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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134)
  • 54화

    오늘 손잡았으니까 손도 안 씻고 싶은데 그러면 지저분한 남자고, 지저분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씻어야겠지.

    마법이 있다면 처음으로 손을 잡은 이 시간을 도려내어 보관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레그리아가 그를 쳐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가망이 있으니까 밀어내지 않은 거겠지.

    레그리아는 분명 싫으면 싫다고 할 테니까.

    “1막이 끝났군. 마실 건.”

    “난 괜찮아. 움직일 수도 없고.”

    “불편하겠군. 따로 하녀를 불러 주겠다.”

    아, 형이 또 잘난 척하네.

    막이 내려오며 실내에 불이 켜졌다. 그 탓에 에화는 하는 수 없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아야만 했다.

    그게 영 불만스럽긴 하지만 이제 그는 슬슬 다음 수를 두러 넘어가긴 해야 하니까.

    2막이 오르기 전까지 쉬는 시간은 20분.

    자리에서 일어선 에화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대충 초대장을 꺼내 라히크를 향해 던졌다.

    “안면에 대고 초청장을 던지는 건 결투장을 던지는 것과 진배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지?”

    “난 결투장이어도 상관없어서 그런가 봐, 형.”

    “쯧. 천박한 것.”

    “형은 오든지 말든지 하고. 형수님은 꼭 와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합니다. 자, 초대장 따로 드릴게.”

    초대장은 모스그라토 가문의 상징인 검은색 봉투에 들어 있었다. 그가 직접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이름, 레그리아 로에르멜.

    라히크가 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짜증스럽지만 분하게도 참 잘 어울리기는 했다.

    레그리아.

    발음마저 예쁜 사람아.

    “매해 겨울이면 모스그라토에서 가면무도회를 열거든. 와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되니까, 형이랑 같이 와요. 즐거운 시간이 될지 어떻게 알아?”

    “…초청에 감사해.”

    레그리아는 저걸 건조하고 무심한 목소리라 생각하고 꾸며낸 걸까.

    그가 보기엔 가늘게 떨리는 손만큼이나 떨고 있는 목소리인데.

    ‘아, 역시 다 집어치우고 그냥 데리고 도망칠까.’

    유혹은 강렬했다.

    만약 그가 모스그라토의 이름을 입고 있지 않고, 대공께 은혜를 갚아야 하는 입장이 아니었더라면 가문 따위는 어떻게 짓밟히든 내팽개쳤을 텐데.

    “그럼 이만.”

    너무 헤어지기 싫지만, 깔끔하게 돌아서는 것이야말로 멋진 남자가 갖춰야 할 미덕이다.

    ‘늪’의 이동 능력을 통해 곧바로 자취를 감춘 에화가 다시 나타난 곳은, 수도의 로에르멜 저택 앞.

    그곳에서 그는 철로 된 울타리에 기대 혼자 훌쩍거리고 있는 여자를 쉽사리 발견했다.

    지난 2주간 꾸준히 드나들며 얼굴도장을 찍어 뒀기에 여자가 그를 발견하는 것 역시 금세였다.

    “아가씨, 왜 울고 있어?”

    “아… 시누엘!”

    “응, 잘 있었어?”

    에화의 눈꼬리가 사르르 휘어졌다. 음흉한 일을 꾸밀 때마다 그는 그렇게 웃었다.

    이 여자는 모르겠지만.

    “아가씨. 가면무도회 안 올래?”

    철망 사이로 끼워 넣어지는 새카만 초대장에 울고 있던 지젤의 눈이 커다래졌다.

    “올 땐 가면을 꼭 지참하는 거, 잊지 말고.”

    “하지만… 공작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아니, 허락할 테니 걱정 마. 그걸 가져가서 보여드려.”

    벨리그레엄의 세간에는 이런 불문율이 있다.

    모스그라토 가문에서 보낸 검은 초대장을 받으면 그 안에 적힌 요구 조건을 꼭 지켜서 참석해야 한다.

    사소하게는 귀걸이 색깔부터 드레스의 재질. 연인과 동반으로 오라거나 따로 오라거나와 같은 것까지도 조건일 수 있다.

    이번에 로에르멜 가문에 보낸 초대장은 저것 하나뿐.

    그리고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로에르멜의 성을 지니고 있는 모든 이들이 전부 참석할 것.

    그러니 공작은 지젤을 데려올 수밖에는 없었다.

    ‘조건은 채워졌고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인가…….’

    원하는 대로 착착 진행이 되고 있지만 그래도 샘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라히크와 레그리아를 그냥 두려니 훼방을 놓고 싶네.

    “내가 더 잘 안아 들 수 있는데.”

    불퉁해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에화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곤 오랜만에 길거리를 걸었다.

    남모르게 끼워 준 꽃반지를 그녀가 알아차리고 내내 그에 대해서만 생각해 주기를 바라면서.

    * * *

    오페라의 2막은 어떻게 시작해서 언제 끝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시야를 사로잡는 멋진 공연과 귀를 간지럽히는 노랫소리를 그저 멍하니 받아들이며 레그리아는 두 손을 제 허벅지 위에 두었다.

    라히크와 에화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저를 향해 그런 짓들을 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덕에 레그리아는 또 한 가지를 배웠다.

    그녀는 성에 무지한 만큼 면역이 없다.

    그런 상황을 스스로 거머쥐고 통제하기엔 아직 많이 모자랐다.

