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아리툼 정복은 황실의 숙원이었다.
오래전부터 아리툼과 벨리그레엄은 대륙 최강자의 자리를 두고 다투어 왔다.
짓밟히는 것을 더는 참지 못한 초원의 야만인들이 부족을 결합하여 연합국을 만들고 양 제국에 대응하기 전까지, 그들은 휴전과 전쟁을 반복해 왔다.
어떤 시기에는 아리툼에서 벨리그레엄의 황자를 죽이고, 또 어떤 때엔 벨리그레엄에서 아리툼의 황자를 제거하면서.
증오는 그렇게 멈추지 않고 재생산되어 왔다.
허나 초원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없도록 길을 아예 막아 버린 지금,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잇속 때문이다.
적이 있어야 무기를 팔고, 군사를 키우고, 세금을 올린다.
언제든 쳐들어올 수 있는 적이 없다면 자연스레 긴장은 완화되고 그 많은 칼과 활은 창고에서 녹이 슬어 썩어가리라.
그것만큼은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기에 양국의 수뇌부는 현 상황을 유지하며 끌어가기로 암묵적인 협의를 하였다.
그 누구도 나서서 말을 꺼내진 않지만 그게 바로 상황을 유지하자는 뜻이다.
깊은 증오의 골을 뛰어넘자고 호의를 담은 사신단을 보내오며 먼저 평화 협정을 제안해 오면 모를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신단을 보낸 제국 쪽에서 자존심을 굽히고 항복 선언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
차라리 이 상황이 100년도 넘게 더 지속될지언정 먼저 저자세를 취할 자는 양쪽 중 누구도 없었다.
“정복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정보는 내가 빼내겠다. 기다리도록.”
반문을 불허하는 강한 어조였다.
라히크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삭거리는 자들을 직시하며 느긋이 눈썹을 까딱였다.
“싫다면 그대들이 가서 또 다른 최고 전사를 잡아 오면 되겠군. 생포하는 게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그리하라. 이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니 말릴 이유도 없지 않은가.”
우아한 빈정거림에 몇몇이 불편함을 담아 헛기침을 했다.
야만족이 내로라하는 최고 전사는 쉽게 그 호칭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 개의 거대한 부족에서 공통적으로 뽑아 놓은 열 명의 최고 전사.
그들은 근거지를 지키는 강력한 방패이며 날카로운 발톱과 엄니로 상대를 찢어발기는 게 가능한 자들이었다.
그건 모두 짐승을 부리는 것을 뛰어넘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날짐승, 길짐승의 시야를 함께 하는 축복에서 비롯된다.
활강하는 독수리가 보는 것을 함께 보는 자의 눈을 어찌 피할 것이요, 초원 곳곳에 존재하는 수천 마리 영양이 따라붙는 것에서 어떻게 도망을 칠 텐가.
길에 사는 것이라면 쥐 한 마리까지도 부릴 수 있는 놈들인데.
웬만한 무위가 아니고서야 일단 최고 전사와 마주칠 수도 없을뿐더러 만난다고 한들 생포해서 본국으로 귀환할 수도 없었다.
그 전에 반드시 죽는다.
긴 역사 동안 최고 전사를 사로잡은 자가 라히크 뿐이었으니 말은 다 한 것 아니겠나.
“그 열매란 것을 구해 신성인에게 효능이 있음을 입증하고 내 치세에 아리툼을 정복한다. 그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나?”
“없소이다.”
“일전에 알린 대로 이번 검투 시합 때 놈을 풀어놓을 것이다. 그대들은 사냥감 준비나 끝내 놓도록 하라.”
라히크의 엄중한 명령에 모인 이들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지껄여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불만이 있더라도 어찌할 텐가.
어둠을 틈타 살아가는 자들이 우트가르드에 고개를 떳떳이 내밀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을.
지하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야만족 전사를 빼돌리고 싶어도 방도가 없었다.
그들이 움직이면 흔적이 남는다. 그러면 황가를 이끄는 라히크와 전면전을 벌이자는 건데,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전사를 빼돌려야 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크흠. 제 눈앞에서 혈족이 서로 싸우다 죽어 가는 꼴을 보고도 정신이 멀쩡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되네요.”
“그렇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유희거리로 만들어 전사로서의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면 되겠소이다!”
오가는 대화에 더 참여하지 않기로 한 라히크는 여유로운 자세를 취하며 오동나무 상자를 끌어당겨 걸쇠를 풀었다.
끝을 조금 자른 궐련을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폐 속에 금세 매캐한 내음이 차오른다.
건강을 관리하라는 주치의의 조언에 따라 자주 피우지는 않으나 이런 자리에서는 손을 댈 만도 하다.
궐련의 지독한 향으로 공간을 채우지 않고서는 역겨워 숨을 쉴 수가 없으니.
‘야만족과 전쟁 한번 치러 본 적 없는 주제에.’
지껄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반면, 직접 움직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포로를 다루는 법에 이골이 난 자다.
토악질 나오는 방식으로 고문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확실하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고집스레 버티며 간직하고 있는 긍지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눈앞에서 깨부수는 것.
야만족은 태양을 신성시한다.
