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34)
  • 52화

    말을 해도 꼭.

    한마디 한마디가 밉살스러운 것도 재주였다.

    레그리아는 기분이 상한 티를 내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코트라도 주려고?”

    “기다려라.”

    선물을 어디에 둔 건지, 라히크는 그녀를 혼자 두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레그리아는 진심으로 호흡을 내뱉을 수 있었다.

    ‘좋은 척 연기한다는 건 힘든 일이구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라히크와 연애하는 기분을 내야 한다니. 입에서 탄식이 튀어나오려는 걸 막는 게 제일 힘들었다.

    그녀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임신을 시킨 뒤, 아이를 낳게 하려 한 몹쓸 남자다. 10년 내에 죽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 그녀가 내뱉는 미래에 대한 희망들을 느긋이 들었겠지.

    무엇보다 곱씹을수록 화가 나는 건 따로 있었다.

    라히크는 그녀에게 ‘황태자비’가 되라고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짝’이 되어 달라곤 하지 않았다.

    짝이 죽으면 신성 기사 역시 폐인이 되니까 그런 거겠지.

    약삭빠르기는.

    ‘애초에 나를 사랑해 볼 생각조차 없는 남자였던 거야.’

    그녀가 양순하게 굴자 라히크의 태도 역시 무두질한 가죽처럼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의 성질을 건드리면 또다시 이 관계는 허물어지고 말겠지.

    거기에 적응하게 되고 포기하게 되는 과정이 바로 폭력에 익숙해지는 거였다.

    아주 약간의 좋은 기억을 붙들고 거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바보 같은 짓.

    ‘나는 안 해. 그렇게는 안 살 거야.’

    누가 모친처럼 살 줄 알고…….

    “레그리아.”

    달칵.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러더니 눈앞에 새하얀 모피 코트가 불쑥 들이밀어 졌다. 보기만 해도 부드러워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걸치고 안겨라.”

    “여우 털…?”

    “옷이 봐줄 만하지 않으니 그런 거라도 걸쳐서 가려야지.”

    이 옷이 뭐가 어때서 자꾸 싫다고 하는 건지.

    라히크가 주는 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단칼에 거절하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된다. 라히크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는 일이 될 테니.

    대신 레그리아는 고맙다거나 마음에 든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순종적으로 코트를 걸치기만 할 뿐.

    새하얀 모피 위로 불그스름한 머리칼이 흩어졌다.

    꼭 설원을 태우는 불길처럼.

    “세상에, 황태자 전하시잖아요?”

    “안겨 계신 건… 황태자비 전하? 살아 계시는군요?”

    “맙소사!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요? 두 분 사이가 저렇게나 좋았나요?”

    “어머나…! 제가 다 두근거리네요!”

    오페라 극장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귀부인들이 눈길과 함께 소곤거림을 던졌다. 몇몇 남성들은 입을 떡 벌린 채 기절초풍할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긴, 안겨서 들어오는데 쳐다보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그녀라도 한 번쯤 눈길을 힐끔 보낼 것 같았다.

    눈길을 받는 대상이 그녀라는 게 당면한 문제지만.

    “다들 쳐다보는 게 싫으냐.”

    “티가 나?”

    “제법.”

    “다음엔 기사한테 한번 안겨서 회의실 같은 곳에 들어가 봐. 어떤 기분인지 느낄 수 있을걸. 광대가 된 것 같아.”

    그러잖아도 민망한데 굳이 한 마디를 얹기에 톡 쏘아붙이자 라히크가 웃음을 흘렸다.

    잘생긴 얼굴에 걸쳐진 근사한 웃음에 모습에 구경하던 귀부인들이 ‘어머머’하고 외친 건 당연한 일.

    그녀의 주장대로 황족 전용 박스석이 아닌 관계자석에 도착한 라히크는 레그리아를 자리에 앉혀 주며 다정히 속삭였다.

    “그나저나 꽤 편리하군.”

    “뭐가?”

    “싫은 기억은 잊고 필요한 것들만 남긴다니. 그보다 더 편한 변명이 또 있을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알 텐데. 언어와 문화, 생활 습관은 기억하고 싫은 것만 쏙 빼서 잊었다는 게 말이 되나.”

    라히크가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두 눈은 차게 식은 채로. 레그리아는 그런 그를 마주 보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탐색하는 시선이 싫다.

    무슨 말을 하든 의심부터 하고 보는 건 역시 취향이 아니다.

    라히크는 아마 그런 삶을 살았어야 했겠지만… 그래서 뭐. 싫은걸.

    “어, 실례.”

    그런데 그때였다.

    입을 맞추기라도 할 것처럼 가까이 붙어 있던 둘 사이에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불쑥 들어왔다.

    침입자는 낯설었으나 역설적으로 낯설지 않기도 했다.

    그녀는 늪 속에 몸을 감춘 악어 같은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여기서 형을 다 만나고. 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형이 이런 값싼 좌석에 앉아?”

    유들유들한 말투, 통통 튀는 어조. 사람의 내면까지 스며드는 독안개처럼 간살거리는 분위기.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아니까.