    ‘그야, 해 본 적이 있어야지.’

    에화가 장난치듯 부드럽게 쥐어 왔던 왼손엔 아직까지도 열기가 잔존해 있었다. 반면 라히크가 쥐었던 오른손은 피가 통하지 않아 여전히 저렸다.

    닮은 듯 전혀 다른 두 사람.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

    아마도, 호적수.

    에화는 라히크의 위압감 앞에서도 조금도 눌리지 않았다. 그 완벽한 여유에 오히려 라히크 쪽이 초초해한다고 느껴졌을 정도다.

    ‘만약 에화가 나를 도와준다면….’

    수월하게 라히크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소매가 긴 코트 아래에서 제 엄지를 비틀던 레그리아는 문득, 왼쪽 새끼손가락에 뭔가 아주 가볍고도 부드러운 것이 끼워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뭐지?’

    너무 마음이 복잡해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한 번 인지하고 나니 몹시 신경이 쓰였다.

    식물의 줄기인가? 위쪽에 달린 건 아마도 꽃잎 같은데.

    ‘……꽃반지?’

    에화는 꽃반지를 만들 줄 아는 걸까?

    굉장히 위험하면서도 부유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차림을 하고 다니긴 하지만 에화에게는 천진난만한 면이 있었다.

    꽃반지 같은 걸 만들 줄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달까.

    얼른 혼자가 되어 꽃반지를 확인하고픈 마음에 그녀는 더더욱 극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만약 꽃반지로 만들어준 꽃의 꽃말이 에화의 대답이라면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끝났군. 이제 어디로 가고 싶지?”

    “아… 길거리. 길거리를 보고 싶어. 내가 황태자비가 될 거라고 했지만 이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걸.”

    “일리가 있군.”

    라히크가 다시 그녀를 안아 들었다. 혹시 꽃반지를 들킬까 싶어 레그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순순히 안겨 목에 팔을 감았다.

    이러면 라히크는 절대 그녀의 손을 보지 못할 테니까.

    “오늘따라 기분 나쁘게 유순한데.”

    마차에 도착하여 그녀를 내려놓은 라히크는 그 상태 그대로 문을 붙잡고 섰다.

    황태자가 마차에 오르지 않고 있자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물론 라히크는 그러든가 말든가 그녀를 훑어 내리고 있었고.

    “당신은… 대체 문제가 뭐야?”

    이 한 마디만큼은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어린 시절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이렇게 배배 꼬인 인간으로 자라난 거지?

    “네 작은 머릿속에 어떤 덩굴이 자라 있는지 열어보고 싶을 뿐이다.”

    “머리를 열면 사람은 죽어.”

    “그래, 그러면 알아낼 수도 없게 되겠지. 네가 모스그라토 공자와 어떤 사이인지…….”

    위험하다. 등골이 오싹한 냉기가 훅 끼쳐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설 뻔했다.

    라히크는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더니 이내 뒷머리 사이로 파고들어 당겼다. 마치 키스를 할 것처럼 입술을 가까이하자 훔쳐보던 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 상당히 별로였지만 라히크가 이러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했다.

    아마 사람들 앞에서 둘 사이가 아주 좋다는 걸 보여주려는 쇼겠지.

    “혹시라도 도망치려거든 꼭꼭 숨어라. 머리 터럭 하나 내보이지 말라. 잡히거든 발목을 으스러트린 뒤 네 배 속이 불어 터지도록 씨를 뿌릴 테니.”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자리에 느른한 호흡이 맴돈다.

    위협과 경고. 라히크의 언어는 오직 그것으로만 이뤄져 있어 가엾다. %뭐든 추궁하면 되는 인생이었겠지. 협박해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삶은 결코 진짜 귀한 것은 갖지 못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라히크가 원하는, 그가 만족할 만한 행동을 계산하여 내어주는 것 뿐.

    레그리아는 오른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쥐고는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

    시켜서 한 게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먼저 한 입맞춤은 이게 처음.

    사실은 몇 초도 되지 않는 가벼운 접촉이라 입맞춤이라 부르는 것도 우스웠다.

    허나 너는 항시 이걸 원하여 나를 쥐어채지 않았던가.

    나의 굴종을.

    조심스레 거리를 벌리며 떨어져 나온 레그리아는 이제 곧 라히크가 그녀를 마구잡이로 잡아끌어 강제로 키스를 하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는 보통 그러했고, 그게 라히크라는 사내였으니.

    “…….”

    어?

    그런데 왜 아무런 행동이 없는 거지.

    의아함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라히크가 시선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그 라히크가, 시선을 피했다고?’

    너무 큰 충격에 입을 벌렸지만 나오는 말은 없다. 그 사이 라히크는 그녀의 면전에 대고 문을 닫아 버렸다.

    마부더러 말을 한 마리 풀라고 지시하는 걸 보니 별도로 말을 타고 갈 모양인데… 굳이 왜?

    ‘그냥… 조교하려고 한 행동일 뿐인데.’

    그렇게 그녀가 먼저 다가가면 놀라기라도 할 테니 몇 초나마 못 된 입을 다물고 의심을 거둘 거라 여겼다.

    헌데 효과가 생각보다 크다.

    제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꽃반지를 만지작거리던 레그리아는 라히크가 마음을 바꿔 마차 안에 들어오기 전, 서둘러 확인하기로 했다.

    에화가 선사한 반지의 꽃은 물망초.

    그 뜻은 ‘나를 잊지 말아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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