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34)
  • 68화

    “뭘 마신 거지?”

    나지막하게 깔려 스산하게마저 느껴지는 어조다.

    마치 자신에게 그녀를 감독할 의무나 권리 따위가 있다는 양, 짜증스러울 정도로 우월하게 구는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라히크 특유의 향이 훅 끼쳐온다.

    샌달우드와 바닐라, 말라붙기 직전의 진흙이 풍기는 냄새 같은 것. 언제고 스스로를 우아하고 완벽하게 가꾸는 남자의 밑바닥에 감춰진 것이 그녀를 자극했다.

    “라히크. 신황청으로는 언제 돌아가?”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되었는데.”

    “뭐?”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몸을 일으키자 취기가 훅 올라온다.

    아니, 열인가.

    무엇이 되었건 레그리아는 머릿속이 뜨겁다고 느꼈다.

    “돌아가지 말라 한 적은 없다. 이 정도로 자리가 파했으면 알아서 신황청으로 복귀했었어야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건가?”

    “……하.”

    한마디를 해도 밉살스러운 사내다. 방금까지 그의 목숨을 걱정하며 에화와 다시 이야기를 해 보려 했던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저런 작자 따위, 죽든 말든 알 바 아닌데 왜 망설였을까.

    이상하게 억울하여 레그리아는 다시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었다.

    혼자 비운 와인과 샴페인이 벌써 몇 잔인지 모른다. 일부러 세지 않았다.

    제 주량이 얼마나 될진 모르겠지만 그런 제한을 걸며 멈추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래, 솔직히 라히크 같은 유해 물질의 옆에서 지내려면 취하는 것 정도로는 모자라지.

    한마디 한마디가 속을 뒤집어 놓으니까.

    “취했나?”

    하지만 짙붉은 술이 가득 찬 병을 들어 올리기도 전, 라히크가 눈매를 매섭게 굳히더니 그녀의 턱을 쥐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접촉인지라 흠칫한 레그리아는 그의 손을 힘주어 밀어냈다.

    “조금 마셨을 뿐이야. 연회잖아. 술 좀 마신 게 뭐 어떻다고.”

    “취했군.”

    단언하는 어조가 짜증난다.

    누구 때문에 평소에 입에도 대지 않는 술을 마신 건데.

    “…먼저 돌아가도 되는 거였으면 그렇게 말을 해 줬어야 할 것 아냐.”

    “주정 부리지 마라. 네가 늘어놓을 나약한 불만을 들어줄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

    “무슨…!”

    누가 보면 같이 돌아가 달라고 아양 떨며 조르기라도 한 줄 알겠다.

    아니, 설령 그랬다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면박을 줄 필요는 없지 않나.

    입술을 바르르 떨던 레그리아는 결국 혀를 깨물며 돌아섰다.

    꼭 그녀가 스스로 자기 자신의 격을 낮춘 것 같아 속상해졌다. 라히크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오갈 수 있는 존재로 만든 게… 라히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만 같아서.

    ‘취하긴, 했나 보다.’

    머릿속이 온통 꼬이고 생각마저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느슨히 손을 늘어트린 레그리아는 몸에서 힘을 뺐다.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좋지 못하니 어서 어느 침대든 눕고 싶었다.

    “쯧. 이리 손이 많이 가서야.”

    “혼자 갔으면 된다며. 왜 따라오는 건데?”

    “내일 아침 보고에 예비 황태자비께서 어디서 취해 고꾸라졌다는 내용이 있을 듯하여.”

    “넌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야?”

    꾹 참아 누르려 했는데 자꾸 울컥하게 만든다.

    신황청, 신성인, 수많은 규칙과 공부들. 알지 못하는 세상. 본 적 없는 괴상한 달의 모양…….

    그 모든 것을 버티고 버텨 여기까지 왔다. 수없이 무너지고 부서질 뻔하였지만 어떻게든 끌어모아 형체를 유지해 왔단 말이다.

    그런 그녀가 술 좀 마셨다고 추태를 부릴 것 같은가.

    아쉬웠다. 정말 고작 그 정도 이성이었다면 애저녁에 미칠 수 있었을 텐데.

