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34)
  • 65화

    이 나라를 가르는 세 개의 세력에 대해서라면 레그리아도 이제 어느 정도는 알았다.

    처음 들었을 때야 어려웠지만 그냥 보수당, 진보당. 중립파는 그 중간의 어디라고 여기니 그렇게까지 복잡하진 않았다.

    굳이 이 나라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황태자파가 보수, 모스그라토 대공파가 진보겠지.

    “나를 훔치면 넌 대역 죄인이 될 거야. 황태자파에서 널 역적으로 몰아갈 테니 내전이 일어나고야 말겠지. 라히크는 제 물건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을 자가 아니기도 하고.”

    “계속 듣고 싶은데, 그 물건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싫네. 누나가 왜 물건이야.”

    “…하지만 내가 내 발로 라히크를 버리고 달아나 모스그라토 대공가에 보호를 요청하면 정당한 명분이 생겨. 가엾게도 학대를 당한 신성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분.”

    왜냐하면 모스그라토 대공은 신성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니까.

    그게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레그리아의 말이 끝나자 에화가 좁혀진 미간을 문지르다가 이내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유들거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역시 영리해. 형한테는 아까운 사람이야, 누나는.”

    분홍색 눈동자가 번득인다.

    늘 싱글거리며 웃기만 해서 남자보다는 말 그대로 연하로만 느껴졌던 에화인데 두 눈이 차갑게 식자 움찔할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우리 쪽 사람들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둘째 아들과 예비 황태자비가 짝을 맺었다고 공표하고 싶어 해.”

    속삭이는 음성이 달짝지근하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서늘함을 레그리아는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한 세대에 황태자비로 내정된 여인은 단 한 명뿐.”

    “…….”

    “누가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는가에 따라… 황태자가 달라질 수도 있는 거니까.”

    이제 에화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언제나 반쯤 걸치고 있던 장난기도 지워진 그는 관록 깊은 기사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뛰어난 지략으로 군대를 이끌어가는 책략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나 그 무엇보다 더욱 강렬하게 와 닿는 건, 에화 역시 황제의 핏줄이라는 것.

    라히크와 궤가 다를 뿐 에화 또한 육식 동물이다.

    그녀의 두 눈을 진지하게 응시하던 에화가 서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도 잡은 손을 놓진 않는다.

    문득 레그리아는 에화의 손이 크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를 완전히 감싸줄 수 있을 것처럼.

    이윽고 에화가 그녀의 손등에 열기 어린 입술을 눌러 붙였다 뗐다.

    “내 짝이 되어 줘, 레그리아.”

    “……!”

    “그런다고 약속하면… 신황청에서 탈출하기에 가장 좋은 날을 알려 줄게.”

    손이 부드럽게 당겨진다.

    에화는 그녀의 손끝을 제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댔다.

    쿵, 쿵.

    갈비뼈 아래, 시퍼렇게 존재하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진다.

    입은, 눈은, 목소리는 거짓을 말할 수 있어도 가슴은 그렇지 않다. 전해져 오는 열기 역시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에화는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하긴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랬다.

    길이 필요한 그녀에게 어디로 가라며 부추겼고 갈 길을 잃어버렸을 땐 이정표를 만들어서 보여 줬다.

    항상 그녀를 돕고자 했지.

    어쩌면 에화야 말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

    잡힌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그의 떨림이 그녀에게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아 온 가슴이 안개꽃으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흔들림 없는 분홍색 두 눈이 꼭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는 것만 같아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언제나 좋은 것만 주겠노라 약속하는 것처럼 느껴져.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겪기 전의 자신이라면 무턱대고 신뢰했을 터다. 에화가 보여 주는 것들을 의심하지 않으려 했겠지.

    그만큼 그녀는 순진했고 껍질에 단단히 싸인 채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녀의 세상엔 이미 여러 차례 금이 가 버렸다.

    “나는 약속할 수 없어.”

    레그리아는 힘겹게 거절을 뱉었다.

    “하지만… 네가 약속했잖아. 내가 탑에 다녀오면, 계약 조건은 내게 유리하게 해 준다고.”

    “음, 내가 그랬죠. 맞아요.”

    “그러니까 말해 줘. 신황청에서 탈출하기에 가장 좋은 날을.”

    함부로 믿지 않겠다. 에화의 제안이 진짜 달콤한 게 맞는지, 그 향기로 나비를 꾀어 잡아먹으려 하는 건지는 모르는 일이잖은가.

    “왜 형이 비칸을 죽이지 않는지 알아요?”

