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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134)
  • 64화

    귀 끝이 찌릿하다. 한순간 심장이 덜컹해서 레그리아는 부러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여기는 어디야?”

    “내 방.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명령을 내려 뒀어.”

    에화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더니 이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고는 자세를 바로 하며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소년처럼 씩 웃으면서.

    “에이, 이러면 두근거리기라도 할 줄 알았더니. 실패네요.”

    “이렇게 아무한테나… 그러면 못 써.”

    “그럼 혼내 줄래? 누나가 혼내 주면 얌전히 벌 받을 수 있는데.”

    싱글거리며 건네는 말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는 거짓인지 모를 일이다.

    라히크는 함께 있기만 해도 긴장이 되는데 에화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장난스러운 말투와 몸짓으로 상대의 긴장을 풀어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레그리아는 온통 와인 색으로 꾸며진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의아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로 이동한 거야?”

    “내가 가진 고유 축복이 늪이거든.”

    고유 축복이란 신성 기사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힘이다.

    교육관에게 라히크는 낙뢰, 표드르는 얼음 창이라고 배웠다. 어떤 신성 기사는 용암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칼날과도 같은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했었다.

    신기한 것은 이따금 초원 연합국에서도 신성 기사가 태어나는데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짐승과 소통하고 짐승을 부리는 능력’을 고유 축복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늪이라는 능력은 들어본 적이 없어.’

    어쩌면 라히크가 붙여 준 교육관이다 보니 일부러 에화의 능력에 대해선 빼고 설명했을지도.

    “나는 내 발밑을 늪으로 만들어서 다른 공간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어. 이렇게.”

    에화가 보란 듯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발밑이 일렁이더니 쑤욱 내려가 사라졌는데, 다시 나타난 곳은 침실의 모서리 부분이었다.

    “신기하지?”

    “신기해.”

    그리고 너무나 부럽기도 하다. 그녀에게도 저런 능력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신성 기사만 능력을 갖고 신성인은 그렇지 못한지. 다시 생각해도 불공평하였다.

    “엄청 불공평하단 표정인데.”

    “…티가 나?”

    “누나는 다 티가 나요.”

    키득거리던 에화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제 손을 붙이고 꼭 쥐었다. 레그리아는 그가 이끄는 대로 일어섰는데 에화가 마치 춤이라도 추자는 것처럼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하지만 우트가르드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어. 신성 기사들은 축복을 발현하면 신황청에 가서 맹세를 하거든. 알지?”

    “…배웠어. 불가침의 맹세.”

    신성 기사는 신황청이 있는 우트가르드 땅 내에서는 고유 축복을 사용할 수 없다.

    만약 금제를 깨고 사용한다면 수명이 많이 깎이게 된다.

    그건 수많은 신성 기사들이 신황청 내에서 머물게 될 때 큰 싸움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강한 이능을 가진 이들이 서로 맞붙으면 건물 하나쯤 무너트리는 것도 일도 아닐 테니 그럴 만은 하다.

    “누나, 이거 봐라?”

    “응?”

    “분명 아무것도 없던 손에서… 쨘.”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목덜미 쪽을 간질이던 에화가 손가락을 튕기자 갑자기 눈앞에 장미꽃이 나타났다.

    가벼운 마술에 한순간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무리 딱딱하게 굴려고 해도 에화는 반드시 틈을 파고들어 그녀를 웃게 만들고야 말았다.

    “고마워.”

    “별말씀을. 아까 보니까 표정이 엄청 진지하던데. 천사와 안 좋은 이야기라도 나눴어?”

    장미의 향을 맡던 레그리아는 라히크가 자신을 찾아낼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예상해 보았다.

    일전의 상황을 예상해 보자면 그는 그녀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끝낸 뒤에 움직인다.

    회합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직접 찾으러 오는 시간도 늦어질 터.

    속으로 계산을 해 보던 레그리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루손 지방 이야기를 했어. 거기에 가 보고 싶어.”

    “아, 전설의 동굴에?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그거였구나.”

    “혹시 데려다줄 수… 있어?”

    어렵사리 쥐어짜 낸 부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소용없었다고 하지만 가 보지 않고서는 미련을 떨칠 수 없을 듯해서.

    그러나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에화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냉정하게 마저 느껴지는 거절에 움찔하자 에화가 부드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면서.

    “소용없어. 그 전설, 가짜거든.”

    “……가짜?”

    “응. 모스그라토 가문에서 만들어낸 거니까 믿지 마요. 하도 신성인들이 밥 먹듯이 자살하기에 만든 전설일 뿐이야.”

    쿵.

    희망이 내려앉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건 꼭 힘겹게 쌓아 올린 돌탑이 우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리하여 온 마음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려댈 수밖에 없었다.

    “거짓…이라고.”

    “미안, 충격받았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어떻게 에화를 원망할까.

