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34)
  • 48화

    4. 가면(Maske)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쾌차의 의미를 담은 꽃이라도 보내지 그러십니까?”

    거슬리는 한마디에 라히크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주변을 지나는 이들이 무어라 보고를 올리는 것 같았으나 자체적으로 듣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조슈아가 알아서 들을 테니.

    하지만 그 조슈아가 듣지 않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면 그건 직무 태만이었다.

    그는 황태자이니 보고된 자료를 취합, 재정리하여 다시 보고받는 입장이지만 조슈아는 그 중간 허리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은가.

    “쯧.”

    라히크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물론 요즘 업무가 과중하기는 했다. 그의 보좌관은 지금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퇴근하지 못하고 궁내에서 숙식을 해결한 지도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으니까.

    아닌가. 이 주가 넘었나?

    어찌 되었든 두 눈에 핏발이 선 채 감히 저를 노려보는 조슈아는 정신이 나간 게 확실했다.

    라히크는 무엄한 보좌관을 향해 딱 한 번 관용을 베풀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제정신인가? 이 계절에 꽃이 피는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럼 보석으로라도! 꽃을 만들어 주시면 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황궁 내에 있는 온실은 폼입니까? 그 안에 꽃이 만발해 있지 않습니까!”

    “시끄럽군.”

    “……죄송합니다.”

    크윽, 아직 월급을 안 받아서 참는다. 더러운 권력 같으니라고.

    뭐 그 비슷한 중얼거림이 따라붙는 것 같지만 라히크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곳에 신경을 쏟아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절대 아니다.

    라히크는 굉장히 불만스러운 손짓으로 오늘 도착한 편지와 각종 초대장을 다시 한번 살폈다.

    정확히 10번째 반복되는 행위.

    하지만 아까부터 없던 게 지금 생겨나는 기적 같은 게 있을 리가.

    ‘괘씸하기는.’

    에오스를 통해 레그리아가 드디어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는 말은 전해 들었다.

    어찌나 약해빠졌는지 툭 하면 기절하고 쓰러지고 의식을 잃는다. 호수에 좀 빠졌기로서니 감기가 아니라 아예 혼절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해?

    저래서야 결혼한 뒤에는 최대한 안전하고 평안한 곳에 가둬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낳기도 전에 죽어 버리면 안 되니까.

    강력한 후계를 생산하는 건 황태자비로서의 의무.

    모후가 될 존체를 귀하게 보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절차 따위는 죄 무시하고 지금 당장 데려와 가두고 싶지만….’

    그래서야 황실의 위엄이 살지 않지.

    절차라는 건 무시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허례허식에 불과하더라도 절차를 제대로 밟아 진행된 일만이 모두의 인정을 얻을 수 있는 법.

    게다가 아직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

    무능한 황제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명실상부 황태자일 뿐.

    참아야 한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라히크는 저를 밀어내던 미약한 손짓을 떠올렸다.

    기억해 내기 위해 부러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던 그 여린 몸은 그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눈앞에 자리해 그를 괴롭혔으니.

    물에 젖어 애처롭게 흘러내리던 실크 잠옷. 말려 올라가 훤히 드러나던 다리. 그 위로 흐트러지던 붉디붉은 머리칼…….

    기분이 또다시 수직 낙하했다.

    그는 상대가 매달려 오는 것에 익숙했다. 그를 향한 열망은 숨 쉬듯 당연한 것이라 여겨왔는데, 레그리아는 어째서 다른 건지.

    그 난리를 피워 놓고 혼절하였으면 적어도 깨어났다는 인사는 먼저 해야 할 것 아닌가.

    “전하. 제가 이거까지는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헌데.”

    “전하께서 먼저 오페라 극장같이 낭만적인 장소에 가자고 청하기라도 해 보십시오. 비전하께서는 어쩌면 당황하신 상태일 지도 모릅니다.”

    “그 여자가?”

    라히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레그리아 로에르멜이 당황을 하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황태자인 그에게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는 성격이었다.

    빌어먹게도 대쪽같이 곧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굽히지 않는 성정 아니던가.

    옳지 못한 명령엔 끝까지 옳지 못하다 간언할 충신의 상이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굴욕을 통해 살아남을 간신배가 아니다.

    나라를 부당히 빼앗기면 투사가 될 것이며 황태자비 자리에 앉혀 두면 그 누구보다 공정하게, 부패하지 않은 권력을 일궈낼 것이다.

    라히크는 그런 레그리아를 얼마간은 좋아했고, 대부분은 싫어했다.

    미련하기 그지없지.

    제 동생인 지젤 로에르멜의 반이라도 닮았더라면 그 고생은 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리고! 먼저 좀 찾아가셔서 상태를 살펴보십시오. 아픈 분과 기 싸움 하지 마시고요. 이제 그만 저도 퇴근도 하고, 집에 가서 제 한 달 월급을 털어 넣은 침대에서 늘어져라 자고도 싶습니다만.”

    발광은 끝냈는지 조슈아가 무기력하고 음울하게 조언했다.

