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34)
  • 60화

    * * *

    “응, 읏…!”

    몇 마디 말을 나누기도 전에 입술이 삼켜졌다. 처음엔 입술을 비빌 때마다 다급히 달려드는 것 같더니 이제는 여유가 제법 생겼는지 살살 달래가며 혀를 옭아매는 통에 오히려 혼이 쏙 빠질 것 같았다.

    “야한 표정이군.”

    남자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따라 느슨히 미끄러졌다.

    한 번 몸을 허락한 뒤로 라히크는 매일 신황청에 찾아왔다. 마치 맡겨 놓은 쾌락을 받아가겠다는 것처럼 치열하고 집요하게.

    바쁘지도 않은지 하루도 빠짐없이 오는 통에 레그리아는 아침에 잠들고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깨어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해서 라히크의 경계를 풀고 그녀에 대한 모든 의심을 내려놓게 하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어쩐지 휘둘리기만 하는 건 기분 탓일까.

    “아, 싫어…!”

    “싫은 표정을 하고 싫다 해야지.”

    라히크의 목에 팔을 걸고 안긴 채 치닫는 쾌감에 눈가를 찡그리던 레그리아는 세상 사람들은 진짜로 다 이런 짓을 하고 사는 건지 의아해졌다.

    이렇게 발끝이 곱아들고 아랫배에 뭉근한 열이 치닫는 일을, 한 달에 한 번도 많은 것 같은데 매일 마다 빠짐없이 겪는 건지.

    다른 여자들도 다 이렇게 입안이 헐 정도로 혀뿌리를 얽고 비비고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는 걸까.

    그래도 라히크는 절대로 끝까지 가진 않았다. 처음에 그녀가 정색하며 거부한 탓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오기가 생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언제까지 거부할 수 있나 보자는 듯이.

    “오늘도 당신 때문에 머리가 엉망이 됐어.”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넌 엉망인 꼴이 가장 예쁘다고.”

    “입가도 아파.”

    “저런. 그 정도로 아파하면 나중에 내 것은 어찌 삼키려고.”

    끊임없이 스킨십을 한 덕인지 라히크는 요즈음 들어 역대 최고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반면에 레그리아는 너무나 저조했고.

    반응하기 싫은 것과 몸은 완전히 별개였다. 애초에 그녀의 몸도 아닌 것이지만 라히크와 이런 더러운 짓을 하고 나면 더더욱 괴리감이 크게 느껴졌다.

    또 셀린에게 속옷을 몰래 빨아달라고 해야겠네.

    한숨이 나온다. 라히크는 그녀의 몸을 달구는 법을 너무나 잘 알았다. 이제는 강압적으로 부딪쳐 오지도 않았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슬릴 줄 아는 남자였고 그녀는 라히크에 비하면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나무토막이었다.

    거의 어른과 아이 수준의 차이랄까. 전혀 동등하지 못하다.

    저렇게 여유롭고 느긋해질 때까지 라히크는 숱한 여성들을 거쳐 왔겠지.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은 한 단계 더 내려갔다.

    이런 남자가 남편이 된다니.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있어선 안 될 말이었다.

    그녀도 이 남자 저 남자를 다 만나 본 다음이면 몰라도.

    “누워. 정신 접촉을 하게.”

    “글쎄.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할 수 있을 때 해두는 게 나아. 언제까지 당신이 안 바쁠 것 같아?”

    라히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너무 얄미워 신발로 딱 한 대만 때리고 싶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녀가 아무리 퉁명스럽게 굴어도 라히크는 이전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도 바쁜데 시간을 내고 있는 것이니 걱정 말라.”

    “걱정한 적 없거든?”

    아, 정말 입꼬리가 찢어졌네.

    따끔거리는 느낌에 혀로 입꼬리를 꾹 누르며 레그리아는 라히크를 흘겼다.

    그 모든 비밀을 전혀 모르는 그녀였다면 내보일 만큼의 반응. 딱 그 정도만.

    처음엔 제 반응이 너무 과한 건 아닌지, 지나치게 양순한 게 아닐지. 그래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들을 했었지만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어차피 라히크와 하는 게 대화가 아니라 입맞춤이 된 이후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 차라리 나았다.

    “에오스에게 타국 언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던데. 내일 책을 가져다주지.”

    “잘 받을게.”

    “곧 죽어도 고맙다고는 하지 않는군.”

    “설마 대 벨리그레엄이 황태자가 그깟 걸로 생색내려 하는 건 아니지?”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라히크가 입매를 뒤틀었다. 하도 키스를 당해 찢어진 입꼬리가 불만이었던 레그리아는 흠칫하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방금 건드려선 안 될 선을 넘었나?

    이 정도 비꼬는 건 괜찮다고 여겼는데.

    이제 레그리아는 라히크가 어느 선까지 봐주는지 어느 정도 알았다.

