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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134)
  • 51화

    속삭임이 끝나기도 전, 라히크가 으르렁거렸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아니, 그냥. 너무 피곤해 보여서. 기운도 별로고… 그러니까, 정신 접촉 말이야.”

    레그리아는 ‘우리 사이에 그것 말고 뭐가 더 있느냐’라는 투로 대꾸했다. 그리고는 라히크의 가슴을 꾹 눌러 밀었다.

    “내가 앓는 동안 뭔가 일이 많았던 모양인데. 가라앉혀 줄게.”

    담담한 제안이었다. 하려면 하고, 싫으면 말고 정도의 무게를 지닌. 그에 라히크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짓씹듯 내뱉었다.

    “네가 나를 가지고 놀려 드는구나.”

    “그래서, 싫어?”

    “어울려 주지.”

    여전히 믿지는 않지만 넘어가 주겠다는 투였다.

    그리고 레그리아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럼 할게.”

    제아무리 거대한 몸집을 지닌 생선인들 낚싯바늘을 꽂아 넣기만 하면 한갓 낚시꾼에게도 이길 기회가 있다.

    그리고 무력해 보이는 그녀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낚싯바늘은 바로 이거였다.

    정신 접촉.

    * * *

    ‘너는 정말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날 새벽, 제 곁에서 잠든 라히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런 거였다.

    짧은 정신 접촉이 끝난 뒤. 많이 피곤하기라도 했는지 라히크는 그녀를 끌어안더니 그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밀어내도 꿈쩍도 하지 않기에 포기하고 침대를 나눠 쓰는 수밖에는 없었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라히크의 숨소리를 좇으며 레그리아는 누운 채 바닥으로, 바닥으로…….

    그날의 그 호수 밑바닥에 빠져드는 것만 같은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도저히 잠이 오질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걷지 못한다고 해 두었는데 움직여서 될 일도 아니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깨어 있는 것뿐.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에는 무릇 생각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제 목을 조른 남자를 옆에 두고 있는 밤에는 특히 더.

    ‘오늘 내 연기는 완벽했던가?’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다.

    모친에게 그토록 강요당했던 감정 통제가 이런 위기의 상황에 도움을 줄 줄이야.

    그런다고 한들 모친에게 고마운 마음 따위 조금도 들지 않지만 다행이기는 했다.

    ‘정신 접촉 횟수가 늘어날수록 짧은 시간에 빠르게 풀어낼 수 있게 돼.’

    오랜만에 들어간 라히크의 내면은 누가 칼로 들쑤셔 놓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기껏 풀어 둔 털실이 죄 다시 엉겨 있는 걸 보며 레그리아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일단 바닥에 주저앉아 차근히 실을 풀어내다가 깨어나 보니 라히크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무방비하게.

    이대로 찌르고 달아나도 모를 것처럼.

    그런 생각은 유혹적이긴 했지만 애초에 시도할 도구가 없다.

    라히크는 그녀의 침실에 들어올 때면 늘 칼을 풀어 기사에게 맡기니 빼앗아 볼 만한 것도 없었고.

    “잠든 얼굴은 제정신인데.”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던 레그리아는 자신이 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음을 한 박자 깨달았다.

    “건방지군.”

    “깼어?”

    “누구든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면 깰 거다.”

    목이 잠겨 낮아진 음성이 오싹했다.

    라히크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순순히 딸려가며 레그리아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하기 위해.

    “일주일 정도 후에 오페라 극장에 가는 건 어떤가.”

    “오페라 극장?”

    “재워 준 대가다.”

    라히크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어울리지도 않게 다정한 손길이라 소름이 끼쳤지만 레그리아는 숨소리 하나 바뀌지 않았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데이트하자.”

    데이트라는 단어에 라히크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건 일시적인 반응일 뿐. 그는 곧 귓바퀴를 스쳐 턱을 쓸더니 그녀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어떻게 반응할지 보겠다는 듯.

    “당신은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잖아.”

    “그래서.”

    “알아가야지. 결혼 전에 데이트를 하는 건 서로에 대해 알기 위해서니까.”

    “어렵기도 하군.”

    “해 줄 거야 말 거야?”

    “성질부리지 마라.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라히크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여전히 손은 목 줄기를 움켜쥐고 싶은 듯 위험한 곳에서 오가면서.

    ‘너는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구나.’

    하지만 동시에 치열하게 욕정하고 있다.

    레그리아는 제 허벅지에 은밀히 닿아오는 그것의 윤곽에 희미하게 웃었다.

    이런 걸 더럽다고만 생각하지 말자. 결혼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몸을 섞을 수 있겠냐는 고루하고도 정숙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탈출을 위해 이용하지 못할 것은 없다.

    라히크가 원하는 게 이 몸뚱이라면 오히려 얼마든지 내어주겠다.

    마음은 단 한 조각도 주지 않겠지만 그녀는 완벽하게 ‘그를 좋아하는 척’ 연기해 이 남자가 끝내 제 위에 올라타도록 유도할 계획이었다.

    언젠가 닥쳐올 그의 추락이 죽도록 아프도록 기원하면서.

    아무리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 하더라도 사과조차 없는 그는.

    산산조각이 나야 마땅했다.

