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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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팔찌와 목걸이를 사슬처럼 차며 레그리아는 라히크를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희귀한 보호동물을 목격하기라도 한 듯한 눈으로 그는 멀어졌다.
제멋대로 다가올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선을 긋는 게 보여 레그리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기대 같은 건 하지도 않았지만 참으로 얄팍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좋아하기는 무슨.’
사실 레그리아는 그가 저를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여겼다. 욕정 상대라면 모를까.
이따금 라히크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어 한다.
그녀가 어떤 실수를 하거나 선을 넘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제 존재 자체를 거슬려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
파티용 드레스로 모두 갈아입은 레그리아는 일부러 한쪽 발목을 끌며 절뚝거렸다.
어제는 오른쪽을 절뚝였는데 오늘은 왼쪽을 절뚝이는 실수 같은 것을 하지 않도록 늘 유의하고 있다.
라히크를 상대하려면 맹수 조련사가 되는 것 정도로는 모자랐다.
“영애나 귀부인들과 친분을 맺어도 돼?”
“멋대로 세비레이크 경까지 불렀던 주제에 괜한 것을 묻는군.”
“허락을 받았잖아. 그때도.”
“그런 것을 보고 통보라고 한다.”
라히크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몸에 바짝 붙였다. 그러면 다리가 이상하다는 걸 조금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무도회가 열리는 곳은 모스그라토 공자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수도 내의 저택.
모든 마차들이 한 줄로 서서 대기하고 있는데 황태자와 그녀가 탄 마차만큼은 옆쪽에 난 길로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어서 오십시오. 귀하신 두 분의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라히크가 먼저 내렸다.
거대한 기둥 사이에 자리한 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모스그라토 가문의 사용인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레그리아는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내림판을 밟으려 했는데 그러자마자 라히크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마치 보란 듯이.
정체를 감출 생각 따윈 없는 것 같은데.
“회합은.”
“두 시간 뒤, 검은 유니콘의 방으로 오시면 됩니다.”
“알겠다.”
머리가 희끗한 사용인은 아무래도 집사겠지. 회합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는 걸 보면.
레그리아는 화려함의 절정과도 같은 내부 공간을 둘러보며 길을 익혔다.
라히크가 회합에 가버리고 나면 혼자 남을 텐데 그때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 볼썽사나운 꼴이 되고 싶진 않았다.
“아, 그랬었지. 천사를 만나고 싶다고.”
“그걸 물어본 지가 언젠데 이제 대답을 해 주는 거야?”
“윤허할 수 없다. 그리 알도록.”
“왜 안 돼? 책에선 신성 기사들을 위한 중요한 존재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럼 나도 알아야 하지 않아?”
“지금은 안 된다.”
오늘 연회장으로 쓰이는 공간은 그레이스 홀이라고 한다.
일찍 온 귀족들이 복도며 홀 내에 가득한지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불편한 소음에 파묻히며 레그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천사를 만나게 되면 내가 이 세계의 비밀에 대해 알아 버리니까. 당연히 안 된다고 하겠지.’
아플 것도 없는 마음이 저미는 기분이다.
그와의 입맞춤이나 스킨십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몸이 반응하니 그녀도 그냥 즐기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뿐이라고.
라히크의 잘나빠진 육체를 자신이 이용하고 있는 거라고 몇 번이고 생각해도 역시 몸을 맞대는 건 좋지 못했다.
피부를 통해 감정이 쓸려 들어가 버리고 마니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건 전혀 아니었으나 그래도 살을 맞댄 사이에 어느 정도의 존중은 해 줄 수 있지 않은가.
송곳 같은 시선들을 받아내며 라히크와 함께 입장한 레그리아는 문득 깨달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좋지 못한지를.
어쩌면 그녀는 라히크가 제 입으로 진실을 밝혀 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제아무리 추악한 진실이더라도 상관없으니 제게 말을 해 주었으면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일단 그 엄청난 비밀을 어디서 들었는지 밝힐 수도 없을뿐더러, 라히크라면 그녀가 탈출할 수 없도록 사지를 묶어 방 안에 가두는 것도 가능할 테니.
“라히크. 다들 당신이 황태자인 걸 알아보는데 가면이 무슨 소용이 있어?”
“알아보지 못하는 척하는 것이지. 여기에 앉아 있어라.”
“당신은.”
“황태자는 가면무도회에서도 의무적으로 귀족 여성과 춤을 춰야 한다.”
담담한 음성이었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므로 질투 비슷한 거라도 하지 말라는 경고.
라히크가 누구와 춤을 추든 키스를 하든 어느 풀숲 뒤에서 아랫도리를 문란하게 놀리고 다니든 저와 상관없었으므로 레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불쌍하다는 동정과 멸시의 눈길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내 처지가 우습단 거구나.’
라히크는 젊은 여성들만 골라서 춤을 추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손을 잡고.
그가 잘난 황태자의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레그리아가 한 것은 자리에 앉아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는 것뿐.