    그는 누구든 제 머리 꼭대기 위에 서려 하는 걸 병적으로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 그깟 책 정도로 생색을 낼 수는 없지. 하루가 멀다 하고 혀를 섞는 사이에.”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라히크는 그녀를 눕혀 압박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른히 몸을 일으킨 그는 벗어둔 재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가져왔다.

    초록색 벨벳으로 싸인 작은 상자는 보기만 해도 안에 든 것이 연상이 됐다.

    “네 것이다.”

    “이게 뭔데?”

    “황태자에게 반지를 받고도 그리 뚱한 표정을 짓는 건 천하에 너밖에 없음이니.”

    그녀의 반응을 보던 라히크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상자를 열어 몇 캐럿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보여 주었다.

    알이 하도 커서 손가락에 끼우면 그 무게로 반지가 돌아갈 게 분명했다.

    “끼워주마.”

    “결혼반지를 미리 주는 거야?”

    “그럴 리가. 이건 약혼반지다. 약혼이라는 제도는 없지만 이런 걸 끼우고 있으면 무도회에서 다가오는 자들이 줄겠지.”

    라히크가 그녀의 오른손을 감싸 쥐더니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딱히 원한 적 없으니 숫제 강제로 손가락을 약탈하는 셈이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데려가질 말든가.”

    “그럴 수 있었다면 진작 그랬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에화가 그녀를 직접 초대한 게 어떤 큰 의미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라히크가 싫어 죽겠다는 티를 내면서도 가면이며 드레스 따위를 전부 준비한 걸 보면.

    위치에 따라 다른 빛을 품고 반짝거리는 보석 반지에서 금세 시선을 뗀 레그리아는 방 한쪽에 세워져 있는 토르소로 눈길을 옮겼다.

    거기에 입혀져 있는 새까만 드레스는 오늘 그녀를 위한 것이다.

    라히크가 이런저런 곳에 울혈을 집착적으로 새기는 바람에 노출이 거의 없는 디자인을 입게 되었다.

    목을 감싼 레이스 아래로 몸의 곡선을 따라 유려하게 떨어지는 천이 하느작거린다. 자잘한 보석을 달아 반짝거리는 드레스는 목이 답답한 대신 민소매여서 움직이는데 크게 불편함은 없을 듯했다.

    가면 역시 드레스와 같은 색인데 깃털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나마 다시 몇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군. 춤은 출 수 없을 테니 인사를 마치고 나면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도록.”

    “내가 그러는 동안 당신은?”

    “만나야 할 자들이 있다. 그때 설명했듯 그날은 단순한 무도회 날이 아니니. 네 주변엔 기사들을 배치해 둘 테니 그리 알면 된다.”

    그것참 보석함 속의 보물이 따로 없네.

    지난 며칠간 조금씩 발을 떼어 놓는 체하며 레그리아는 다시 ‘걸을 수는 있다’ 정도로 둘러대 두었다.

    어차피 애초부터 다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였으므로 의사들은 그녀의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거라며 근거도 없는 소릴 해댔다.

    어찌 되었든 걷지 못하는 척을 통해 라히크에게 의존하고, 의존을 바라는 그의 욕망을 채워 너그럽게 만드는 건 성공하였으니 연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해야겠지.

    “또 눈이 내리는군.”

    “……그러네.”

    라히크가 불쑥 꺼낸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레그리아는 저를 향한 시선이 지나치게 강렬해 흠칫 놀랐다.

    “나는 너와… 단순히 결혼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가족이지.”

    그을린 손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뺨을 덧그리며 턱을 슬쩍 들어 올린 라히크가 어울리지도 않게 부드러이 다가와 입술을 가까이했다.

    닿을 듯 말 듯, 서로의 동공과 홍채마저도 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

    누가 보면 절절한 사랑이라도 고백하는 줄 알 법한 목소리로, 라히크는 속삭였다.

    “네가 낳을 아이들이 저 눈밭에서 뛰어노는 걸 보는 것도 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

    “그러니 내가 널 좋아하는 것의 절반이라도 나를 좋아하려 노력해라. 레그리아.”

    ……소름이 끼친다.

    맹수의 눈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 안에 숨겨진 것이 뭔가 없는지 확인하려는 듯.

    아, 그래. 제 평생에 이보다 더 소름 끼치는 거짓 고백은 또 없겠지.

    레그리아는 애써 웃어 보려다가, 욱 하고 치미는 화를 참아보려다가, 결국 하늘에서 한 움큼씩 버려지는 눈처럼 처참한 기분에 휩싸여 한 마디를 쥐어짜 냈다.

    “당신이 먼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되도록 해.”

    받아 본 적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은 나날이 커지기만 해서 끝내 그녀를 집어삼키고 만다.

    이토록 위태하고 아득한 하루를 버티고 견뎌내며 끝내 살아내는 이유는. 그것은…….

    “나는, 사랑이 하고 싶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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