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 *
라히크 바라키엘 벨리그레엄.
벨리그레엄의 초대 황제와 같은 축복인 낙뢰를 타고난 귀재.
언젠가 눈엣가시 같은 초원 연합국을 밀어버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비겁한 아리툼 제국을 정복할 수 있을 거라 믿어지는 황태자다.
숙적인 아리툼과의 전투를 위해 길러진 라히크는 어려서부터 소중한 것을 두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유모는 1년 단위로 바뀌었고 시종이나 시녀 역시 2년을 기준으로 교체되어 혹시 그 안에 섞여 있을지 모를 간자를 방지했다.
놀이 친구는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황태자파의 자식들로 엄선되어 입궐했고 훈련은 신성 기사들과 함께 받았다.
국경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투에 나가기 시작한 건 그의 나이 불과 열한 살의 일.
그 결과, 그는 정을 준 짐승을 제 손으로 죽이라는 황제의 명령에도 말없이 따르는 냉혈한이 되었다.
모두가 바라는 ‘황태자다운’ 모습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던 모범적인 인생. 이제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라 여겨왔었는데.
갑작스레 나타나 그의 일상에 파고든 레그리아는 라히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최초의 존재였다.
‘그래서 놀란 것뿐이다. 그 여자가 먼저 다가온 건 이번이 처음이니.’
늘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라히크이기에 지금 이 순간, 그는 스스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차렸다.
심장 박동이 기이하게 빠르다.
거의 닿는 것도 아니었던 입맞춤이지 않나. 고작 몇 초 정도 입술이 스쳤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었다.
어린아이 장난 같은 그런 행동에 마음이 동한 건… 아마도 그게 레그리아가 최초로 그에게 먼저, 스스로 다가온 접촉이기 때문이리라.
아슬아슬한 거리감. 입으로는 도발을 뱉지만, 남녀 사이의 일 따위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말간 계집.
미운 소리만 골라 뱉으며 저를 자극하려 드는 고집 센 새를 비로소 손 위에 올린 듯한 만족감이 든다.
말고삐를 거머쥐며 라히크는 이 말도 안 되는 가슴의 수런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제 품에 얌전히 안기는 모습이 기꺼워 그런 것이다.
다리를 쓰지 못하니 그가 안아 옮겨 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지.
어쩌면 그 사실 자체가 극도의 만족감을 주는 걸지도 몰랐다.
늘 허기지기만 했던 속이 처음으로 차올랐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싫은 기억만 골라 잃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믿어 주고 싶게 하는군.’
마침 오랜만에 정신 접촉을 한 뒤인지라 꽤 너그러운 상태이기도 했다.
불면증 탓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건 익숙한 일. 그런데 레그리아가 정신 접촉을 해 주는 날은 푹 잘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려 줄 생각은 결코 없다.
레그리아가 지금처럼 그의 품을 떠나지 않고 유순히 굴기만 한다면. 거부하지 않는다면…….
식도를 녹아내리는 듯한 이 지옥 같은 욕구가 줄어들까. 아니면 재미가 없어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가게가 즐비한 거리에 도착한 라히크는 요즘 인기가 있다는 카페 앞에 마차를 세우도록 했다.
이런 곳을 뭐 하러 다니며 시간 낭비를 하는 건진 모르겠으나 레그리아가 원한다고 하였으니.
“화, 황태자 전하…?!”
“2층을 비워라.”
“지금 당장 비우겠습니다! 여, 영광이옵니다! 오르시지요…!”
가게의 지배인이 놀라 뛰어나왔다. 이렇게 소란을 떠는 게 싫어 시중의 가게엔 결코 나오지 않거늘.
속으로 혀를 차며 레그리아의 무력한 몸을 안아 들던 라히크는 계단을 오르던 도중, 문득 그녀가 지나치게 가볍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요즘 식사를 하고는 있는 건가?”
“응, 환자식이지만.”
“뭐가 됐든 내 앞에서 더 먹도록.”
이 카페의 2층은 조슈아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한 그대로였다.
밤임에도 낮처럼 보이도록 화려하게 등불을 달아둔 거리가 한눈에 조망된다.
대부분은 이런 것을 좋아하니 이 카페에 오는 거라 하던데. 잘은 모르겠지만 레그리아 역시 기분이 괜찮은 듯했다.
굳이 그녀의 기분 따위를 신경 쓰는 것은 아니지만.
“라히크. 아까 그 초대장, 어떡할 거야?”
“가야 한다.”
“가기 싫은 거 아니었어?”
헐레벌떡 뛰어나온 주방장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세 번 절을 하여 경배를 바친 뒤, 또다시 미친 듯이 달려가 만들어 내온 디저트는 꽤 훌륭했다.
황제는 젊은 시절 첩을 끼고 평민인 양 길거리를 쉬이 돌아다녔다 하였으나 라히크는 일절 그런 적이 없었다.
그가 움직이는 곳은 언제나 귀족의 세상뿐.
레그리아가 원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리 없다.