    에화가 한 건 언제나 그렇듯 듣기 싫고 보기 싫은 진실을 알려 주고 직면하게 만든 것뿐인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끝이 떨려와 레그리아는 장미를 꾹 움켜쥐었다.

    미리 가시를 다 잘라 두기라도 했는지 줄기가 매끈했다.

    차라리 손바닥을 찌르는 통증이라도 있었으면 마음의 통증이 조금은 나아졌을 텐데.

    관자놀이가 욱신거린다. 호흡이 가빠오고 눈앞이 흐렸다.

    이제 와서 뭘 또 충격받을 게 남았다고.

    에화는 그런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 주며 상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안쓰럽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긴 싫어. 어렸을 때 누가 나를 기만한 적이 있거든. 그때 받은 상처가 너무 컸는지 소중한 사람을 기만하지 않기로 스스로 맹세했어.”

    “정말로, 진짜로… 아무도 돌아간 적이 없어? 신성인이 자기가 살던 세계로 갔다는, 그런 소문이라도 없는 거야?”

    “응, 없어요. 이 세계에 강림한 뒤, 이 세계의 물과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면 모를까. 지금은 이미 영혼이 몸에 안착한 지 오래야. 영혼만 돌아가는 방법도, 이 몸을 가지고 돌아가는 방법도 없어.”

    믿고 싶지 않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매도하고 싶었다.

    아아, 또 이렇게 하나의 기회가 꺾이는구나.

    선택지가 생겨났다고 생각하면 금세 그 위에 줄이 쳐진다. 또 다른 선택지를 발견하였다고 좋아하면 부서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치 얌전히 황태자비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듯이.

    “안아도 돼요?”

    침묵이 늪처럼 그녀를 삼킨다.

    레그리아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려다가, 왈칵 차오르는 실망감에 눈꼬리를 늘어트리다가,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화의 말도 무턱대고 믿을 순 없다.

    직접 가 보기 전엔 모른다지만… 그러기엔 에화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봄 햇살처럼 찬란하여서.

    얼어붙은 그녀를 감싸 안으며 위로하는 열기가 하도 따뜻해서, 자연스레 깨닫고 말았다.

    아, 거짓말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누나는 정말 부드러워. 이렇게 꼭 끌어안고 아주아주 집중해야만 들리는 숨소리도 좋고, 울지 않으려고 혀를 깨무는 고집도 좋아.”

    “…….”

    “그래서 말해 주는 거야.”

    힘없이 늘어진 레그리아를 끌어안고 에화가 등을 토닥였다.

    “누나가 정말 황태자비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 신황청을 빠져나와야 해요.”

    어린아이를 가만가만 달래는 것 같은 속삭임과 함께 박하 향이 은은하게 풍겨온다.

    일전에는 박하 향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시 만나 이토록 가까이 있으니 솔향도 나는구나. 향수는 아닌 것 같은데 신기하다.

    어디를 다니기에 이런 향을 묻히고 오는 걸까.

    “그렇게 누나 스스로의 값을 올려야 해. 미친 통제광 황태자의 손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할 수 있겠어요?”

    “그건… 네가 제시하는 거니? 아니면, 모스그라토 대공이 제시하는 조건이야?”

    “아, 들켰네.”

    “대공 쪽이구나.”

    “맞아. 이건 모스그라토 대공가에서 예비 황태자비 전하께 정식으로 제안하는 거래예요. 신황청을 스스로 빠져나올 것. 그러면 우리는 누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줄 거야.”

    라히크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에화가 의뭉스레 눙친 뒷말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레그리아는 에화의 가슴을 밀어내며 다리에 힘을 줘 똑바로 섰다. 그러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짤막한 호흡을 뱉어내며 물었다.

    “탑에 다녀온 걸론 모자라?”

    “그건 거래할 자격을 보는 거였지.”

    “…그렇구나.”

    모스그라토 대공은 어떤 사람일까.

    현 황제의 동생. 그 자신은 아이를 낳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 사랑하는 짝이 아이를 낳으면 일찍 죽게 되기 때문일까.

    대신 대공은 제 형의 서자를 입양해 친아들처럼 진심을 다해 키워냈다.

    에화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얼굴에 그늘 한 점 져 있지 않으니까.

    무릇 사랑받으며 큰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천진난만하다.

    레그리아는 그걸 제 동생을 보며 배웠다.

    “사실 난 당장 누나를 훔쳐서 달아나고 싶긴 한데… 그러면 즉시 내전이 일어날 거라 그건 안 되겠고.”

    그녀가 직접 빠져나와야 명분이 선다.

    황태자비가 될 사람을 훔친 게 아니라, 그녀가 제 발로 달아나 모스그라토에 안겨야만 보호하는 것이 정당해진다는 뜻이다.

    입술을 질겅이던 레그리아는 머릿속을 스치는 어떤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설마.

    “모스그라토 대공은, 네가 황태자가 되기를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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