 푹신해진 먼지가 그녀의 무릎을 카펫처럼 보호해 준다.
그렇게 5분. 갑자기 확 트인 장소가 나와 레그리아는 일어서서 옷을 걸칠 수 있었다.
‘여긴….’
각 방에 설치된 비밀 통로가 한데 모이는 공간이구나.
아마 생쥐가 아니었더라면 그녀 역시 신황청을 떠날 때까지 이런 곳에 있는 걸 몰랐겠지.
상식적으로 몸을 숙여 벽난로 안을 더듬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미 거기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여기로 가면 비칸이 있니?”
생쥐는 아주 좋은 길잡이였다. 그녀가 헤맨다 싶으면 찍찍, 하는 소리를 두 번 내서 위치를 알려 주었고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는지 확인을 했다.
덕분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
레그리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생쥐는 어딘가를 발로 툭툭 치며 가리켰는데, 레그리아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돌로 된 재질. 아주 작은, 눈만 보일 수 있는 창이다. 교도소의 감옥. 그 철문에 붙은 창이 보통 이렇게 생겼지.
안에 혹시 사제가 있나 싶어 살짝만 열었는데 비쳐들어야 할 횃불의 빛이 전혀 없어 레그리아는 아연해졌다.
설마 채찍질을 할 때 외에는 완전한 어둠에 가둬 두는 건가?
“드디어 왔군.”
그때였다.
탁하게 쉰 음성이 그녀의 고막을 파고든 것은.
“당신. 당신은… 비칸인가요? 초원국의 최고 전사, 맞지요?”
“그래. 당신이 알-마하카라는 것을 알고 불렀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모든 걸 포기한 자의 것은 아니었다.
긴장과 기대가 뒤섞여 손바닥 안쪽이 축축해졌다.
비칸 외에 안쪽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린 레그리아가 협소한 창을 완전히 열어젖힌 뒤, 또렷하고도 간절히 입을 열었다.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줄게요. 대신 나를 데려가요.”
제발.
에화에게 가고 싶지 않다. 에화 덕분에 비칸의 존재를 알았다지만 그럼에도 모스그라토 대공가는 또 다른 새장일 뿐.
레그리아는 자유를 원했다.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서 살 수 있는 자유를.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줘요.”
“전사는 알-마하카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다. 그게 소원이라면 들어주겠다.”
“아……!”
투박한 말투.
벨리그레엄어가 서툰지 매끄럽진 않은 발음이었다.
그러나 레그리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반가운 말이다.
비칸이 아무래도 가까이 있는 것 같아 레그리아는 등불을 들이대며 안을 살폈다. 그러자 뒤로 묶인 두 손이 보인다.
좀 더 자세히 확인하니 비칸은 목에 족쇄가 차진 채로 묶여 있는 듯했다.
마치 성난 짐승을 대하듯이.
“……손. 잡을게요. 정신 접촉을 해서 당신을 회복시키겠어요.”
알-마하카는 초원에서 신성인을 부르는 단어다.
그들의 문화가 어떠한지는 몰라도 그녀를 데리고 나가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
레그리아는 상처가 나 진물이 흐르는 거대하고 단단한 손을 움켜쥐었다.
“약속. 지켜요.”
“전사는 약속을 잊지 않는다.”
라히크가 잡아와 인간 이하의 대우를 하며 가둬 둔 남자.
라히크와 대등히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전사.
레그리아는 차분히 눈을 감고 그의 내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것이 그녀와 비칸의 정식 첫 만남이었다.
이후로 레그리아는 모든 감시를 피해 몇 번이고 비칸을 만났다.
누렇게 말라 죽었던 잔디 사이로 꽃잔디가 돋고 나무마다 부드러운 새순이 기지개를 켜는 봄 내내.
그리고 마침내 여름.
바야흐로 태양이 왕좌에 오르는 달이 도래했다.
레그리아가 준비한 탈출 계획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