그런 이들에게 볕을 보지 못하게 하여 충분히 약해지게 만들고, 일정 강도의 체벌을 가하여 육신의 기력을 빠지게 한다.
정신에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을 몇 번 반복한 뒤, 완전히 무너지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키면 그때가 무너트릴 적기였다.
열렬한 믿음은 쉬이 부러지지 않으나 한번 꺾이면 되돌리지 못한다.
벨리그레엄인이 될 수 있도록 손을 써 주는 대가로 정보 몇 가지를 내어놓는 것과 영원히 태양을 보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 죽어가게 되는 것.
고집을 피우던 자들도 1년의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버티다 죽는 것보다 우선 숙이는 척하여 풀려난 뒤,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면 될 거라고.
자신은 변절자가 아니라고.
그러한 어쭙잖은 핑계를 주워 삼키면서.
그들이 초원으로 돌아갔는지, 어디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라히크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정보의 대가로 풀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킬 뿐.
‘근거지에 들어가 열매를 얻어내는 것과 아리툼 정벌 전쟁을 동시에 해야 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평화를 원했다.
벨리그레엄이 대륙을 정벌하여 통일함으로써 얻을 평화를.
그가 생각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단순했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점차 줄어든다.
공급을 줄일 게 아니라 수요부터 없애야 옳았다.
지금은 아리툼이라는 거대한 숙적이 눈앞에 있으므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신성인이 아이를 더 많이 낳을 수 있는 방도. 혹은 신성인의 숫자를 늘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기 딱 좋았다.
하지만 아리툼이 없다면?
이 대륙 전체를 제 손아귀에 넣기만 하면.
‘신성인은 더는 필요치 않다.’
적이 없음이니.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세울 수 있을 게 분명하였다.
아리툼과의 전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귀족 가문은 물론이고 저런 쓰레기들이 모인 단체에도 물자와 인력을 내놓기를 요구할 것이다.
전쟁 내내 조금씩 축소되고 약해진 조직들은 승전과 동시에 와해하고 말 테지.
라히크는 미시적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몰랐다. 그는 언제고 거시적으로 보기를 요구받았고 그러한 계획을 세우도록 교육받았다.
따라서 라히크는 그가 세워 둔 이 길이 가장 옳다고 믿었다.
본디 숲을 밀려거든 불길을 놓아 모조리 태워 버리는 쪽이 나무를 한 그루씩 베어나가는 것보다 빠른 법이지 않던가.
‘그래. 그 긴 정리가 끝나고 나면. 그때쯤엔…….’
아이는 역시 셋쯤이 좋겠지.
레그리아를 닮아 뚱한 표정을 지을 게 분명한 딸과 아들이 각기 하나씩. 그 외엔 또 레그리아를 닮은 자식이 성별 관계없이 하나 더 태어나길 원한다.
그를 닮을 필요는 없었다.
그와 비슷해 봤자 끔찍하기만 할 테니.
그렇게 가족이라는 것을 이루면 그때는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러한 미래가 행복을 의미한다면… 라히크는 그 전에 반드시 아리툼을 지도에서 지우고 말 터였다.
겨우 손에 넣은 것을 빼앗아갈 그 어떤 위험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결말을 위해 일부의 희생이 동반되더라도.
결국 마지막에 돌아보면 그의 모든 선택이 옳았을 테니.
* * *
에화의 침실에서 몰래 빠져나온 레그리아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기가 너무 싫어 정처 없이 정원을 떠돌았다.
그러다 수풀 뒤쪽에서 들려오는 비음에 당황하며 쉴 곳을 찾아 도망가기를 여러 차례.
그녀를 찾고 있던 호위 기사들과 맞닥뜨렸을 땐 차라리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반쯤 연행되어 연회장으로 돌아간 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려하게 타오르던 불꽃도 사그라지고 플로어에서 춤을 추는 사람도 거의 없다.
복작거리던 사람들이 죄 집으로 돌아간 건 아닐 것 같은데 어디에서 누구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초상화처럼 우두커니 홀로 앉아 와인을 마시던 레그리아는 새카만 병에 반사되는 제 모습이 참 처량하다 느꼈다.
호기심으로, 흥밋거리로, 안줏거리 삼아 그녀에게 다가오던 사람들이 사라지니 남은 건 고독뿐.
익숙하다 여긴 감정인데 오늘따라 괜히 싫은 건 에화에게 들은 고백 때문일까.
에화의 메시지는 단순명료했다.
모스그라토 대공가의 위세를 업는 것만이 그녀의 살길이다.
사실 에화와 짝을 맺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한번 맺은 짝은 그 관계를 끊을 수 없으니 라히크도 더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지.
화를 내긴 하겠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었다. 이미 끝난 게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에화가 제게 주어진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태자가 되고자 한다면 라히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이려는… 걸까.’
역사적으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상대의 수장을 살려두는 일은 없다. 너무도 당연한 결말.
모스그라토가 승리를 거두면 라히크는 죽는다.
하지만 레그리아로서는 목숨을 빚진 이상 라히크가 죽을지도 모르는 선택은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인간 말종이고, 자신이 경멸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니까.
레그리아는 자신의 영혼을 제 손으로 부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에화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눠 봐야겠어.’
레그리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