    라히크는 몹시 불쾌한 얼굴로 허리를 폈다. 예의상 걸어두는 미소조차 싹 사라진 채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지?”

    “후원자가 후원하는 곳에 오는 게 뭐가 이상해?”

    “음악에 문외한일 텐데.”

    “형도 참. 내가 배우려고 들어서 배우지 못하는 게 뭐가 있다고. 갑자기 관심이 가서 공부 좀 했지. 뭐, 난 황족이 아니라 멋들어진 박스석 같은 게 준비되어 있진 않지만.”

    유쾌한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라히크에게서 새어 나오는 기운은 차가워졌다. 반면, 에화에게선 열기가 느껴졌다.

    “근데 이분이 그 유명한 비전하야? 형수 될 분인데 나도 소개 좀 시켜 주지 그래?”

    아, 이젠 눈을 마주쳐도 되겠지.

    제 앞에 쪼그려 앉아 꽃받침을 한 에화는 먼젓번과 같은 새카만 수트 차림이었다. 가장 윗단추는 풀어 낸 채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게 답답해 보이지 않고 좋다.

    거기에 털로 된 코트를 걸치고 있는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올려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꼭 그날, 도시락을 나눠줬던 첫 만남처럼.

    “시누엘 모스그라토라고 합니다. 처음 뵙네요, 형수님.”

    “모스그라토 공자로군. 반갑네.”

    “네, 뭐. 그런데 발목이 부러지기라도 했나 봐요. 혼자 걷지도 못해서 안겨 오는 걸 보면.”

    미묘하게 적의가 어린 말투다.

    헌데 우스운 건 싱글거리고 있는 에화의 주변을 휩싼 열기는 더더욱 강해지기만 한다는 점이었다.

    모스그라토 가문은 황태자와 적대하는 가문.

    당연히 겉으로는 가시 돋친 태도를 취하는 게 맞겠지.

    ‘기운은 전혀 아니라 문제지만.’

    그리고 이 순간, 레그리아는 깨달았다.

    타인의 열기와 냉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보통 좋은 사람일지 나쁜 사람일지를 파악하려면 태도와 눈빛, 표정 같은 정보를 수집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건 너무 쉽게 바뀔 수도, 바꿀 수도 있는 거였다.

    그녀만 해도 연기 중이지 않은가. 그것도 제법 자연스럽게.

    ‘앞으로는… 내게 풍겨져 오는 기운을 믿는 게 좋겠어.’

    라히크와 에화는 서로 몇 마디를 더 나누더니 이내 자리에 앉았다. 기분이 상한 기색이 확연한 라히크는 그녀의 오른 쪽에, 싱글거리는 에화는 그녀의 왼… 쪽에?

    “아아, 자리가 하필 이렇게 됐네. 둘의 데이트를 방해해서 미안, 미안.”

    “미안하지도 않은 어조로 그딴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이크, 형 화났네. 무서워라!”

    에화가 히죽거리자 라히크가 미간을 좁히며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둘을 돌아보던 레그리아는 일단 라히크 쪽으로 몸을 틀어 속삭였다.

    그녀는 지금 에화를 처음 만났다. 그러니 궁금해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사이가 나빠?”

    “좋아 보이나.”

    “엄청 나빠 보이긴 하는데. 동생분? 하지만 당신은 외동이잖아.”

    “황족이 특별히 마련된 박스석에 앉는 건 개새끼들 틈에 섞이지 않기 위해서다. 오늘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지만… 두 번은 없다.”

    그거 다행이네.

    내겐 이 한 번의 기회가 필요했을 뿐인데.

    라히크는 에화에 대해 더 설명을 해 주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에화의 본명이 ‘시누엘 모스그라토’라는 걸 알게 된 것만 해도 큰 수확이니까.

    그리고 그 이름은 분명, 그녀가 꼽아 두었던 목록 중 제일 윗칸에 있었다.

    이윽고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무대에만 불이 켜졌다.

    레그리아는 두 손을 늘어트린 채로 정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처음엔 이렇게 두껍고 긴 코트를 입으라고 강요하는 게 싫었지만, 지금은 다행이었다. 소매가 길다 보니 에화가 만약 뭔가를 살짝 쥐여 준다고 한들, 들키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아, 그 탑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

    그 안에 준비되어 있던 것은 다 뭐고 사람이 살던 흔적은 또 뭔지. 혹시 거기에 어린아이가 있었느냐고도 묻고 싶었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갔느냐고도.

    하지만 라히크가 바로 옆에서, 그것도 몹시 기분이 나쁜 상태로 있을 땐 함부로 시선조차 줄 수 없겠지.

    ‘오페라의 내용이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네.’

    화려한 의상과 샹들리에. 노래하는 가수들. 웅장하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같은 것이 그저 희미한 잔상에 불과하다.

    그건 라히크 역시 딱히 다르지 않은지 날카로운 옆얼굴에 따분함이 묻어났다.

    “먼저 극장에 가자고 해놓고 그렇게 무료한 표정을 짓기야?”

    “설마 극장에 가자고 한 게 진짜 오페라나 보자는 뜻으로 알아먹을 줄은 몰랐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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