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 *
새하얀 밤이다. 레그리아는 창틀에 힘없이 뺨을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녹기도 전인데 잿빛 하늘은 또 새로운 눈을 한 움큼씩 뿌려댔다. 꼭 떨어지기 싫다고 비는 자의 등을 걷어차는 것처럼, 눈은 그렇게 내린다.
따뜻한 곳에서 그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며 레그리아는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일단은 ‘그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굉장히 복잡한 상태였다.
‘우선 주변은 제대로 속여 넘겼어.’
기억을 잃은 척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내밀 수 있는 최고의 패였다.
라히크는 집요한 자다. 용서 없는 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분명히 그녀가 조지 경을 이용해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아내려 들 터였다. 그걸 말해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방어하다 보면 또다시 사이가 나빠지겠지.
‘그래서는 안 돼.’
그녀는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라히크와 친해져야만 했다.
제 안의 증오와 멸시를 억누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해야만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난 지금 라히크가 와 주지 않으면 어디도 나갈 수 없으니까.'
깨어난 레그리아는 그런 애완동물 같은 처지에 대해 분노하며 저항하기보다는 인정하기로 했다.
본디 세상의 모든 골칫거리는 문제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법.
그러고 나자 무얼 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보였다.
‘최종 목표는 탈출.’
그걸 위한 단기 목표는 두 가지.
레그리아는 검지를 들어 차가운 유리창에 대고 죽 그어 내렸다.
제1번. 에화와의 접촉.
제2번. 비칸과의 접촉.
그 두 가지가 모두 이뤄져야만 탈출이 가능할 것이다. 에화가 무슨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기어이 돌탑에 갔음을, 그래서 라히크의 모습을 보았음을 알려 주면 뭔가 반응이 있겠지.
다만 그걸 위해서는 외부 행사에 나가야만 했다.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가 함께 참석하는 자리.
즉, 황태자의 스케줄.
거기에 그녀가 편입되어야만 했다.
‘에화는 반드시 최고위 귀족의 자식이야.’
그 당당함과 느긋함, 전신을 둘러싼 여유.
그런 건 졸부나 하급 귀족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로 높은 위치의 귀족이라면, 황태자와 일정이 겹칠 확률이 높았다.
‘에화의 성격상… 내가 라히크와 함께 온다는 걸 알면 나타날 거야.’
기회를 잡아 부탁해야지. 셀린을 좀 빼내 달라고.
그녀가 사라지고 나면 남은 셀린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저를 지키려고 해 준 아이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조지 경의 행방도 알아내고 싶었고.
‘하지만 딱 여기까지만.’
더 정을 주지 말자.
정을 준 사람이 늘어나는 건 약점이 된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쌓여 가다가 발목이 잡힐 게 분명했다.
“저어, 비전하. 혹시 따, 따스하게 데운 우유가 필요하진 않으세요?”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배꼼 열리더니 셀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셀린의 옆에는 투구를 쓴 낯선 기사가 있다.
예전에는 문 앞을 지키는 기사가 없었는데 호수 사건 이후로 감시자가 더 늘어났다.
저 기사는 아까 의사들이 오고 갈 때도 석상처럼 서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면 고맙겠구나.”
“앗, 네! 주, 주방에 다녀올게요!”
투구를 쓴 기사를 살피던 레그리아가 부드럽게 답하자 셀린이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기사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문을 닫았는데 어떤 대화도 나누지 말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성가셔.’
레그리아는 창문에 비치는 제 얼굴을 응시했다. 이젠 익숙해지고 만 무심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녀는 살짝 웃어 보았다.
최대한 어색하지 않은 얼굴 표정을 연습해 본다.
아마도 곧 라히크가 올 테니까.
‘길들여야 해.’
레그리아는 자신이 어떻게 하든 비트리체처럼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비트리체처럼 대범하고 멋지고 화통한 여자는 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진실에 거짓 한 방울을 섞는 정도라면?
어차피 라히크 역시 그녀가 갑자기 고분고분하게 굴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아주 의심이 많은 남자니까.
하지만 기억을 잃었다면 어떨까.
거룩의 샘에서 라히크가 내보였던 본성을, 얼마 전에 그녀를 마구잡이로 대하며 겁탈하려 했던 것을… 모조리 잊었다면?
그가 악기를 선물했던 기억 같은 것만 남기고 싫고 힘든 건 삭제해 버렸다고 가정한다면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될까.
그런 사건들이 없었다면 지금 저는 라히크를 어떻게 대하려 할까.
‘라히크는 내 목숨의 은인이야. 그리고 내가 매달려야 하는 상대가 되지.’
어쩌면 조금은 설레할지도 모른다.