어쩌면 저 영애들은 그녀가 아이를 낳고 죽은 뒤 황태자비가 될 후보인지도 모른다.
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잘도 골라내 춤을 추는 걸 보면 말이다.
‘내가 만약 아이를 낳자마자 숨을 거두면 아이를 키울 여자도 필요하긴 할 테지.’
이런 생각은 스스로를 칼로 찌르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도 멈추기가 어렵다. 어느 금발 영애와 춤을 마친 라히크가 제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이야기를 하러 간 뒤엔 더욱더 그랬다.
“너무하는군요.”
그때였다.
미미한 분노가 느껴지는 음성이 그녀의 지척에서 들려왔다. 저를 위해 주는 목소리가 반갑기는 하여 고개를 돌린 레그리아는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표드르!’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구겨진 악보를 테이블에 내려놓곤 술을 한 잔 마시더니 몸을 휙 돌렸다.
마치 급한 일이 떠올라 잊어버리고 간 것처럼.
사람들의 흥미 어린 시선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키 큰 표드르의 뒷모습에 따라붙는다. 바로 그 순간을 노려 레그리아는 자연스럽게 악보를 집어 들었다.
이걸 실제로 연주하면 천하에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겠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암호니까.
‘13번째… 테라스. 천사. 2시간 뒤.’
라히크가 회합에 가면 만나게 해 주겠다는 소리구나!
세상에.
라히크가 절대 의심하지 못할 방향으로 암호를 만들어 놓기를 잘했다. 그리고 그걸 표드르와 디트리히가 곧바로 알아채고 익힐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무료하기만 했던 가면무도회가 갑자기 즐거워졌다.
라히크의 머리 위에서 노는 듯한 이 짜릿함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사실 레그리아는 연회장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제게 향하는 시선들을 알고 있었다. 신황청에서도 자주 받았던 감시의 눈빛이다.
라히크가 없어도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 사이에는 저를 감시하기 위한 인물들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어떻게 저들이 이 악보의 의미를 알까.
레그리아는 속으로만 픽 웃곤 악보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꼭 주인을 찾아 주려는 것처럼.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레이디.”
다들 알음알음 누가 누군지 안다고 하더라도 콘셉트는 어쨌든 ‘낯선 사람’이다. 그러니 모두가 서로에게 경어를 쓰는 게 규칙이라나.
삼십 분쯤 지났을 때, 레그리아는 제게 성큼 다가온 웬 남자의 체형을 눈여겨보았다.
목소리는 낯설지만 확실하다.
신황청에서 그녀의 방문 앞을 지키는 호위 기사였다.
“아, 누가 이걸 흘리고 갔네요. 유실물은 어디에 두면 되는지 아나요?”
“제게 주시면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어머나. 친절도 하셔라. 하지만 본인에게 직접 돌려주는 게 아니라면 이 저택의 집사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옳을 것 같으니 감사하지만, 제안은 거절할게요.”
부드럽게 거절의 말을 뱉은 그녀는 애써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척을 했다.
하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체해 왔더니 영영 똑바로 걷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울 정도다.
“그럼 집사에게 가는 길까지 모시겠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 주나요?”
“그건…….”
“이유가 없다면 호의는 받지 않겠어요.”
단호하게 말한 레그리아는 절뚝거리며 느리게 걸었다.
걸음이 엉망이라지만 그녀의 등허리는 꼿꼿하게 펴 있었고 두 손은 배 쪽에 가지런히 모여 있어 얼핏 보면 다리가 이상한 줄 모를 정도였다.
“레이디, 하지만.”
“레이디의 거절이 두 번을 넘어갔는데 한 번 더 제안할 건가요?”
“……아닙니다.”
“그럼.”
벨리그레엄 사교계 입문서에 나와 있는 수많은 규칙, 규칙, 규칙들. 그중 하나는 레이디가 두 번 거절하면 신사는 세 번 제안해선 안 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그런 쓸데없는 규칙에 감사를 느낀 레그리아는 멈추지 않고 입구로 향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한두 번씩 쏟아지긴 했으나 그녀를 붙들고 늘어지기에 오늘 이 자리는 지나치게 향락적이었다.
벌써 두꺼운 커튼 뒤쪽에서 앙앙거리는 소리가 옅게 새어 나오는 걸 보라.
다들 뭘 바라고 여기에 왔는지.
‘그리고 라히크는… 나를 여기에 홀로 버려뒀지.’
이런 자리를 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길 거라는 걸 모를 남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혼자 둔 건 자신이 없을 때 그녀가 뭘 했는지와 같은 보고를 받고 싶어서이거나,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이거나.
혹은 둘 다거나.
아까 보았던 집사가 있을 만한 곳으로 향하던 레그리아는 누군가 제 어깨를 팍 치는 걸 느끼고 휘청였다.
정말로 주저앉을 뻔한 바로 그때였다.
“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