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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134)
  • 49화

    태연한 척 꾸며내고 있으나 실은 지금 당장 그 멍청한 것을 향해 채찍질을 하고 싶었다.

    ‘그 무심한 얼굴을 한 여자를 보고 도와주었다고?’

    그럴 리가 있나.

    레그리아는 웃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한 조각 내어주는 것도 아깝다는 듯 입꼬리조차 쉬이 올리지 않는데, 조지 멕시웰에게는 대체 어떤 표정을 보였기에 홀딱 반하게 만든 거지?

    도대체 몇 번이나 어두운 숲을 헤집으며 단둘이 시간을 보냈을까.

    ‘참아야 한다.’

    실은 신황청에 가고 싶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그 뻔뻔스러운 얼굴이 멀쩡한 것을 보고 그때 채 묻지 못한 것을 추궁하려 했다.

    정말 죽으려 한 게 아니냐고. 그런데 왜 호수에 뛰어든 거냐고.

    그러지 않은 건 단지 이 관계를 더 망치는 것이 황태자로서 옳지 않기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망가진 관계다. 여기서 수습을 해야지 더 짓밟아서야 쓰나.

    허나 그 여자의 무표정은 지나치게 그를 자극했다. 어르고 달래며 꿀을 바른 거짓을 내뱉는 건 숨 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일 텐데, 어째서 레그리아만 보면 가면이 벗겨지는 건지.

    그래서 그 여자 또한 그와 같이 만들어 버리고 싶은 건 또 왜인지.

    실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후.”

    가슴이 답답하다.

    단추 몇 개를 끌러낸 라히크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첩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만 한다.

    에화 놈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진 몰라도 얼마 전부터 로에르멜 저택을 드나드는 게 포착되었다. 그와 동시에 놈을 필두로 한 벨리그레엄의 뒷세계가 위험하게 출렁거리는 중이다.

    모든 세력 간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의무가 있는 황태자로서 라히크는 상황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그 외에 또 해야 할 급한 건이 뭐가 있었더라…….

    “전하! 신황청에서 긴급 연락입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집무실 앞이 잠시 소란스럽더니 기사 한 명이 다급히 외쳤다.

    라히크는 눈썹을 추켜세울 뿐,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어제는 깨어났다는 연락이 왔고, 오늘은 또 무엇이기에.

    “문을 열어라, 빨리!”

    그런 그를 대신해 조슈아가 시종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신황청에 두었던 황궁 기사가 서둘러 들어와 부복하며 양피지를 내밀었다.

    겉면에 에오스에게 주었던 긴급 인장이 찍혀 있음을 확인한 라히크는 망설임 없이 봉인 밀랍을 뜯고 양피지에 담긴 내용을 훑어 내렸다.

    혹 정신을 차리자마자 또 호수로 기어들어 가려 한 거라면 이번에야말로 궁으로 데려와 가둬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전하. 왜 그러십니까? 무슨 안 좋은 내용이라도…….”

    “하.”

    “전하…?”

    라히크의 표정을 보던 조슈아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보고서를 와락 구긴 라히크는 느리게 손에서 힘을 풀며 기사와 시종들을 향해 손짓했다.

    “나가라. 전부.”

    이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믿기지 않기도 했지만, 그거야 의사를 보내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집무실 내부가 깨끗이 비워지고 오직 둘만 남게 되자 라히크는 조슈아에게 보고서를 던졌다.

    “읽어라. 나의 비께서 기억을 잃으셨다는군.”

    “예???”

    “신황청 소속 의사의 진단은 부분 기억 상실증이라 하니 지금 당장 궁의를 보내라.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파악해야겠다.”

    “아, 알겠습니다.”

    연기인가? 그도 아니면 어떤 수작?

    만약 진짜 부분적으로 기억의 소실이 일어난 거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나.’

    그렇게 가정하자마자 속이 뒤틀렸다.

    이토록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그를 화나게 하는 이는 성별을 떠나 지금까지 단 한 명뿐이었는데.

    “그런데 전하, 비전하께서는 본래… 이런 걸 연기로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미욱한 제 소견입니다만, 고열에 오랫동안 시달린 사람은 기억에 구멍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쩌면 진짜 부분적으로 기억이 온전치 못하신 걸지도 모릅니다.”

    “허니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는 기억하지 못하는지를 먼저 파악하라?”

    “어쩌면… 그냥 정말 어쩌면 말입니다. 이 편지에 따르면 비전하께서는 지금 여전히 다리를 쓰지 못한다고 여기신다 하니…….”

    조슈아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라히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대충 이해했기에 더 묻지 않았다.

    ‘충격적이고 힘들었던 기억은 지우고 좋았던 것만 남겨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라히크의 입장에선 그보다 더 잘된 일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남긴 상흔에서 도망을 쳤다고?’

    그 강직한 여자가 그럴 리가 있나. 융통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데 도망을 쳐?

