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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134)
  • 53화

    나직하게 속삭이자 곧바로 신경질적인 대꾸가 돌아온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묻혀 목소리가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았다.

    이 나라 황태자가 저렇게 황당한 말이나 한다는 걸 모두가 다 알아야 할 텐데, 아쉽게도.

    레그리아는 고개를 내젓곤 다시 극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어쨌든 오페라가 끝나면 이걸 주제 삼아 라히크와 대화를 나누기는 해야 할 테니.

    “……?”

    그런데 그때였다.

    어둠을 틈타 누군가가 손을 잡아 온 건.

    ‘읏.’

    오른손을 쥔 라히크가 곧바로 그녀의 손목 안쪽의 여린 살을 간질여왔다.

    은근히 살결을 덧그리는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다.

    여전히 따분하다는 얼굴로 이따금 한심하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는데 그러면서 남의 손은 왜 주물럭거리는 건지.

    심지어는 검지와 엄지를 붙여 고리를 만들더니 그걸로 그녀의 늘어트린 손가락 사이를 빠르게 드나드는 행위에 레그리아의 뺨이 덧없이 붉어졌다.

    ‘변태 새끼! 최악이야.’

    아무리 그녀가 경험 없다지만 저게 뭘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는 아니다.

    그녀를 슬쩍 돌아본 라히크는 피식 웃으며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숙하게 굴어라. 모두가 쳐다보고 있으니.”

    “이건 당신이…!”

    “치마 속을 파고든 것도 아닐진대 유난은.”

    때리고 싶다. 진심으로 딱 한 대만.

    어두우니 여기서 허벅지를 한 번만 꼬집으면 안 되려나.

    곧바로 응징을 하지 못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유치하게, 십 대 소년도 아니고! 황태자씩이나 되어서는 공공장소에서 무슨…….

    ‘흣!’

    그런데 다음 순간, 라히크 쪽에 쏟아진 신경을 툭 하고 건드는 다른 손이 있었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 크게 움찔한 레그리아는 슬그머니 새끼손가락끼리 엮어오는 손길에 깨어난 뒤로 처음으로 제 심장 박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말았다.

    ‘양쪽에서…….’

    라히크가 손가락을 엮어 손을 꽉 잡아 왔다.

    바위처럼 차갑고 단단한 손이다. 사람 몇을 죽였을지 모를, 피가 묻은 것.

    마음이 불편해 빼고 싶었지만 라히크의 주변에 깔린 기운이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달려들기 직전의 맹수처럼 수풀 사이에 몸을 감추고 노려보고 있는 느낌. 사냥꾼의 덫도, 화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보다 더 기민한 몸놀림과 육감을 지녔으니.

    여기서 손을 빼내면 방금 심장 박동이 빨라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되니……까.

    “아…!”

    양쪽에 앉은 두 남자가 동시에 손바닥 안쪽을 간질인 탓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옅은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들었을까 봐 고개를 휙 들어 올렸으나 다행스럽게도 지적하는 자는 없었다.

    온몸이 오싹거린다. 귓불까지 뜨끈하게 열이 오른 레그리아는 이걸 얼마나 더 견뎌야 할지 고민했다.

    아직 오페라는 1막도 끝나지 않았는데.

    ‘뭐라도… 뭐라도 좋으니, 신경을 쏟을 만한 게 필요해.’

    그러지 않으면 이 기묘한 긴장감에 곧 숨이라도 헐떡거리게 될 것 같다.

    오늘 외출을 생각했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에화의 기운은 이런… 모양이구나.’

    레그리아는 자신의 왼편에서 뭉근히 흘러나오는 기운에 일부러 집중을 해 보았다. 이미 오페라 따위는 아예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눈을 감은 그녀는 이윽고 에화의 기운이 가진 향기를 맡았다.

    영혼에게도 고향이라는 게 있을까.

    태곳적, 맑은 영으로서 태어났던 땅이 그리워지는 착각이 든다.

    천년도 넘게 자란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지고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 온갖 새와 뱀이 공존하는 곳. 먹이 사슬은 결국 순환하니 삶과 죽음 모두가 아름답다.

    굳이 따지자면 에화는 탁 트인 초원보다는 역시 정글에 가까운 사내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속에서 고요히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는 악어.

    그 후덥지근한 땅에서 악어는 곧 죽음을 뜻하는 생물이지만 놀랍게도 악어는 작은 새와 공존할 줄도 안다.

    나기를 흉포한 포식자로 났으나 고요히 잠겨 있는 자.

    건드리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을 죽음.

    레그리아는 에화의 기운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다행이야.’

    긴장감이 조금 사그라지자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고민하던 레그리아는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탑.’

    왼쪽 검지를 조심스레 움직여 에화의 손바닥 안쪽에 글씨를 쓴다.

    긴 문장이 아니라 단어 하나만 쓰면 되는 것이니 어렵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커다란 동그라미 하나.

    가 봤다는 뜻.

    그런데 그러자마자 에화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아, 귀여워 죽겠네.’

    어쩌지 정말.

    레그리아는 명백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가 키득대자 오페라에 푹 빠져 있던 관객들이 사방에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화는 어깨를 들썩거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탑에 다녀왔다는 건 이미 소문으로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토록 살고 싶어 하는 여자가 호수에 뛰어들 리가 있나.