그러니 디저트의 맛이 괜찮은 건 다행인 점이었다.
음식이 쓰레기 같았으면 오랜만에 좋아진 그의 기분이 다시 구덩이에 처박혔을 테니.
“모스그라토 공자는 수완이 뛰어나다. 오랜 세월 조각나 있던 음지의 조직들을 한데 모아 협회를 만들기까지 했지. 그들이 한 해에 한 번 모여서 회합을 가지는 날이 바로 모스그라토의 가면무도회다.”
“설마 조직 간부들이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모이기 위해 가면무도회를 개최하는 거야?”
“그런 셈이다.”
라히크는 레그리아가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것을 바라보다 눈가를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감기에 걸릴 것이 뻔한데 저런 찬 것이나 입에 넣고 있는 걸 보니 한심스러웠다.
이 여자는 도통 제 몸을 챙길 줄을 모른다.
일일이 손이 가니 집짐승이라 이르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느와르 영화도 아니고. 진짜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구나.”
“그건 무슨 말이지?”
“그런 조직에 관한… 책 같은 거 말하는 거야. 그리고 내 아이스크림 돌려줘.”
레그리아가 손을 뻗으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 여자는 늘 이렇게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 눈을 내리깔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아이스크림 대신 시럽이 뿌려진 애플파이를 내밀며 라히크는 종업원에게 손을 까딱였다. 아이스크림을 치워 눈앞에 보이지 말라는 뜻이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산더미다.”
“그거랑 아이스크림이 무슨 상관이야.”
“약해빠진 주제에 건강을 해칠 만한 걸 부러 집어넣지 말라는 소리다. 아니면 또 앓아눕고 싶은 건가?”
신황청을 나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아무리 온후한 날씨라 해도 겨울 중 그렇다는 것이지, 봄이나 여름에 비하면 쌀쌀맞았다.
언제나 적절한 온도가 유지되는 황성이나 신황청도 아니고 이렇듯 길거리에 있는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찬 것이라니.
라히크는 짧게 혀를 차고는 종업원이 막 내어오는 따뜻한 차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마, 말씀하신 홍차를 가, 가, 가져왔습니다! 계절에 맞게 생강을 넣어서… 그래서 아주 맛있을 겁니다요!”
저런 거라도 먹여 두면 차가워진 속이 다시 데워질 테지.
라히크는 이제 레그리아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지긋지긋했다.
가둬 두지 못할 거라면 아플 만한 일을 최대한 줄이는 게 옳다.
제 몫의 찻잔을 받아든 그는 잔을 들어 올리며 레그리아를 향해 턱짓을 했다.
“마셔라.”
“난 생강 싫어해. 그리고 이거….”
“감기를 낫게 하는 식품이다. 몸에 좋은 것이니 사양하지 말도록.”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 마시지 마!”
쾅!
레그리아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찻잔을 든 채 멈칫한 라히크는 눈가를 찌푸렸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 차에 아마 이상한 게 든 것 같아. 저 사람이…….”
레그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 라히크는 테이블을 뒤집었다.
* * *
레그리아가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종업원의 손이었다.
이런저런 디저트가 나올 때마다 하나씩 가져다 두는데 그릇을 놓는 손이 너무나 침착했다.
처음엔 대단히 프로페셔널한 사람인지라 황태자를 앞에 두고도 담담한 건가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입을 열기만 하면 말을 더듬는 게 아닌가.
몸과 말이 어긋나 삐걱대는 걸 가만히 보던 레그리아는 일단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책에서처럼 독 같은 걸 넣어서 주고 그럴까 싶어서.
그러나 라히크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신경은 온통 아까 그 종업원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녀의 안에서 뭔가가 파직거리며 튀는 듯한 불쾌한 기분.
‘주방장조차 나와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바짝 엎드렸는데… 일개 종업원이 황태자를 앞에 두고 손을 떨지 않는다고?’
그 사실 자체가 기분 나쁜 게 아니라, 몹시 의심스러웠다.
이렇게 생각하니 신분제 사회에 완전히 길들여진 것 같아서 다르게 생각해 보려 노력했지만, 그래도 역시 이상하다.
결정적인 건 종업원이 홍차를 가져다주었을 때였다.
솜털마저 일어날 정도로 서늘한 기운에 레그리아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라히크 따위, 죽어 버려도… 죽게 내버려 둬도.
‘괜…찮진 않아.’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건 살인 방조나 다름없다.
레그리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그냥 그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 차에 아마 이상한 게 든 것 같아. 저 사람이…….”
이렇게 말한들 믿어나 줄까. 증거라곤 그녀의 감뿐인데.
헌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라히크가 테이블을 옆으로 엎었다. 값비싼 도자기 그릇이 바닥과 부딪쳐 어지러이 부서지고 깨트려진다.
그 낙하물 아래에 가둬진 것은 홍차를 가져온 종업원이었다.
“내 비께서 네게 위험을 느꼈다는데.”
“켁, 저, 전하! 저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아, 않았습니다요!”
“정말 그렇다면 이걸 마셔 보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