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34)
  • 66화

    말하지 않은 건 거짓말이 아니다. 그냥 입을 다문 것에 불과하니까.

    만약 레그리아가 물어봤더라면 곧이곧대로 대답했으리라.

    하지만 안 물어봤잖아?

    ‘어쩔 수 없지. 안 될 것 같으면 더는 그 징징거림을 받아 줄 필요도 없고.’

    지금까지 에화가 지젤 로에르멜에게 접근한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로에르멜 저택에 심어둔 퀴제의 단원에게서 극비 보고가 날아왔다.

    지젤 로에르멜이 신성계 시절 레그리아 로에르멜의 친동생이었다!

    지젤 로에르멜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제 정체를 밝혀 버렸고, 그 덕에 소중한 정보가 에화의 손에도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에화가 뭘 했겠는가.

    당연히 파쥬 현상이 일어날 수 있도록 유도를 했지.

    지젤이 그러잖아도 가녀린 레그리아의 어깨를 팍 치고 지나갔을 땐 정말 공짜로 죽여 버릴 뻔했지만 잘 인내했다.

    파쥬 현상이 10분 뒤, 혹은 30분 뒤에 일어날 수도 있는 거니까 섣불리 손을 대선 안 됐다.

    레그리아의 몸에 들어가게 되면 지젤이 난동을 피울 것 같아 가둬둘 작정으로 그의 침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쥬는 일어나지 않았다.

    레그리아는 여전히 레그리아일 뿐.

    약간 아쉬웠어도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둘만의 시간을 잠깐이나마 가졌잖아.

    ‘음, 역시 희소한 경우의 수에 매달리는 건 나답지 않아. 깔끔하게 포기하자.’

    히죽 웃은 에화는 발걸음도 가볍게 회합장으로 향했다.

    손님들이 들락거리는 게 금지된 이 복도 끝에는 거대한 그림이 있다.

    검은 유니콘이 앞발을 사납게 치켜들고 있는 장면이 담긴 액자의 왼편엔 자세히 봐야만 보이는 태엽이 몇 개 있었다.

    그 태엽들을 순서에 맞춰 앞으로, 뒤로 감으면 액자가 옆으로 스르르 밀려나며 새카만 문을 드러낸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에화의 뒤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어두워진 통로에는 빛을 발하는 야광 도료가 발려 길을 안내했다.

    “모르말라 가루는 재임신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 아니요?”

    “그렇게 믿어졌기에 거액을 주고 구매해 왔소. 하지만 지금까지도 다시 임신할 기미는 보이지를 않아.”

    회합장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소름 끼치게 낮았다.

    이 안에 자리할 수 있는 건 한 조직의 수장급뿐.

    정재계는 물론이고 암흑세계를 주름잡는 큰 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장 상석에 앉은 것은 황태자, 라히크 바라키엘 벨리그레엄.

    그의 친애하는 이복형.

    ‘아, 오늘 밤도 형한테 돌아가는 꼴을 두 눈 뜨고 보고 있어야 한다니. 끔찍해.’

    마른세수를 하며 한탄하던 에화는 끔찍한 슬픔을 삼켜냈다. 그런 다음, 그는 치솟는 살의를 누르며 언제나와 같이 싱글거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 자리에선 약점을 드러내선 안 된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감춰야만 하는 광대들의 놀음 자리.

    이 안의 누구도 그가 레그리아에게 반했음을 알아차려선 안 된다. 그러니 첫사랑에 대한 두근거림은 잠시 마음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자.

    “듣자 하니 아직도 초원인들의 근거지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끼익.

    어차피 에화가 들어왔음을 눈치채지 못한 자는 누구도 없다. 그러니 갑작스레 던져진 한마디에 놀란 자 역시 없었다.

    “그럴 바에 그 최고 전사, 퀴제에 넘기지 그래요? 뼈까지 발라 버리게.”

    입꼬리가 벌어지며 히죽, 웃음이 튄다.

    광기 어린 분홍색 눈동자에 담긴 건 순수하기까지 한 말간 진심 하나뿐.

    “언제까지 질질 끌지 모르겠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휘적휘적 걸어 들어와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무례에 대해서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다.

    흥미와 즐거움, 경계가 뒤섞인 눈으로 응시하기만 할 뿐.

    그는 그래도 되었다.

    이 회합 자리를 만든 것 역시 그였으니까.

    “자꾸 이렇게 시간을 끌면 어떡해, 형. 꼭 형이 유약해서 그런 것 같잖아.”

    “건방진 꼴이구나. 왜 늦었지?”

    “아, 내가 내 집에서 좀 늦게 오겠다는데. 너무 화내지 마, 형. 속 좁아 보여.”

    어린 나이에 수십 개의 암살단을 모아 하나로 통합하고 단원을 수천 명까지 불린 이. 암살이라는 은밀하고도 더러운 직업을 양지로 끌어올려 끝내 빛을 보게 만든 남자.

    그게 바로 에화 시누엘 모스그라토다.

    시종 방만하고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그런 겉모습만을 믿는 단순한 성격이라면 이 회합장에 앉아 있을 자격도 없지.

    의자를 까딱거리며 허리를 늘어트린 에화는 이내 테이블에 구둣발을 올렸다.

    칩을 던지기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카지노 테이블의 우단이 새까만 가죽 굽 아래 짓이겨진다.

    꼭 지금 그의 기분처럼 엉망이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 볼까요? 오늘 우리가 다 같이 모인 이유가 있잖아.”

    이번 회합의 주제는 초원의 야만족이다.