    복도로 나오자 찬바람이 달아오른 뺨을 식혀 왔다.

    흥분하지 말라는 듯 툭툭 치는 바람마저 마음에 들지 않아 레그리아는 걸음을 빠르게 내디뎠다.

    그래 봤자 라히크가 몇 발만 떼도 금세 붙잡히지만.

    “신황청까지 모셔다드리지.”

    “됐어. 필요 없으니 가.”

    “기어오르는 걸 귀엽게 봐주는 건 두어 번까지다. 예비 황태자비가 취해서 황태자와 싸운다는 추문을 만들지 말라.”

    이것 봐. 제 맘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심술이지.

    매번 으름장을 놓고 협박을 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될 거라는 듯이.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라히크에게 묻지 않고 마음대로 신황청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멈춰선 레그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를 구하지 말지. 나를 살려 놓지 말지…….’

    그랬으면 오늘의 나는 너의 예정된 죽음에 기뻐하며 아무런 미련 없이 축배를 들었을 텐데.

    와인은 달지 않았고 혀에 남은 뒷맛은 씁쓸했다.

    “좋지 않은 포도로 만든 술을 가져다 놓았나 봐.”

    “드디어 헛소리를 늘어놓는군. 이러면서 무얼 혼자 가겠다고.”

    그녀의 중얼거림 끝에 라히크의 헛웃음이 묻어난다.

    그가 이끄는 대로 마차에 오른 레그리아는 깜빡 잠이 들었다.

    꿈은 뒤숭숭했다.

    * * *

    ‘라히크는 황태자비가 되라고 하고, 에화는 짝이 되어 달라 하고.’

    이튿날은 잔비가 내렸다.

    무시무시한 숙취로 인해 머리를 부여잡던 레그리아는 셀린을 데리고 뒤에는 호위 기사를 주렁주렁 단 채 산책을 나왔다.

    어딜 가든 이렇게 따라오는 게 귀찮았지만, 질색해도 이들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끈덕지게 관자놀이를 쑤셔대는 편두통처럼.

    평소보다 기분이 좀 더 나빠진 레그리아는 부러 가 본 적 없던 길로만 움직임을 틀었다.

    어차피 신황청 내에서 그녀에게 금지된 곳은 거의 없으니까.

    “여긴 어디로 향하는 길이지? 거룩의 샘으로 가는 길과는 다른 것 같은데.”

    사제와 부제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레그리아가 멈춰선 것은 나무 상자가 쌓여 길목을 막고 있는 어느 계단 앞이었다.

    워낙 상자를 많이, 아무렇게나 쌓아 두어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쉽다. 아마 그러라고 이렇게 해 두었겠지.

    하지만 레그리아는 굳이 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지하로 가는 계, 계단인데 지금…은 쓰, 쓰이지 않아요!”

    “그렇구나. 이 밑엔 무엇이 있기에?”

    “음… 사실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출입 금지라서… 한… 한 번도 안 가봤거든요.”

    열심히 설명을 해 주려 했지만 결국 도움 되는 말이 없어 셀린이 뺨을 붉혔다.

    셀린은 아마 영영 모를 테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딱 그 정도 설명이었음을.

    ‘여기 아래구나.’

    지하. 초원인. 비칸이 갇혀 있는 곳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자 먼지 쌓인 돌계단에 난 발자국이 보였다.

    ‘비칸에게 채찍질을 하던 사제들.’

    그들은 덩치가 컸다. 배가 많이 나와 팔자걸음을 힘겹게 걷는 걸 몇 번 본 적 있었다.

    레그리아는 양 옆으로 넓게 벌어져 있는 발자국을 유심히 본 뒤, 몸을 홱 돌렸다.

    “마구간은 어디에 있니?”

    “마구간이요?”

    “승마를 하고 싶어. 오늘은 비가 오니 말을 보기만 할 거야.”

    그녀의 차분한 물음에 셀린이 움찔하더니 호위 기사를 흘끔 보았다.

    그녀를 마구간으로 데려가도 될는지 묻는 듯했다.