    라히크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랬기에 일정을 조절하여 신황청에 가보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궁의들이 신황청 소속의 의사들과 같은 소견서를 보내오기 전까지는.

    * * *

    “교활해지렴. 영리하고, 악독하게.”

    어떤 만남은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기도 한다.

    레그리아에게는 비트리체와의 만남이 그러했다.

    - 미쳐 봐. 뭐 어때?

    이젠 들리지 않는 비트리체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스며 있다.

    함께 나눴던 모든 대화는 레그리아의 안에서 곱씹히고 곱씹히고 또 곱씹혀 마침내 거룩한 성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해일조차 무너트릴 수 없는 견고한 성을.

    깨어난 다음 날 아침.

    레그리아는 의사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질문을 당하고 있었다.

    “손목의 인대는 이제 괜찮습니다. 헌데 어쩌다가 인대가 늘어나신 겝니까?”

    “기억이 나질 않아.”

    “크흠, 그러면… 그날 누구를 만나셨는지는 기억이 나십니까.”

    “미안. 그것도 모르겠네.”

    이어지는 질문에 따라붙는 대답은 모두 같다.

    레그리아는 약간은 미안한 듯,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평이했고 심장 역시 차분하게 뛰었다.

    으레 거짓말을 하는 자는 머리칼을 꼬거나, 눈을 피하거나, 코나 입술을 만지는 행동을 보인다. 혹은 심장 박동이 너무 빨리 뛰고 혈류가 치솟아 흥분 상태에 접어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그 무엇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의사들이 와글거리며 자기네끼리 무어라 토론을 하는 동안 에오스가 다가와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를 보고 놀란 눈을 했던 에오스는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돌아가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그런 난리를 일으킨 그녀가 황태자비 후보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 손길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질 만도 한데 전혀 변함없는 걸 보면 에오스는 실로 무서운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레그리아는 찻잔을 들어 올려 홍차의 향을 음미했다.

    “고마워, 에오스. 향이 정말 좋아.”

    “조지 멕시웬 경은 국경수비대로 좌천되었습니다, 비전하.”

    칭찬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런 갑작스러운 공격이 짓쳐들어온 것은.

    레그리아는 우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에오스를 바라보며 머뭇거리는 기색을 내보였다.

    “음, 안 됐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니?”

    “정말 기억이 안 나십니까.”

    “오늘따라 다들 그렇게 묻네. 내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봐.”

    “……실로 기억나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방금 드린 말씀은 잊어 주소서.”

    “내가 그, 조지 멕시웬 경이라는 분과 많이 친했니?”

    “그렇지 않습니다.”

    공손히 시선을 내리깐 에오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레그리아는 안심이란 듯 짤막히 한숨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그러는 동안도 의사들은 논의가 끝나질 않았는지 소란스레 의견들을 피력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을 삼켜내던 레그리아는 눈 쌓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나가 보고 싶어. 눈이 예쁘게 쌓였네.”

    “지금은 너무 춥습니다. 외부 산책은 몸이 조금 더 나아지시면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전까지는 복도라도 조금 걸으시는 게 어떠한지요?”

    “산책…? 걸어?”

    “예. 의사들이 아까 넌지시 조언하기를, 긴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셨으니 쇠약해지셨을 거라 하였습니다. 신황청 내부를 걷는 것 정도는 괜찮다 하니 그렇게 하심이…….”

    “에오스.”

    레그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의 말을 중간에 끊는 건 무례한 행위였고, 레그리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에오스는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레그리아는 그런 에오스를 바라보다가, 조금은 고집스레 시선을 돌렸다. 눈매를 찡그리면서.

    “날 놀리지 말아 줘.”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부디 마음 상하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산책을 하니. 나는 걸을 수가 없는데.”

    조금 기분이 상한 투로, 하지만 화를 내는 건 아닌 정도로.

    레그리아는 나직이 읊조렸다.

    그에 에오스가 멈칫하더니 황급히 의사들을 돌아보았다.

    “저어, 비전하. 한 번 걸어 보시겠습니까?”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는지 의사 중 한 명이 다가와 제안을 했다.

    레그리아는 황당하다는 투로 의사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아무도 날 돕지 마. 이제 똑바로 설 수는 있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에오스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주고, 레그리아는 다리를 손으로 들어 하나씩 자세를 틀었다.

    그리고 침대 기둥을 잡고 느리지만 끈질기게 바닥에 발을 댄다.

    그 과정은 답답할 정도로 오래 걸렸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떼지 않았다.

    “아, 됐……!”

    풀썩.

    그러나 환희에 찬 표정으로 자리에서 섰던 레그리아는 몇 초 지나지 않아 허물어지고 말았다.

    정말로 ‘걷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이게 바로 에오스가 어제에 이어 또 한 번의 긴급 연락을 보내게 된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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