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표드르가 연결해 준 신성인이다!
그걸 깨닫자마자 속에서 반가움이 왈칵 차올랐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한국어를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테라스의 끄트머리. 난간에 위태하게 기대어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온다.
군인처럼 바싹 깎아 놓은 은빛 머리칼. 한쪽은 아예 밀어 버렸는지 스크래치까지 내놓은 헤어 스타일이 상당히 급진적이다.
치렁치렁한 드레스 대신 각을 맞춘 제복 바지 차림이었고 상의는 이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딱 달라붙는 민소매 티셔츠였다.
거기에 재킷을 무심하니 툭 걸치고 있는 모습에서 감출 수 없는 자유로움이 묻어났다.
웬만한 남자들의 팔뚝만큼이나 울룩불룩한 근육으로 채워져 있는 두 팔이 부럽고 놀라워 벌어지는 입을 감출 수가 없었는데, 그런 와중.
‘천사’가 물고 있던 궐련을 빼내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아가, 살기 힘들지?”
……꼭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진짜 천사처럼.
* * *
천사의 이름은 씨시.
평민에게 강림했고 이 세계에 온 지는 어느덧 15년 차로, 천사들 중엔 가장 고령이라고 했다.
“내가 더 오래 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신기해요. 그럼… 그러면요, 씨시 아주머니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지 기억하세요?”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미치겠다. 이 만남이 두 번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기에 지금 모든 궁금한 걸 풀어야만 했다.
고맙게도 씨시 아주머니는 아주 친화적인 분이었고 그래서 말주변 없는 그녀라도 편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있었다.
“확실한 건 아닌데… 우리 쪽에 들어오는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거의 비슷하더라고. 종합해 본 결과 우리는 이렇게 가정하고 있어.”
“어떻게요?”
“유성우.”
씨시 아주머니가 궐련 끝을 씹으며 툭 하고 내뱉었다.
“내 마지막 기억이 남편하고 딸 데리고 사자자리 유성우 보러 간 거였거든.”
“……아.”
“잠깐 차에 뭐 좀 가지러 간다고 남편더러 애 잘 보고 있으라고 한 게 마지막 기억이야.”
세상에.
그녀에겐 소중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보고 싶거나 그리운 사람조차 없다.
하지만 씨시 아주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둘이나 남겨 놓고 이곳에 끌려온 것이다.
그런데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라고 하니 끝까지 거부하며 버틸 만도 했다.
“나더러 애를 낳으라느니 어쩌라느니 하면서 웬 솜털 난 어린놈을 가져다 놓는데, 기가 탁 막히지 뭐야? 그대로 주먹 날려서 턱을 돌려줬지. 내가 이래 봬도 태권도 국가 대표였거든.”
“멋져요.”
“아, 죽일 테면 죽여 봐라. 배짱 두둑하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만, 어디로 데려가더라고? 그게 신성 기사단의 천사관인지 나발인지 하는 곳이라는 건 한참 뒤에야 알았어. 글도 언어도 내 위에 있던 선배들이 알려 줬지.”
지금이야 피식 웃고 넘기지만 그땐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레그리아는 라히크에게 이 목이 졸렸던 일을 떠올렸다.
자국은 이제 없지만 그날의 기억은 마음에 피멍처럼 맺혀 잊히지가 않았다.
“운이 좋았어. 원래는 애를 낳으면 죽는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만 천사관에 들어가는 건데 그때 마침 몇 명이 죽으면서 공석이 생겼었거든.”
“그렇군요. 그럼… 음. 유성에 맞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영혼만 따로 이곳에 오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다들 그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야. 나 외에도 유성을 보러 갔다고 하는 외국인들이 몇 더 있었기도 하고.”
레그리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젠 희미해져 버린 기억이라 다시 떠올리는 게 어렵지만, 밤에 유성이 한두 개쯤은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즉, 그녀가 집을 나간 뒤에 저녁이 되자 동생이 쫓아 나왔다는 소리였다.
같이 이 세계에 떨어진 걸 보면 말이다.
“돌아갈 길은… 못 찾으신 거군요.”
“엉. 무슨 전설의 동굴이니 어쩌니 하는 게 있긴 한데 가 봤지만 우린 안 됐어. 못 돌아가더라. 하긴, 그 전설이 거짓일 지도 모르고… 아니면… 저쪽에 있어야 할 몸뚱이가 죽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씨시 아주머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걸 보던 레그리아는 저도 모르게 아주머니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방금 그건 가슴 어귀가 너무나 어릿해서 참을 수가 없는 미소였다.
“뭐,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면 회춘했다는 거고. 나이를 두 번 먹으니 기분이 참 요상하긴 한데, 이젠 당시 내 나이와 비슷해져서 살 만은 해.”
“다행이에요.”
“나야 그렇다 치고, 문제는 아가인데. 돌아가고 싶은 게지?”
“저는…….”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걸려 차마 나오지를 않았다. 저렇게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확실한 사람 앞에서 자신이 말하는 건 모두 투정처럼 느껴져서.