    * * *

    라히크와 한 침대를 나눠 썼던 그 날 이후로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닥쳤다. 일주일간은 창문조차 열 수 없을 만큼 추웠으나 오늘은 기온이 제법 온후하다.

    신황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처음 나가 보기에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비전하. 정말 이 정도 드레스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딱 좋아.”

    오늘 레그리아는 자신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녹색 치마 안에 흰 블라우스를 넣어 입었다. 연회용 드레스는 아니고 남작 영애 정도 되는 이들이 입을 법한 원피스였다.

    예쁨보다는 편리함에 치중되어 있고, 시중 없이 혼자서도 입을 수 있는 류의 옷.

    시중에서는 가정 교사용 복장이라 부른다고 한다지.

    에오스는 영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레그리아는 딱히 자신의 의견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모자를 씌워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모자의 크기 역시 작고 실용적이다. 불편하지 않고 깔끔해서 아주 좋았다.

    옅은 화장까지 끝낸 그녀는 앉은 채로 기다렸다.

    라히크가 문을 열고 나타날 때까지.

    “안 어울리는군.”

    “칭찬 고마워.”

    이윽고 나타난 그는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벗고 다시 입으라곤 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지.

    오늘의 데이트는 레그리아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이런 싸구려 좌석에서 관람하는 게 취향인가?”

    그녀에게 다가온 라히크가 표를 내밀며 툴툴거렸다. 그걸 받아든 레그리아는 새침하게 대꾸하며 표를 확인했다.

    “싸구려가 아니야. 관계자석에 앉으면 오케스트라를 볼 수 있잖아.”

    “그게 목적이었군.”

    한 공간에서 숨도 쉬기 싫은 남자와 오페라를 본다니, 끔찍하기도 하지.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에화가 접촉해 올 수도 있으니까.

    에화가 그녀에게 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 때까지 레그리아는 라히크의 기분을 맞춰 외부 행사에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득이 뭐 하나라도 있어야지.’

    이 나라의 오케스트라는 어떻게 연주를 할까.

    그걸 기대하는 것으로 라히크와의 외출이 견딜 만했다.

    “가지.”

    “응.”

    상체만 살짝 돌려 그의 목에 팔을 걸자 라히크가 익숙하다는 듯 그녀를 들어 안았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다, 다녀오세요, 비전하!”

    에오스와 셀린의 인사를 뒤로하고 바깥으로 나가자 거대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겉은 별반 특이할 게 없었지만, 안은 제법 화려하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소파가 없어?’

    응당 소파가 있어야 할 듯한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건, 침대였다.

    쿠션이 여럿 쌓인 자리에 그녀를 앉힌 라히크는 레그리아의 표정을 보더니 픽 웃었다.

    “왜. 긴장이라도 했나?”

    “마차 문을 열었는데 침대가 나오면 누구라도 그럴걸. 이상한 짓, 하기만 해 봐.”

    “글쎄. 남의 배려를 이상하게 매도하는 게 지금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당신은 말을 타고 와. 이 안에 들어오지 말고. 허락 안 해.”

    레그리아는 일단 아무 쿠션이나 집어 끌어안고 라히크를 노려보았다. 그거만 안고 있으면 방어가 된다는 듯이.

    그런 그녀를 훑어 내리던 라히크는 짐짓 정중한 체 허리를 숙여 레그리아의 귓전에 입술을 눌러 붙였다.

    “퍽 즐거운 이동이 되겠군, 그래.”

    * * *

    결론적으로 라히크는 말을 타고 따로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억지로 찍어 누르려고 한 것도 아니다.

    라히크는… 그녀를 베개로 사용했다.

    “네 곁에 있으니 잠이 오더군.”

    “누가 들으면 밤에 한숨도 못 잔 사람인 줄 알겠어.”

    “그렇다고 답하면 순순히 재워 줄 텐가?”

    “아니? 누구 마음대로?”

    이런 대화가 오가긴 했지만 결국 라히크는 제멋대로 했다.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것이다.

    마차의 벽면에 등을 기댄 레그리아는 한숨을 삼키며 어쩔 수 없는 척 정신 접촉을 시도했다.

    이 상황이 싫은 것과 정신 접촉을 연습할 기회가 생긴 건 별개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이 힘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

    오늘 라히크는 늘 입던 흰색 제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좀 더 두꺼운 재질의 붉은색 제복이다.

    훈장이 없긴 하지만 제복인 건 마찬가지였다.

    ‘간소하게’ 입고 만나자고 했는데 이게 그의 기준에서 간소한 거구나.

    역시 안 맞는 남자다.

    성격이며 가치관이며 옷차림 하나까지도 모두 그녀가 원하는 것과는 달랐다.

    동생이면 이런 남자와 더 잘 어울릴 텐데.

    둘 다 못되고, 둘 다 제멋대로이니 환상의 커플일 것이다.

    “불손한 표정이로군.”

    “전부터 생각한 건데, 당신은 대체 언제 잠에서 깬 거야?”

    “본디 깊이 잠들지 못한다.”

    어느새 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히크를 내려다보는 위치인 게 마음에 들었지만 이제 다시 그녀가 고개를 들어야만 한다.

    우러러보는 것만 같은 키 차이는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리기 전에, 선물이 있다.”

    “선물?”

    “설마 그런 저질스러운 외투를 입고 대중 앞에 서려 한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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