    중간에 상당히 거슬리는 문장이 있기는 하지만 라히크는 지적하는 대신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몸을 살피셔야 합니다. 그간 살인적인 일정을 모두 소화하시면서 언제 신황청 쪽에서 연락이 올까 하여 잠조차 제대로 못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라히크가 집무실을 떠나질 않으니 최측근인 조슈아 역시 집에 가지 못했다는 소리다.

    원망으로 에둘렀으나 그 속에 깃든 걱정을 읽어낸 라히크는 피식 웃으며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정신을 차려 놓고도 편지 하나 보내지 않는 뻣뻣한 계집이 뭐가 예쁘다고.”

    “전하. 제발… 예비 황태자비께서 호수에 투신하신 뒤, 생사 불명이라는 악소문이 떠돌고 있는 점은 좀 알아 주십시오.”

    비밀 파티 이후 레그리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엄청나게 치솟았다.

    그런데 활발하게 대외 활동을 해야 할 예비 황태자비가 갑자기 은둔하니 별 소문이 다 도는 것도 당연했다.

    그 대부분이 죽었다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거나 하는 잡소리다. 심하면 물귀신이 되었다며 멀쩡히 살아 있는 여자를 유령으로 매도해 댔다.

    모두 입 가벼운 사제들을 통해 새어나간 소문이었다.

    라히크는 그러한 떠듦이 심히 불편했으나 아직까지는 손을 대지 않는 중이었다.

    언제고 레그리아는 깨어날 것이지 않나. 그러면 그때부터 대외 활동을 간간이 하여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 주면 될 일이다.

    “아니면 제가 대신 편지라도 쓰겠습니다. 절대 전하께서 비전하의 상태가 궁금하다거나, 염려하셨음은 티 내지 않고 건조하고 사무적으로 잘 쓸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우습군. 누가 염려를 했다는 거지?”

    “예, 예. 잘 알겠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반문이지만 측근 보좌관인 조슈아는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저 말은 긍정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애초에 조슈아야말로 다 지켜보지 않았던가.

    황태자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신황청에서 날아오는 소식 하나하나를 받아보는 모습을 말이다.

    사열식이니 접견이니 하는 수많은 귀찮고 정신없는 업무 사이에서도 황태자는 신황청의 보고만큼은 꼬박꼬박 직접 챙겼다.

    그게 걱정이 아니면, 그런 모습이 염려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처음에는 남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저 황태자가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게 영 어색하고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머리가 돌아 버린 줄 알았지.

    하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았다.

    황태자는 제 비를 아끼고 있다.

    나름의 방식으로.

    “참, 전하.”

    흐느적거리며 편지를 써 내려가던 조슈아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깃펜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황태자를 향해 다가갔다.

    라히크는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눈빛으로 조슈아를 훑어 내렸다.

    조슈아는 짧게 숨을 들이켜며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조지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쯧.”

    “병사들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 주셔서 멕시웬 집안 전체가 전하의 자비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조슈아는 저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입이 험한 황태자가 일단 한 번 ‘제 사람’이 된 이에게는 얼마나 너그러워지는지 잘 알았다.

    그랬기에 감히 간청할 수 있었다.

    황태자비 전하를 지키기는커녕 현관을 통해 위험한 숲을 마음껏 다니실 수 있게 둔 조지지만, 부디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황태자는 며칠간 고민하기는 했지만 결국 조슈아의 청을 받아들였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성정에 그러한 자비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어나라. 조슈아 멕시웬.”

    “예, 전하.”

    “너는 내 치세에 궁내부 장관이 될 자다. 네 가족 중 그 누구도 공식적인 흠이 생기면 안 되기에 조용히 넘어간 것이다.”

    라히크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사실 레그리아를 얼음장 같은 호수 속에서 건져 올렸을 때, 라히크는 머리꼭지가 돌아 버릴 정도로 격노했다.

    당장 피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광기가 갈증을 부채질하며 그를 더욱 돌게 만들었지.

    하나 라히크는 끝내 삼켜냈다.

    이번에도 황태자로서의 계산이 모든 감정을 앞섰다.

    조지 멕시웬과 조슈아 멕시웬은 친척도 아니고 형제다.

    조지의 과실은 차후 조슈아의 명예에 먹칠이 될 터.

    용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명석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멕시웬 가문에서도 손에 꼽히게 뛰어난 조슈아의 동생이 그토록 멍청하고 마음 여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제 형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근무를 설 줄 알았건만 반대로 황태자비에게 마음대로 나갈 길을 열어 주다니.

    태형이라는 모욕적인 벌과 함께 중징계를 받아 마땅하였으나 그 대신 조지는 남몰래 국경 수비대로 좌천되었다.

    서류에 남아선 안 되므로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신황청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친한 친구나 동료에게 알리는 것도 불가하다.

    오직 가족들에게만 인사를 건넬 수 있도록 했다.

    야만족을 상대해 본 적 없이 곱게 컸으니 그 어리바리한 녀석은 금세 목이 따일 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가장 좋은 결말이고, 혹여나 거기서 살아남는다면….

    ‘벨리그레엄은 좋은 기사를 하나 얻게 되겠지.’

    손해 볼 것은 없다.

    분명 그럴 터인데도.

    우득.

    책상을 짚은 손에 핏줄이 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