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34)
  • 56화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아악!”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뒤집혔다. 엉망진창이 된 바닥에 시선을 주던 레그리아는 짓뭉개진 케이크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예쁘게 꾸며져 내어와 지금은 내팽개쳐진 꼴이 닮았구나. 우리는.

    창졸간에 벌어진 일에 기절할 듯 놀랐지만, 벌떡 일어서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눈앞에서 폭력이 가해지고 있음에도 제 안위를 위해 일어서지 않는 자신을 역겹다 여겨야 할까.

    이제는 모르겠다.

    종업원의 등을 짓밟아 일어날 수 없게 만든 라히크는 용케 깨지지 않은 잔을 찾아 우아하게 집어 들었다.

    “차를 따라라.”

    기겁하며 달려온 주방장에게 가차 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내 한마디 때문에.’

    저 종업원이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건데.

    무겁게 내리깔리는 위압감에 숨을 쉬기 어렵다.

    당장 달려가 라히크를 밀어내고 사람을 밟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지.

    그녀는 지금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설정이니까.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할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먹여 보면 될 터. 그렇잖은가?”

    주방장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 탓에 사방에 찻물이 튀었으나 라히크는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라히크의 성질상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닐 텐데 왜 참아 주나 했더니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끄아아악…!”

    내리깔린 종업원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뒤로 젖힌 라히크가 벌어진 입에 찻물을 온통 쏟아낸 것이다.

    방금 데워 나온 것이라 아직 김이 나는 끓인 차다.

    만약 그녀가 착각한 거라면. 저 사람에게 죄가 없다면 어쩌려고.

    “커헉… 저는, 아무것도… 컥!”

    헌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레그리아는 차를 마신 종업원이 눈을 까뒤집고 제 목을 벅벅 긁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곧 입가에 흰 거품이 올라온다. 아무리 독에 대해 지식이 없는 레그리아라지만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즉사했군. 변명할 거리가 있나?”

    경멸의 눈으로 죽은 종업원을 훑던 라히크가 느른히 고개를 돌렸다.

    벌벌 떨던 주방장과 지배인을 비롯해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든 모든 요리사들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 저만 죽여 주십시오. 제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저 종업원은 드, 들어온 지 4년이 넘은 베테랑인데… 어째서…….”

    나이 든 주방장은 진심으로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다른 이들도 망연한 표정은 마찬가지다.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외출을 나왔다.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런데 그곳에서 독살을 당할 뻔했다.

    라히크의 태도는 너무나 평이했고 순간적인 판단은 빨랐다.

    그 모든 사실들이 하나하나 짜 맞춰지니 제아무리 라히크를 좋지 못하게 보는 레그리아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라히크는 이런 상황이, 숨 쉬듯 익숙한 것이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모조리 체포해 투옥하라. 나의 비께서 독살당할 뻔하였다. 이 일은 친히 엄중하게 심문할 테니 죄수들에게 물 한 모금 주지 말라.”

    “명 받듭니다.”

    마차를 호위해 왔던 기사들이 곧바로 주방장부터 손을 묶어 체포했다.

    그러는 동안 레그리아는 꿇어앉은 이들을 빠르게 훑었다.

    설마 공범이 있을까 싶지만, 그녀의 안을 따끔하게 만드는 감각은 여전히 잔존해 있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는 듯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한다.

    한 명 한 명 집중해서 쳐다보던 레그리아는 문득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다들 이 상황에 당황하여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단 한 사람만이, 그녀를 응시한다.

    0.1초.

    쏟아지는 냉기에 소스라침과 동시에 놈이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를 향해 공격을 가한 찰나.

    “라히크!”

    0.2초.

    제 경동맥을 향해 쏘아지는 뭔가를 느낀 레그리아가 반사적으로 라히크의 이름을 외친 시간.

    그리고 0.3초째.

    “……라히크?”

    제 앞을 가로막은 라히크의 움직임에서 돌풍이 채 가시기도 전. 레그리아는 그의 어깨부터 팔까지 빼곡하게 박혀 있는 미세한 침을 보았다.

    어두운 곳에서는 아마 보이지도 않을, 빛이 비춰져야만 간신히 식별이 가능할 그런 류의 암기.

    눈을 깜빡이는 순간, 라히크가 사라졌다.

    그 뒤에 보이는 건 무서운 기세를 내뿜고 있는 라히크의 등뿐.

    우드득.

    턱뼈가 빠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전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온다. 그 소음은 확실하게 그녀의 목을 옥죄어 숨통을 틀어막았다.

    방금 그 공격은 라히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향한 것이지.

    독이 든 차 역시 라히크가 아닌 그녀를 노린 것.

    이 모든 일들이 그저 덧없는 악몽 같아 믿기지 않았으나 이미 일은 벌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죽은 종업원의 부릅뜬 눈이 그녀에게도 묻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알아챘느냐고.

    라히크는 여길 즉흥적으로 고른 것 같았는데.