라히크는 객관적으로 잘생겼고, 반할 요소가 반하지 않아야 할 이유보다 더 많으니까.
다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키 포인트는 바로 의존이었다.
라히크는 그녀가 의존하기를 대놓고 원한다. 그만큼 독립이라는 단어를 혐오하는 자도 없을 터.
라히크가 원하는 대로 하기 싫어서 버둥대지만 끝내 의존하고 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정도면, 그녀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 가장 필요한 게, 걷지 못하는 거야.’
오늘 레그리아는 의사들 앞에서 쓰러지고 또 쓰러져 끝내 무릎에 퍼렇게 멍이 들고 말았다.
그래도 의지를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려 하는 그녀를 결국 의사들이 나서서 말렸으니 잘된 일이지.
그들의 소견서에는 분명 일시적 기억 장애로 인한 신체적 후유증이라는 문장이 적힐 터였다.
그렇게 유도했으니까.
‘어디 한번 두고 봐.’
너는 보고를 받고 종일 의심하고 경계하고 파헤치려 하다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여기로 뛰어오겠지.
정말 기억을 잃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테니까.
레그리아는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슬며시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 *
이혼한 부부가 우연히 만나 한 자리에 동석하게 되어도 이것보다는 덜 어색할 텐데.
라히크가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잠들 권리를 빼앗긴 레그리아는 불쑥 나타나 제 침대 옆에 자리를 잡은 남자를 향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들이 네가 부분 기억 상실증이라더군.”
긴 침묵 끝에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라히크다.
의심과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어투에 레그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지나치게 태연한데.”
“종일 그 문제로 시달렸어. 그런데 이제 당신까지…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알아?”
질문에는 질문으로.
이 또한 가장 기본적인 심리전이었다.
레그리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라히크의 찌를 듯한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피하지도 않은 채.
라히크는 그런 그녀를 느른히 훑으며 속삭였다.
“기억에 혼재가 있으며 기억하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이 뒤섞여 있는 위험한 상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 기제이며 해당 장애로 인한 신체적 후유증이 유발, 걷지 못한다는 생각이 확고하여 걸을 수 있음에도 걷지 못한다고 하는군.”
“그러게. 다들 내가 걸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네.”
“그걸 확인할 길은 꽤 많으니 걱정할 것 없다. 네가 화를 피하기 위해 거짓을 읊는 거라면… 글쎄. 죽을 위기에 처해서도 뛰지 않을 수 있을지.”
완벽하다.
모든 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차피 저 의심병 환자를 믿게 하려면 한 번쯤 큰 위기에 처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름 아닌 라히크 아닌가.
걷지 못하는 그녀를 지금 당장 끌고 가 호수에 다시 처박는다 해도 이상할 것 없지.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사나운 광채가 번들거리는 걸 보면 지금도 그러고 싶어 보이는 것을.
“미친놈.”
레그리아는 오늘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대꾸했다.
“여전히 무례하고 뻣뻣하군.”
“피곤한데 찾아와서 헛소리를 하니까 욕을 먹는 거야.”
“그것참…….”
자세가 바뀌었다.
턱을 쓸던 라히크가 그녀의 위에 올라탄 건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손목을 잡혀 결박당한 레그리아는 곧바로 깨달았다. 이건 시험이다. 이 수치스러운 자세로 갖은 짓을 당했던 그 날을 일부러 기억나게 하려는 거였다.
애초에 그녀의 기억 상실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려는 거겠지.
“뭐 하는 거야?”
“밀어내지 않나? 이전처럼 존중이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며 울어 보지 그래.”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무거우니 비켜.”
금빛 눈동자가 매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좁혀졌다.
레그리아는 다리는 일체 쓰지 않고 팔에만 힘을 주어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였는데, 그녀의 무력한 꼴을 흥미롭게 내려다보던 라히크가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던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당신.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이?”
“봐, 봐줄 만한 게 얼굴인데… 좀 소중히 여겨.”
목소리가 떨린다.
그 또한 의도한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위협당했던 기억이 없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는 설렘을 느껴야 정상이다.
레그리아는 스스로를 그렇게 세뇌시키며 손목을 뒤틀었다. 뺨이라도 붉어지기를 바라면서.
라히크는 무얼 하려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순순히 놓아주기는 했지만, 그뿐. 여전히 그녀를 가두는 듯한 자세는 바뀌지 않았다.
그에 레그리아는 머뭇거리다 이내 결심한 듯 먼저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홀쭉하게 들어간 라히크의 뺨을 어루만지자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레그리아는 그런 라히크를 빤히 쳐다보다가, 약간의 망설임을 넣어 속삭였다.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