그런데 씨시 아주머니는 하지 않은 말까지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죄다 개새끼들이니 말조차 제대로 못했겠지.”
“!”
“단장인 세비레이크 경이야 괜찮은 놈이긴 한데… 그 외에 제정신인 신성 기사를 본 적이 없어. 하나같이 어딘가 고장이 났지. 우리에게 오는 놈들은 짝이 없으니까.”
“신성 기사들은 자신의 어머니조차 모르고 자란다고 들었어요.”
“맞아. 그래서 우리더러 어머니라 부르는 녀석들도 있고. 마음으로 낳은 자식 같은 놈들이 몇이라도 있어 살아가지.”
씨시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더니 다 타버린 궐련을 바닥에 떨어트려 발로 짓이겼다.
“기억하려무나. 그나마 이 세계에서 신성인에게 개똥같은 관심이라도 갖고 인권을 챙겨 주려 하는 건 모스그라토 대공뿐이라는 걸.”
모스그라토.
에화의 가문이다.
표드르가 데려와 만나게 해 준 분의 입에서 모스그라토에 대한 긍정적인 답이 나오자 어쩐지 에화를 좀 더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모스그라토 대공가가 현 황태자파와 사이가 나쁘다는 건 알아요. 황제는 권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걸 내버려 두고 있고요.”
“옳지. 그들이 사이가 나쁜 건 모스그라토 대공에게 여전히 황위 계승권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도 그렇지만 이념의 차이가 커.”
“이념이라 하면….”
철컥철컥.
그때, 누군가 잠가둔 테라스 문을 억지로 열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철렁한 레그리아는 아직도 묻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며 커튼이라도 꾹 움켜쥐었다.
“모스그라토 대공가는 신성인의 해방을 주장하지. 지금처럼 신성인에게 모든 진실을 비밀로 한 뒤 아이를 빼앗아 오는 행위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모든 건 자유롭게 선택하게 둬야 한다고 해.”
“황태자파에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겠군요.”
“그렇지. 신성 기사 숫자가 늘어나야 국력이 올라갈 테니. 황태자파 놈들은 신성인을 도구로만 봐.”
“그리고 모스그라토 대공파 쪽의 세력이 약하다는 건…… 대부분 황태자파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중립파를 유지할 뿐이라는 거네요.”
“똑똑하구나, 아가는. 오래 살겠어.”
진심이 담긴 칭찬에 레그리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긴, 절대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건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다.
기득권이 권세를 유지하는 방법이 으레 그러하지 않던가.
“비전하, 문을 여십시오. 거기 계신 것 다 압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일까.
철컥거리던 문 너머에서 호위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헤어지기 싫어 레그리아는 씨시 아주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벨리그레엄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좋았고, 비트리체를 생각나게 하는 시원스러운 성품인 점도 좋았다.
그 무엇보다 좋은 건 그녀를 ‘예비 황태자비’로 대하지 않는 점이었다.
“괜찮아. 살다 보면 모든 게 괜찮아지는 날도 올 테니 우선 살아야지. 그러면 또 만날 수도 있을 테고.”
“아주머니…….”
“그 동굴은 루손 지방에 있어. 모스그라토 대공령이야.”
머뭇거리는 걸음이 길어지자 결국 안쪽에서 문고리를 부수는 소리가 울렸다.
싫지만 하는 수 없이 놓아주며 바로 선 레그리아가 다시금 자기 자신을 꾹 누르고 가면을 쓰려던 그 찰나.
“뛰어내려요!”
테라스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아주 다급하게.
“……에화?”
“얼른. 뛰어내려요, 받아 줄게.”
잘 들리게 하려는 거였는지 두 손을 입가에 나팔처럼 대고 소곤거린 에화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팔을 벌렸다.
문고리를 부수면서 뭔가 잘못 맞물렸는지 문을 열지 못해 결국 유리창을 깨는 소리가 귀에 따라붙는다.
씨시 아주머니는 그녀를 향해 눈을 찡긋하더니 재빠르게 난간을 넘어 옆쪽 테라스로 유유자적하니 넘어가 버렸다.
이제 여기에 있는 건 그녀 하나뿐.
“누나!”
에화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는 몸짓으로 그녀를 또 한 번 불러댔다.
‘어째서 저렇게나 상냥한 걸까.’
매번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는 것도 재주다. 그런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 저 손길을 거부할 수 있을까.
난간을 짚고 선 레그리아는 등 뒤에서 문이 마침내 열림과 동시에, 두 눈을 꼭 감고 뛰어내렸다.
“잡았다!”
“……!”
에화가 그녀를 받아 안는 것과 동시에 소란스럽던 주변의 공기가 사라지더니 어디론가 빨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끌거리던 목소리들이 없어지고 남은 건 아늑하고 다정한 어둠뿐.
이윽고 레그리아는 등에 푹신한 것이 닿는 걸 알아차리며 조심스레 눈을 떴다.
제 위에 에화가 있다. 마치 두 팔 사이에 가두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 위에 올라타 있던 에화는 이내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 누나. 오늘 예쁘네.”
달콤하기 그지없는 어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