    그게 셀린의 잘못은 아니되 엄연히 그녀를 모시는 입장으로서 라히크가 붙여둔 호위 기사의 눈치를 보다니.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경. 내가 말을 타는데 문제가 있나?”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는다.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자 셀린이 토끼 눈이 되어 움찔했다.

    투구를 쓴 호위 기사는 아무 대답이 없었는데, 레그리아가 끈질기게 노려보자 겨우 답을 내놓았다.

    “따로 명받은 부분은 없습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 참 고맙군.”

    비꼰다는 걸 알 텐데도 호위 기사는 담담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째서 이렇듯 싫은 기분을 느끼는 게 그녀 혼자인 걸까.

    다들 왜 이렇게 무덤덤한 건지.

    모두 다 지금의 그녀처럼 엉망진창이 되었으면 싶다.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지만 생각은 해볼 수 있는 거니까.

    “여기예요, 비전하!”

    잠시 뒤, 레그리아는 셀린이 안내하는 대로 마구간으로 내려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구간은 그녀가 걸음할 일 없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새벽부터 내린 비 탓에 풀과 건초의 냄새, 말에게서 나는 살아 있는 동물의 냄새 따위가 뒤엉켜 있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녀의 침실보다 이쪽이 더 마음에 든다.

    왠지 속이 시원한 기분이어서.

    “안녕, 말아.”

    레그리아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말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말이 흥분하지 않도록, 옆쪽에서 느리게.

    그녀가 말과 대화하는 동안 호위 기사는 마구간 입구 쪽을 지키고 섰고 셀린은 코를 부여잡으며 최대한 건초 더미 쪽에만 있으려고 했다.

    “말을 싫어하니?”

    “그, 그건 아닌데… 동물이랑 별로 안 친해서….”

    “그러니?”

    그냥 동물을 싫어하나 보다.

    인간보다 동물이 훨씬 나은데.

    말의 갈기를 살살 쓰다듬던 레그리아는 이대로 훌쩍 올라타 숲을 달려 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기만 하면 누구의 새장에도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에화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왜?

    이 세계뿐 아니라 그녀가 살던 곳도 다 비슷했다. 재산이 많으면 남기고 싶어 하고,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하면 다들 자식을 낳았다.

    그런데 모스그라토 공자인 에화에게 아이가 필요 없다고?

    말이 안 되지,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신성인을 들여서 후계를 볼 생각일지도 모르지.’

    에화는 소중한 사람은 기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말엔 함정이 있다.

    그럼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에화의 기준에 아껴 줄 이유가 없는 자들은 어찌 되는 건데?

    “꺄, 꺄아아악!!!”

    그때, 셀린이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지르는 바람에 레그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쥐, 쥐!!! 쥐예요!!!”

    펄쩍 뛰며 그녀에게 달려와 매달리는 모습에 하던 생각을 멈출 수밖에는 없다.

    아까부터 빗소리에 섞여 잘게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더니, 건초더미 속에 쥐가 있었구나.

    “시, 싫어어어!”

    “음, 그냥 이 아이는 가여운 생쥐일 뿐이야. 너무 그렇게 질색하지 않아도 된단다.”

    “가, 가엾다고요? 생쥐가요?!”

    역시 생쥐를 귀여워하는 건 이상한 취향인 걸까.

    레그리아는 건초더미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생쥐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엄청 크고 무섭게 생긴 시궁쥐도 아니고 귀가 크고 몸체가 작은 정말 꼬마 생쥐일 뿐인데.

    불현 듯 가여워져서 무릎을 굽혀 손을 뻗자 생쥐가 그녀의 팔에 매달려 쪼르르 타고 올랐다. 그러더니 어깨에 안착하는 게 아닌가.

    “아아…….”

    셀린은 현기증이 이는지 벽을 붙잡고 반쯤 쓰러져 버렸다. 호위 기사는 안쪽 상황을 흘긋 보더니 별 문제 없다고 판단하였는지 다시 자세를 바로 했고.

    레그리아는 생쥐의 뺨을 간질이다가 문득, 정말 우연하게. 어떤 생각을 해냈다.

    ‘초원인은 동믈을 부린다고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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