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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134)
  • 62화

    낯익은 비명이라고 생각하자마자 영애의 손에서 부채가 미끄러졌다. 동시에 그 부채의 주인이 그녀에게 대고 삿대질을 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허.”

    “당장 사과해요. 당신이 거기 있는 바람에 내 어깨가 부딪쳤잖아요?”

    아. 가면무도회라는 게 이런 의미도 있는 거였구나.

    레그리아는 제게 콧방귀를 뀌며 당당하게 서 있는 영애를 빤히 응시했다.

    한순간 지젤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머리카락 색이 다르다. 지젤은 분홍색 머리인데 이 영애는 금발인 걸 보면… 다른 영애일 수도 있긴 하지.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이 자리가 ‘가면’을 쓰고 있으니 상대의 ‘신분’을 모른다며 그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를 괴롭히는 장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거였다.

    ‘유치해.’

    라히크가 붙여 둔 호위 기사는 이럴 땐 또 쓸모가 없지.

    저런 시비에 신경 쓸 시간 따위는 없다.

    적당히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찰나였다.

    ‘잠시. 이게 어쩌면 테라스로 나갈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테라스로 나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정당한 이유가 있는 쪽이 낫다.

    라히크의 심복 중 누구도 그녀에게 테라스로 나가면 안 된다고 할 수 없도록. 혹은 그녀의 근처로 몰린 인파 탓에 테라스로 나가는지 아닌지 보지도 못하도록 말이다.

    “이봐요.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예요? 사과하라니까?”

    새된 목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영애는 한쪽 팔뚝을 부여잡곤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양 굴었다.

    “사과를 못 하겠거든 부채라도 주워 주시든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허리를 숙이라.

    고전적이고 얄팍한 술수였다.

    그녀의 교육을 담당했던 교육관은 저러한 수법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순진한 아가씨에게나 먹히는 고루한 것이라 했다.

    요즘은 괴롭힘도 훨씬 지능적으로 변했기에 만약 누군가 사교계에서 저런 식으로 부채나 손수건 따위를 떨어트려 댔다간 도대체 몇 년도 사람이냐며 곧장 놀림거리가 된다나.

    그러니 저게 먹힐 거라 생각하는 건 그녀의 정체가 역시 지젤이라는 뜻이었다.

    “영애는 혹 100년 전에 태어났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애께 예스럽고 고전적인 기품이 묻어나 물어보는 거라네.”

    그녀의 차분한 한마디에 키득거리는 웃음이 번져나갔다.

    어차피 이런 건 전부 기 싸움이다. 누가 먼저 주변의 분위기를 휘어잡느냐로 승부가 갈려 버리는 것.

    레그리아는 상대가 무어라 한마디를 더 하기도 전에 우아한 동작으로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그러고는 헛숨을 들이켜는 주변을 둘러보다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하인 하나를 손짓해 불렀다.

    “여기 영애께서 허리가 많이 아프신 듯하니 부채를 좀 주워 주겠니.”

    “네, 네! 알겠습니다. 여, 영광입니다. 비전하…!”

    그녀의 명에 후다닥 달려온 하인이 얼른 부채를 주워 상대에게 내밀었다. 받기 싫겠지만 그럴 순 없을 테지.

    하인의 손에서 부채를 홱 낚아챈 지젤이 부르르 떨며 자리를 피하려던 그때였다.

    레그리아가 냉엄한 어조로 입을 연 것은.

    “지금 허리 숙여 사과한다면 영애의 잘못을 너그러이 묻지 않겠네.”

    * * *

    드레스는 어두운 밤을 비추는 은하수를 닮았고, 그를 입은 여자는 마치 밤의 여왕처럼 보였다.

    가녀린 팔목과 우아한 목선을 장식하는 장신구는 모두 몇백 년 전부터 내려온 황실의 물건.

    오직 군림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것은 감히 그 값어치를 따질 수 없어 유물이나 다름없다.

    새카만 깃털로 장식된 가면에 촘촘히 박혀 별자리를 그려내는 다이아몬드는 눈길을 끌지 않기가 더 어려웠고 그러한 부유함을 몸에 두르고도 조금도 짓눌리지 않는 여인의 태도는 날 때부터 고귀하였음이 틀림없었다.

    가면 속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야 이미 다 아는 사실.

    모인 귀족이며 뒷골목의 중심들은 하나같이 이 고고한 여인에게 관심을 두었다.

    로에르멜에 뿌리박은 독초.

    그 비트리체의 몸에 깃든 신성인이 어떤 성격을 가졌을지는 세간의 화젯거리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이 상황에서 예비 황태자비가 내보인 경망스럽지도, 당황하지도, 거칠거나 연약하지도 않은 반응은 수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그렇지만! 예비 황태자비 전하가 먼저 저한테 부딪치셨잖아요!”

    “그것참 이상하군. 아까는 분명 내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대가 부딪쳤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지젤 로에르멜은 입술을 깨물었다.

    예전엔 잘 먹히던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여기 말고 원래 살던 세계. 거기선 그녀가 이렇게 굴면 상대는 항상 허리를 숙였다.