    그 탑은 황태자의 명으로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안엔 먼지가 상당했다. 그가 걸레와 먼지떨이를 들고 대충 치워 놓긴 했다지만 그래도 십 년 넘게 묵은 때를 다 벗겨낼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당연히 레그리아의 온몸에 먼지가 묻었겠지. 라히크는 눈치가 빠르니 추궁을 할 게 뻔하고, 어쩌면 탑에 갔음을 바로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호수에 뛰어든 거다.

    이 똑똑하고 앙큼한 여자는.

    ‘그런데 내게 탑에 가 보았다는 걸 알리는 건….’

    동그라미.

    방금 있었던 일을 돌이키자마자 웃음이 터져 그는 필사적으로 혀를 깨물어 참아야만 했다.

    다행이라면 그는 애초에 미친 새끼로 유명하다 보니 이렇게 갑자기 웃어 재껴도 레그리아와 자신의 사이를 의심하거나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어, 그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다리를 꼰 채 불량한 자세로 앉은 에화는 그대로 허리를 틀어 레그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차피 그는 오페라 같은 고상한 문화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의 흥미를 끄는 건 저급하고 천박한 도박 같은 것뿐.

    보다 자극적이고 위험한 것에 끌리는 건 그의 본성이다.

    그런 의미로 제 형의 아내가 될 여자와 놀아나는 건 그 무엇보다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놀기만 할 건 아니고.

    첫눈에 반했다 해서 마음이 가벼운 건 아니다.

    에화는 생긴 것과는 달리 사랑에 몹시 진지한 편이었다.

    사랑의 기준은 무조건 첫눈에 반할 것.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기적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레그리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레그리아가 모든 것의 처음이라고.

    ‘아, 나한테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옆얼굴… 귀여워.’

    뺨을 쿡 찔러서 그를 돌아보게 만들고 싶다. 그런 다음엔 우리 집에 같이 가자고 꼬드기고 싶었다.

    2주씩이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여전히 몸이 별로 좋지 못한 상태일 테고, 지금도 많이 피곤하겠지.

    역시 먹는 것부터 입는 것 씻는 것까지 전부 그가 다 해 주고 싶었다.

    싫다고 하면 얌전히 물러날 테지만 그래도 애교는 한 번 피워 봐야지.

    왜냐하면 한 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으니까.

    ‘같이 살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완전무결하게 그의 곁으로 데려오기 위해선 참아야 한다. 그걸 아니까 괴로웠다.

    지금 당장 그녀가 앉은 의자 아래만 늪으로 만들어 둘만의 공간으로 데려가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런 짓은 해 봤자 소용없지.

    그가 원하는 건 첫눈에 반한 여자의 모든 것이니까.

    그래서 에화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렸다.

    때마침 레그리아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잘 해 주었으니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듯했다.

    속으로 키득대던 에화는 레그리아의 손바닥 안쪽에 어떤 도형을 그렸다.

    양쪽이 볼록하고 아래는 뾰족해서 꼭 날개를 붙여둔 듯한 특이한 모양.

    벨리그레엄엔 없는 도형이지만 신성계에는 이게 사랑을 뜻하는 의미라고 배운 적 있다.

    ‘하트를 알아봐 주려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건 사실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남몰래 그려 보여준 거였다. 아버지는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해서 당황했다고 하셨고.

    그래도 두 분 다 서로를 보며 첫눈에 반하는 바람에 자신이 무사히 태어날 수 있게 되었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비밀 한 점 없이 모든 이야기를 하셨고, 어머니는 다 받아들인 상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갖기를 희망했다.

    원체 연약해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니 아이라도 갖고 싶다고 하셨다던가.

    덕분에 지금 이렇게 레그리아의 옆에 앉아 무덤덤한 척하는 얼굴을 감상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아, 오늘은 가는 길에 엄마 무덤에 들러야겠다. 꽃도 좀 가져다 놔야지.’

    요즘 통 못 가서 쓸쓸해하실 텐데.

    오페라가 하도 지루하다 보니 아무렇게나 생각이 튄다.

    이렇게 끈질기게 쳐다봐도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려 주지 않는 레그리아 쪽이 연주도 훨씬 더 잘하는데.

    이 오케스트라 악단은 피아노 연주가 가장 별로였다.

    ‘역시 갈아치워야지.’

    그는 오늘부로 이 오페라 극장의 후원자가 되었다.

    레그리아가 여기 온다는 말을 듣자마자 거액을 싸 들고 가서 극장에 간섭할 권리를 따냈거든.

    그러니 오케스트라 단원을 갈아치우는 것도 가능하지. 마음대로 좌석표를 바꿔 레그리아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도 가능하고.

    ‘돈 벌어 두길 잘했지.’

    낮게 흥얼거리며 레그리아의 손가락 사이를 간질이던 에화는 소프라노의 노래가 절정에 다다른 바로 그때, 그녀의 손을 홱 잡아 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끼워 넣어 꼭 쥐자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레그리아가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지.

    ‘가엾게도. 손끝이 차네.’

    형만 없었어도 손가락 하나하나에 뽀뽀를 해 줬을 텐데.

    그런 장면을 상상하자 좋아서 발을 구를 뻔했다.

    아, 아직은 짝사랑이지만 꼭 쌍방으로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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