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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57/134)
  • 57화

    어차피 너는 내가 낳을 아이가 필요해서 보호한 것뿐일 테니까.

    삼켜내는 뒷말에 식도가 조여드는 듯 아파 왔다. 밀려오는 감정을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는 동안에도 라히크는 그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걸로 우리 사이가 대단히 가까워졌다는 착각 같은 거, 하지 마.

    나는 너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레그리아는 그렇게 다짐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별 같잖은 잔정 같은 놈이 늘 발목을 움켜쥐는 법이다.

    그녀는 좀 더 냉정하고 차가워질 필요가 있었다.

    “잡소리가 길군.”

    말을 잇지 않은 채 침묵을 삼키고 있는데 라히크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 팔에 붕대를 감아놓은 탓에 여전히 맨몸이던 그는 셔츠를 걸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녀에게 느릿하게 다가왔다.

    “누가 감사하라 하였던가.”

    “…그건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죄책감을 가질 이유 또한 없다. 그저 너는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앞으로 이게 네 삶이 될 것임을.”

    끼익.

    매트리스 한쪽이 짓눌리듯 내려갔다. 그녀의 곁에 자리한 그는 집요한 시선으로 눈썹 사이를, 뺨을, 코끝을…… 그리고 입술을 훑어 내렸다.

    눈빛만으로 그녀를 벗겨 놓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다는 듯한 투로.

    “본디 예비 황태자비가 되면 공격에 시달리는 법이다. 하물며 비트리체 로에르멜의 몸에 깃들었으니 더 하겠지.”

    “응.”

    “앞으로 이러한 일이 여러 번 반복될 텐데 그때마다 고마워할 수는 없지 않겠나.”

    담담한 목소리였다. 빈말로라도 이런 일이 두 번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놓아주겠다는 말 역시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황태자비 자리를 끔찍해 한 여자는 많았지만, 그 누구도 벗어난 적 없다는 듯이. 라히크의 어조는 평온했다.

    그녀 역시 결국 받아들일 것임을 안다는 것처럼.

    “오늘 그자들은 어떻게 우리가 그 카페에 가게 될 걸 알았어?”

    “미리 알고 준비한 게 아니다. 어느 상황에서든 암살할 수 있도록 오래전부터 이 나라 곳곳에 간자가 숨겨져 있을 뿐.”

    “간자…?”

    “아리툼에서 보낸 자들이다. 비밀 공작원이라 보면 된다.”

    라히크의 설명은 간결했다.

    아리툼.

    벨리그레엄의 숙적. 벨리그레엄이 신성 기사를 수없이 배출해내는 이유.

    아마 새 황태자비가 들어서는 것을 누구보다도 경계할 자들.

    “아예 아리툼의 간자를 전부 솎아낼 수는 없어?”

    “불가능하다. 한두 명도 아니고. 어떤 자들은 10년. 아니, 50년도 넘게 이 나라에 뿌리를 박고 있기도 하니.”

    그녀가 아는 냉전의 역사가 떠오른다. 스파이나 간첩 따위의 단어도 머릿속을 복잡하게 맴돌았다.

    그런 이들이 수십, 수백 명이라면. 긴 세월에 걸쳐 제국에 심어 두었다면….

    ‘내가 달아난다 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자주 가는 카페의 종업원이, 어제 들어간 술집의 주인이, 길을 청소하는 미화원이. 그 모두가 아리툼에서 심어둔 간자일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속이 메슥거렸다.

    “신경 쓸 것 없다. 가야 할 곳만 가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은 가지 않으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으니.”

    “……나한테 그걸 알려 주려고, 순순히 길거리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한 거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유명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곳엔 간자가 심겨져 있을 확률이 높다. 배워 두도록.”

    아. 이 남자는 어떻게 이토록…….

    레그리아는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말로 해도 될 것을 꼭 이렇게 당하게 만든다. 결과를 알면서 행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녀가 마모되기를 기다렸다.

    오늘의 일은 또 다른 거룩의 샘에 불과하다.

    앞으로 그녀는 몇 번이나 샘의 바닥을 보아야 할까. 이런 짓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라히크가 멈출지 몰라 아득할 뿐이었다.

    “간자를 알아차린 건 잘했다. 위험을 느낄 수 있게 되었나 보군.”

    “추웠어. 그 종업원이, 다가왔을 때.”

    “유용한 능력이다. 귀히 여겨라.”

    라히크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 위를 툭 하고 덮었다. 침대 시트를 그러쥔 레그리아는 망설였다. 이걸 물으면 또 한 번 마음에 상흔이 새겨질 것임을 알았기에.

    하지만 입술은 늘 제멋대로 벌어진다.

    “…내가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독이 든 홍차를 마셨으면?”

    “그럴 일을 대비해 해독제를 가지고 다니니 걱정할 것 없다. 내일부터는 네게도 상비용 해독제를 주겠다.”

    “아니, 당신 말이야! 당신은 어쩔 뻔했냐고!”

    화가 난다. 왜 이렇게 속이 뒤집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임계점을 넘은 게 이유일까.

    신이 자꾸만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듯한 참담한 기분이었다.

    아리툼이니 뭐니 하는 것,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았다. 라히크의 옆. 황태자비 자리에서 도망을 친들 소용이 없다.