    지젤은 어느 파티든 항상 그 중심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녀의 주변엔 입김이 세거나 권력이 센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고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사교계를 오랫동안 다녀본 지젤이기에 기민하게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승기는 이미 갈아 마셔도 시원찮은 언니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나도 같이 가면을 벗고 언니한테 언니인 줄 몰랐다고 해야 했나 봐.’

    가발까지 썼기에 정체를 밝히는 것을 몇 초간 망설였다.

    시누엘은 왜 하필 금발 머리를 한 자신을 보고 싶다 그래서!

    입술을 잘근거리던 지젤은 결국 여기선 자신이 숙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죄송… 합니다. 오해가 있었나 봐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오해를 하는 건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언니의 한마디에 사방에서 비웃음이 쏟아진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아 지젤은 울컥한 얼굴로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그럼 이만.”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다는 듯이 언니가 멀어진다.

    자신이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 버릴 듯해 불안감이 치솟았다.

    쿵쿵쿵쿵.

    심장이 하도 빠르게 뛰어 지젤은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들이켰다. 헐떡거리며 일부러 더 아픈 체를 해 보았지만, 누구도 더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들끼리의 대화로 돌아가 버렸다.

    ‘뭐야. 대체 뭐야. 신성인이 된 건 내가 특별하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왜 다들 나를 이렇게 대해?’

    울음이 그렁그렁 맺혀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이런 세계에 오게 된 게 다 언니 탓인 것만 같고 자신을 아는 체해 주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워 지젤은 가슴을 쳤다.

    “이런, 그러면 다쳐. 아가씨.”

    그때였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복도.

    혼자 남아 있던 지젤은 귓가에 들려오는 장난기 어린 음성에 구원자라도 만난 양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시, 엘….”

    “그래, 그래. 하지만 슬퍼도 참아야지. 이런 데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 되겠어?”

    다정하고, 멋진 왕자님.

    언니가 황태자비라는 사실에 대해 맹렬히 질투하며 슬퍼하던 그녀의 앞에 기적처럼 나타났던 시누엘 모스그라토.

    지젤은 저도 모르게 시누엘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언니, 언니가아…!”

    “다 봤어. 그랬구나.”

    “응, 응. 언니가 너무했어. 정말 나빠.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지젤은 자신이 신성계에서 레그리아 언니의 친동생이었음을 밝히면 뭐라도 달라질 거라 여겼다.

    허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공작도, 그 사실을 들었을 황태자도 그녀를 쓰레기나 짐짝처럼 취급했다. 여전히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것도 같았고, 어떤 파티도 갈 수 없게 금지되었다.

    심지어 점점 미쳐 가던 지젤이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로에르멜의 위병들은 결코 그녀에 대한 감시를 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지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장미 울타리에 기대 훌쩍거리던 것뿐.

    모스그라토 공자는 그러던 어느 날, 제 앞에 나타난 구원자였다. 동화 속 왕자였고. 탑에 갇힌 그녀를 구해 줄 용감한 기사님이었다.

    ‘아, 너무 좋아.’

    시누엘에게서 나는 쌉싸름한 박하 향을 마음껏 들이켜며 지젤은 옷깃에 눈물을 닦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서늘한 것도 알지 못하고.

    * * *

    일부러 가면을 벗어 얼굴을 공식적으로 드러낸 뒤부터 레그리아는 사람에게 시달렸다.

    일부러 그러기 위해서 밝힌 것이니 후회는 없다.

    그녀는 친절하지만, 쉽게 곁을 내어주지는 않는 딱 그 정도의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대했다.

    어차피 고위 귀족은 그녀에게 이런 자리에서 다가오지 않는다. 품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할 테니까.

    지금 다가와 뭔가 흥밋거리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 애를 쓰는 건 전부 백작위 이하의 하급 귀족들. 그리고 군중 속에 서서 흘러나오는 정보에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아마도 뒷골목에 속한 이들일 터였다.

    ‘두 시간이 지났어.’

    끊이지 않고 말을 했더니 목이 아프다.

    황금빛 샴페인 잔을 든 채로 주변을 훑은 레그리아는 유독 눈에 띄던 몇몇 인물들이 회장 내에서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그중엔 라히크 역시 포함되어 있다.

    ‘지금이 기회야.’

    많지 않은 시간은 늘 아껴 써야 하는 법.

    대화를 이어 가며 아주 자연스럽게 13번째 테라스 근처로 이동했던 레그리아는 미미하게 짓고 있던 미소를 거두며 곤란한 기색을 내보였다.

    “즐거운 대화였네만… 잠시 쉬어야겠어.”

    “아이고,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암, 많이 피곤하실 겝니다.”

    “이만.”

    그녀의 곁에 양 떼처럼 몰려 있는 인파는 다행스럽게도 라히크의 심복들의 시선을 차단하는 역할도 했다.

    레그리아는 태연히 테라스로 나가 문을 닫은 뒤, 걸쇠를 잠가 버렸다. 그리고 바깥 창에 걸려 있는 커튼마저 쳐서 안쪽에서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한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잠깐 숨을 돌리고 있던 레그리아의 귀에 한국어로 된 걸쭉한 욕설이 들려왔다.

    “이 시부럴 놈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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