    에화는 그들을 딱히 야만족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리 무시하지도 않았다.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서 태어나서 그렇게 살겠다는데 뭐라 할 것인가.

    단지 ‘장사’를 하는데 놈들이 방해가 되니 치우고 싶을 뿐.

    “그자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그 근거지에서 자라는 신비의 열매 말인데… 그걸 섭취하면, 알죠?”

    “그게 유통되면 얼마 정도의 값어치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구먼.”

    에화의 속삭임을 받아친 건 허연 수염을 바닥까지 기른 노인이었다. 지팡이를 짚은 채 허허 웃는 노인은 겉으로 보기엔 온후하였으나 실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보 길드의 수장이다.

    이따금 암살단의 힘을 빌려 이런저런 흔적을 지우기도 하는 자.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뿐 명령 하나로 죽여 낸 목숨이 일만이 넘을 터다.

    이따금 필요하다면 마을 하나를 궤멸시키는 것도 서슴지 않은 자이니.

    “홀홀홀. 그 값은 지금부터 우리가 정해야겠지요.”

    이번엔 백발을 틀어 올린 노파의 말이었다.

    이 중에서 에화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에화가 퀴제를 만들기 전까지는 이 나라 최고의 암살단을 가진 피의 마녀라 불려왔었으니까.

    지금은 퇴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고.

    “열매를 얻기까지 난관이 크군. 초원인들이 버티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사실 숨겨져 있는 근거지를 외부인이 찾을 길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요.”

    상황을 정리하듯 입을 뗀 건 짙붉은 머리칼을 가진 공작이었다.

    가문 내외부의 그 수많은 일들을 동시에 처리하면서 스트레스 하나 받지 않는지 흰 머리 한 올 없다.

    본디 로에르멜 가문은 이 회합에 올 자격이 없었다.

    헌데 지금의 공작으로 바뀐 뒤,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로에르멜은 회합 참여권을 얻어냈다.

    그것만 해도 현 공작, 아나코샤 로에르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가 증명되었다.

    “끄응. 우리 쪽에서 보낸 녀석들은 숫자가 얼마나 되던 하나도 돌아오질 못했소.”

    “스무 명이었던가.”

    “그렇소. 쯔쯧.”

    노인의 말에 공작이 느슨히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골치가 아프다는 뜻이다.

    벨리그레엄이 초원 연합국을 공격하는 이유는 아리툼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초원 연합국은 자신들의 국토를 지키기 위해 벨리그레엄을 혼신의 힘을 다해 막고 있다.

    허나 이건 대외적으로 알려진 잘 포장된 이유일 뿐.

    사실 벨리그레엄을 좌지우지하는 이 회합에선 오래전부터 어떤 열매를 찾고 있었다.

    효능이 비밀에 부쳐진 그 열매는, 크게는 지금 벨리그레엄에 꼭 필요한 것이었고 사사롭게는 각자의 세력이 더욱 커질 수 있는 기회였다.

    결코 새어 나가선 안 될 극비 중의 극비이기에 이 회합장에 앉은 자들은 피로 된 비밀 유지 서약서를 썼다.

    앞으로 어디에서도 그 열매의 진짜 효능에 대해서는 혀를 놀리지 못하도록 고대의 저주가 깃든 서약서였다.

    “지금까지 신성인들은 한 번 쓰고 나면 가치가 없어졌지. 쉽사리 폐기하기도 어렵고 말이야.”

    노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쿵 찧었다.

    “그 열매만 있으면 아리툼 따위, 아무것도 아닐 테요!”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사이에 욕심이 들어차 꿀렁거린다.

    “황태자 전하께오서 그 최고 전사란 야만인에게 정보를 좀 긁어내 주시면 좋으련만.”

    “그렇소이다. 고귀한 손을 더럽히기 어려우시면 저희에게 넘겨 주시지요. 이쪽은 본디 천해서 어렵지 않습니다.”

    오가는 대화를 모두 듣기만 하던 라히크의 입매가 서서히 비틀렸다.

    ‘노괴들.’

    시체처럼 식은 두 눈은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 앉은 자들을 낙뢰로 태워 죽이고 싶다는 욕구를 감추지 않았다.

    어차피 눈과 입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건 여기에 앉은 자들 모두가 그러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기어코 파고들어 장기 속에 똬리를 틀 자들 아닌가.

    지금이야 신비의 열매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손을 잡는 듯 보이지만 단독으로 그걸 얻을 수 있는 길이 생기면 그 즉시 상대를 배신하고 돌아설 것들이기도 하다.

    한데 어찌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보고를 넘겨 주겠는가.

    심지어 그자, 지하의 야만인.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지독한 자는 자신이 손수 나서 잡아 온 포로일진대.

    ‘편안한 곳에 앉아 얻기만 하려는 것들의 악취란.’

    대답 없던 라히크의 주변으로 파지직, 포악한 벼락이 튀었다.

    미소 비슷한 것을 내보이던 그가 테이블 위를 짚은 순간이었다.

    쾅!

    굉음과 함께 라히크의 손이 닿은 곳부터 낙뢰가 퍼져 테이블을 산산조각 냈다.

    “으악! 아, 형!”

    화들짝 놀란 에화가 버둥거리다 뒤로 넘어져 한 바퀴 굴렀다. 테이블에 기대어 있던 몇몇 쓰레기들 역시 놀라 몸을 사린다.

    그에 반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노괴들도 있는 법.

    라히크는 그들 모두를 느른히 훑으며 입을 열었다.

    “아리툼 정복이 최우선임을 이 내가 잊었을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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