    라히크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였다.

    이렇게 화려한 얼굴로,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황태자비임을 아는데. 그런데 그녀가 어디를 간단 말인가?

    “신성 기사는 독이 쉬이 통하지 않는다.”

    “…….”

    “그렇다 하여 유쾌하지는 않음을 알아주면 좋겠군.”

    위험해지는 건 신성인 뿐. 손해 보는 것도 신성인 뿐. 시한부가 되는 것도 신성인 뿐이다.

    너무나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상황에 억울하여 꾹꾹 눌러 둔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황태자비 자리를 피해 달아나는 데 집중하는 것만 해도 버거운데 이제는 목숨마저 진짜로 걱정을 해야 한다니.

    기껏 한 발을 내디뎠더니 다음 발이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짜증이 났다.

    오늘 에화를 만나 가졌던 미약한 희망이 지금은 시든 풀꽃처럼 거칠거린다. 마비독을 지닌 벌에 쏘여 들판에 누운 사람처럼 그녀는 지독한 허무감과 공포 그리고 고독감을 느꼈다.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기만 하면 어딘가 작은 마을 같은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 기대감이 지금껏 그녀를 붙들어 주었는데, 모든 게 엉망이다. 아까 바닥에 떨어졌던 디저트들처럼 마음이 뭉개졌다.

    “자라. 피곤할 터인데.”

    “…당신은?”

    “어차피 거의 잠들지 못하니 침대는 혼자 써도 좋다.”

    “전엔 잘만 자더니.”

    아, 너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나.

    생명의 은인에게는 좀 더 상냥하게 대꾸해야 했는데 그녀의 안에 작은 회오리가 휘몰아치고 있는 것만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움찔해서 시선을 맞추자 그녀를 내려다보던 라히크가 조용히 다가왔다.

    “읏.”

    “싫다면 다친 곳을 손톱으로 찍어 눌러라.”

    “뭐…… 아!”

    “내 상처를 네 손으로 파고들면 멈춰 주지.”

    다친 사람이 무슨 힘이 이렇게…!

    순식간에 그녀를 밀어트린 라히크가 위로 올라탔다.

    탄탄하게 뻗은 가슴 근육부터 살집 하나 없는 복사근까지, 그의 육체는 지나치게 훌륭했다. 경험 없는 그녀조차 아랫배가 꼬여들 정도로.

    “짝에 가까워질수록 육체의 상성이 잘 맞아서 서로에게 쉽게 흥분 반응을 일으킨다더군.”

    “아, 싫어…!”

    “가르쳐주었을 텐데. 싫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남자가 느긋이 몸을 끼워 넣었다. 그녀와는 달리 여유로운 얼굴이 보기 싫다.

    얼마나 경험이 많으면.

    “넌 여기를 물면 소스라치게 좋아하더군.”

    “헛소리…!”

    그녀의 귓바퀴를 따라 입술을 움직이던 라히크가 답지 않게 부드러이 물었다가 놓았다. 언제나 들이닥치는 것 같아 통증인지 자극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었는데 지금 이건 확실히 알겠다.

    몸이 반응하고 있다.

    라히크의 말대로 정신 접촉을 너무 잦게 반복한 탓일까.

    표드르로 분산시킨 것 정도로는 안 될 만큼 그녀의 안에서 라히크의 지분이 높아진 모양이다.

    그래, 분명 그게 이유다. 그렇지 않고서야 몸이 이렇게 될… 이유가 없잖아.

    “뭐, 정히 좋은 걸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간호라 여겨. 널 가두고 물고 빨다 보면 통증도 멎을 테니.”

    하필 신께서는 저런 남자에게 어째서 최상의 목소리를 내려 주신 건지.

    젖혀진 목선을 따라 마른 입술이 타고 내린다. 고작 그에 불과할 뿐인데 낮고 뇌쇄적인 음성이 심장 박동을 빨라지게 만들었다.

    가둬진 채로 고개를 돌린 레그리아는 달뜬 소리가 튀어나오는 게 싫어 혀를 깨물었다.

    하지만 끝까지 라히크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 자신의 의지였다.

    “끝까지는, 안 돼.”

    “까다롭기도 하시지.”

    대화는 거기서 끝.

    라히크가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잇자국을 새겼다. 장난이라도 치듯 잘근잘근 물던 그가 돌연 아래로 내려가 허벅지 살을 움켜쥐자 호흡이 가빠진다.

    누구도 함부로 자국을 남길 수 없는 곳이 허벅지 안쪽이다.

    소유욕의 증거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그는 여린 살을 아프게 물어 몇 번이고 꽃을 피웠다.

    그녀가 원하는 딱 그만큼, 그 정도로 강렬하게.

    ‘이거면 돼.’

    죽은 종업원의 얼굴을 지워낼 수 있게 해 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어준다면… 나는 반드시 네 뒤통수를 치고 달아날 테니.’

    발가락을 핥는 라히크의 혀 놀림이 야릇하다. 수치스럽고 창피한 행위를 저 남자는 어째서 저토록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치덕거리는 감정이 켜켜이 쌓여 가는 밤.

    소리가 높아진다.

    하지만 여전히 라히크는 그녀에게 있어, 불협화음일 뿐이었다.

    이런 짓까지 하고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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