    미리 예약을 하고 자리를 비우도록 한 게 아니라, 무작위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다친 곳은.”

    “나는, 괜찮은데. 당신이….”

    “신경 쓸 것 없다. 이만 돌아가지.”

    어디로? 설마 신황청으로?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레그리아는 저를 안아 들려는 라히크를 밀어내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치료부터 받아. 여기서 황궁은 얼마 안 걸릴 거 아냐. 신황청으로 가지 말고, 황궁으로 가.”

    “네겐 황궁보다 신황청이 더 안전하다.”

    “앞으로 평생 신황청에 둘 거 아니면, 황궁으로 가.”

    “이상한 일이군. 다친 데가 없다면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기사가 응급처치로 어깻죽지를 꽉 묶어 독이 퍼지지 못하게 하는 동안에도 라히크의 표정은 여상했다. 부아가 치밀었으나 레그리아는 화를 내지 말자고 몇 번이고 속을 도닥였다.

    라히크에게서 그녀는 달아나야만 한다.

    그러니 그가 다치거나 죽으면 오히려 박수를 쳐야 할 텐데… 어째서 미련하게 그렇게 되질 않는 건지.

    “왜. 왜 쓸데없이 나를 구해서…….”

    마음의 빚을 지워.

    저번에 구해 준 건 치가 떨리는 배신감으로 무게추가 맞춰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 번 더 구해 줘 버리면 라히크 쪽의 저울이 무겁게 내려가 버린다.

    그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싫었다. 미워할 수만 있게 둬 주지. 그러면 마음이 편할 텐데.

    “너는 언젠가 이 나라의 후계를 생산할 귀한 몸이다. 흠집이 나게 둘 수야 있나.”

    “!”

    “안겨라. 네 몸 하나 정도는 한 팔로도 안을 수 있으니.”

    그럼 그렇지.

    맥이 빠져 버린 레그리아는 조용히 라히크의 품에 안겼다. 다친 팔은 쓰지 않는데도 쉽사리 그녀를 안아 올린 라히크는 전쟁터처럼 들쑤셔진 현장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말을 타고 갈 거다. 꼭 붙들지 않으면 떨어진다.”

    어두워진 시각임에도 하늘이 흐리다는 걸 알 수 있는 저녁.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평범한 데이트조차 우리 사이에는 있을 수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날이다.

    라히크의 곁에 있으면 오늘과 같은 일이 수십, 수백 번은 더 벌어지겠지. 그럴수록 그녀의 행동반경엔 제한이 생기고 끝내 궁내의 가장 깊숙한 안식처에 갇혀 평온히 죽어가리라.

    ‘나는 나를 위해 달아나야만 해.’

    라히크의 품에 안긴 채로 레그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손가락에 끼워진 꽃반지를 매만지며 그녀는 라히크가 아닌 에화를 생각했다.

    그녀에게 달아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준 남자를.

    * * *

    “황궁 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내 침실이다. 불편하더라도 오늘은 참도록.”

    황태자 궁에 도착하자마자 라히크는 그녀를 안아 침실에 내려놓았다. 시종과 주치의가 기겁하며 달려와 그의 상태를 살피고 치료하는 동안 레그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짙은 고동색 나무 바닥. 하도 어두운 감색이라 검정처럼 보이는 벽지. 그런 주변과 어울리는 무겁고 크고 억센 가구들.

    신황청에서 그녀가 쓰는 침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딱딱한 매트리스마저도 라히크의 인상과 비슷했다.

    너는 이런 곳에서 지내는구나.

    “저어, 비전하.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따뜻하게 데운 차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부탁하네.”

    “예, 그럼 자스민 차로 준비하겠습니다. 간소하게나마 시중을 들어드릴 시녀도 부르겠습니다.”

    라히크는 상의조차 벗지 못한 채로 암기를 뽑아냈다.

    의사가 뭔가를 달인 물 같은 걸 먹였는데 그게 아마 마취제와 같은 효능을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기는 했다.

    “이런 식으로 고슴도치가 되어 돌아오신 건 참 오랜만이로군요.”

    마지막 하나까지 다 뽑아낸 노의사가 식은땀을 닦아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아이고, 제가 주책없었습니다. 이제 상의를 벗어 주십시오, 전하. 소독을 해야 합니다.”

    라히크의 표정은 너무나 무감했다. 그녀를 지키려다 다쳤다고 이야기를 할 법도 한데 아무 말이 없다.

    만약 저게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기 위한 수단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라히크가 치료가 거의 끝마칠 때쯤, 레그리아 역시 적당히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방은 하나지만 침대 주변으로 두꺼운 커튼을 칠 수 있는 구조인지라 부끄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얼마 뒤.

    의사와 함께 라히크의 시중을 들었을 시종마저 나가 단둘만이 남은 침실.

    “지켜 준 거. 고맙다고 안 할 거야.”

    툭 튀어나온 한마디였다. 방안에 감도는 적막을 밀어내기에 알맞을 만큼의 소음이기도 했다.

    “고마워하지도 않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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