    무릎을 펴고 일어선 에화는 다시 쾌활한 말투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거절에 대한 부담을 느끼지 말라는 것 같아 고마워지던 찰나.

    “매해 여름이면 우트가르드의 숲에서 검투 시합이 열려요. 초원 연합국에서 잡아 온 포로를 숲에 풀어 놓고 형이 기르는 맹수들과 싸워 살아남게 하지.”

    “맹수?”

    하지만 초원 연합국 사람들은 맹수를 부릴 수 있지 않나.

    그게 싸움이 되는 걸까.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건 일부만 가지고 있는 능력이야. 포로가 전부 신성인 어머니를 둔 건 아니니까.”

    “……아, 그 말은.”

    “그날을 노려요. 그자는 초원 연합국이 자랑하는 최고 전사야. 연합국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자지.”

    왜 이렇게 불안할까.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그 ‘검투 시합’이라는 게 어째서 이다지도 불쾌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이걸 물어보면 분명히 라히크에게 또 실망하겠지.

    더는 기대할 것도 없는데도 그라는 사람 자체에 실망하고 또 실망해서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으리라.

    그럼에도 레그리아는 입을 벌릴 수밖에는 없었다.

    제 발등에 떨어지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 불덩이를 외면할 수 없어서.

    “…그 검투 시합이라는 거. 혹시…… 경기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미끄덩거리는 미역을 한꺼번에 삼켜 목구멍이 틀어 막힌 것 같다.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은 너무나 순수한 악(惡).

    설마 라히크도 사람인데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거라는 그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언제나 그 설마를 깨왔던 라히크의 행보가 서로 상충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검투 시합은 말이 검투 시합이지, 포로 사냥과 다름없어. 묶인 포로들의 다리만 풀어놓고 달리게 하지. 그 뒤를 맹수들이 쫓는 거야.”

    “……하.”

    “그리고 손님들은 말을 타고 그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포로의 꼴을 구경해. 형의 맹수들은 훈련이 되어 있어서 결코 말을 물지 않거든.”

    애석하게도.

    그렇게 중얼거린 에화는 끝내 충격을 받고야 만 그녀의 어깨를 쥐며 단호하게 말을 마쳤다.

    “그자를 이용해서 숲을 탈출해. 그래서 내게로 와요.”

    레그리아는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 * *

    이윽고 에화는 무거운 걸음으로 복도를 거닐었다.

    축복의 개화 이후 어디든 가 본 곳이라면 제멋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그였기에 이렇듯 성내를 하릴없이 걷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내 짝이 되어 줘? 아, 너무 멋없는 대사였지.’

    머리가 까마귀집이 되도록 아무렇게나 쥐어뜯은 에화는 차가운 벽에 뺨을 대곤 바보처럼 우뚝 서 버렸다.

    아까 레그리아가 짓던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당황, 당혹감, 약간의 의심. 그런 것들이 연녹색 눈동자 속에서 휘몰아쳤다.

    ‘이 멍청아. 좀 더 시간을 두고 다가갔어야지.’

    쿵쿵.

    기어이 벽에 대고 이마를 박으며 에화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라히크와 레그리아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건 숨쉬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라히크는 사서 나쁜 짓을 하는 해적 같은 놈이었고 올바르고 깨끗한 레그리아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니 거짓말을 늘어놓을 것도 없이 그냥 사실만 말해도 그녀가 형에게 마음을 줄 일은 없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뭐가 그리 조급해서는.’

    완전 풋내기처럼 고백했다.

    그러잖아도 연하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걱정인데 이러면 연애 한 번 못 해본 사람 같잖아.

    ‘어, 근데 맞는데?’

    연애 못 해본 거.

    자기 비하를 하던 에화는 번뜩 고개를 치켜들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다시 잘 생각해 보니 풋내기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 많아야 능숙하든가 말든가 하지?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대부님, 대모님의 관계를 보며 자랐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첫눈에 반해서 만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그 첫눈에 반한 사람과 평생 알콩달콩 사랑하며 살아가는 거라고 믿어왔고.

    지금까지 그의 마음을 훔친 사람이 없었으니 가볍게 사귀어 본 여자가 있을 리도 없다.

    에화는 자신이 이 나이까지 동정이라는 점을 꽤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능글맞게 레그리아를 유혹하지 못한다는 점을 더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남자들이 다 창관을 들락거린다 한들 그는 정절과 지조를 지켰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 없이 둘만 살면 딱 좋겠다는 게 에화의 꿈이자 목표였으니까.

    ‘아, 그런데 만약 파쥬가 일어났으면 그대로 납치해 버려도 되는 거였는데. 그건 좀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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