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러니 판도라에게 죄를 물으려거든 자유 의지가 없는 자만이 돌을 던져야 한다.
하지만 ‘돌을 던진다’라는 간단한 행위조차도 자유 의지이지 않던가?
“진실이란 항상 추악하지. 그래도 진실을 알고 싶니?”
“응.”
휘장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영원히 떨어지는 절벽일지라도 상관없다.
레그리아는 한 겹 휘장을 앞에 두고 돌아서는 겁쟁이는 아니었다.
심지어 바로 오늘 그녀는 자신의 용기를 증명해 내지 않았던가.
“들려줘.”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비트리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달콤하게 마저 느껴지는 음성으로 다정히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말해 줄 거니까 집중해서 들어.”
“…….”
“모든 신성인은… 첫 아이를 낳고 10년 내에 죽어. 아이를 낳으면 죽는 거라고 보면 돼.”
신성인은 요절한다.
그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그게, 아이 때문이라고?
“그리고 이 세계의 모두가 신성인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지.”
“숨겨…?”
“응.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성인들이 서로 뭉쳐 대항을 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저항하지 못하도록.”
“그런… 그런 일이.”
가능한가.
거센 충격에 비틀거리자 비트리체가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의심해 본 적 없니? 넌 영리하니까 의문을 가졌을 텐데. 여기 이 위대한 벨리그레엄에 신성계의 물건이 있는 것도 있지만… 없는 게 더 많잖아. 난 네 기억을 봐서 알아.”
로마 시대에도 상하수도 설비는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찬란한 과거 문명 속에서 없는 것을 딱 하나만 고르자면, 그건 전기다.
근대의 상징, 전기. 그리고 전기를 동력으로 이용해 만들어 낸 수많은 발명품들.
그렇게 긴 세월 간 신성인들이 나타났더라면 문명 전파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벨리그레엄엔 대표적으로 ‘신문’의 보급이 있긴 해도 ‘기차’나 ‘전화기’ 같은 건 없었다.
중세에 근대의 물건 몇 가지를 억지로 집어 넣어둔 것 같은 느낌.
신성인들이 모두 모여 머리를 맞대었으면 지금쯤 이 세계에도 전기가 보급되었어야 정상인데.
“살고 싶거든 도망치렴. 아이를 낳지 마. 벗어나서 최대한 자유롭게 숨어 살도록 해. 그러지 못할 거라면… 그냥 출산 이후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의 날까지 있는 힘껏 즐기렴. 어차피 네가 무슨 미친 짓을 해도 신성 기사는 제 자식을 낳은 짝을 해치지 못하니.”
아이를 낳으면 시한부가 된다니, 이게 무슨 불합리한 소리인가.
그녀의 의식이 요동치자 새카맣던 공간 한 면이 갈라지며 거기에 한 표식이 떠올랐다.
“죽는 시기도 일정하진 않아. 누구는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쇠약해져 죽음에 이르고, 누구는 그래도 제 자식이 열 살이 되는 것까지는 보고 눈을 감지.”
“……하!”
“사교계에 나갈 일이 있다면 잘 살펴보렴. 사교계에 나올 수 있는 신성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
“가두고, 통제하고. 출산하게 해서… 약해진 몸인데 익숙하지도 않은 사교계를 다니지 말라고 하겠지. 걱정하는 체, 역겹게…….”
“역시 너는 똑똑해. 맞아. 그렇게 신성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고립되어 왔단다.”
비트리체가 씩 웃었다. 레그리아는 도저히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비트리체가 억지로 그녀의 입꼬리를 올리게 만들었다.
“만약 네가 멀리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은 시간만큼이라도 행복하게 즐기지도 못할 거라면… 교활해지렴. 영리하고, 악독하게. 그게 네가 살아남을 길이란다.”
착하게 있으면 죽는다.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채 라히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도 죽는다.
그러나 모두가 한통속이므로 이 거대한 벨리그레엄의 누구 하나 그녀를 도우려 하지 않을 터였다.
신성 기사의 숫자는 벨리그레엄의 국력.
계속해서 태어나야만 하니까.
“…그 자식들은.”
주먹을 꽉 움켜쥔 레그리아는 손에 들어간 힘을 풀지 못하고 나직이 읊조렸다.
“신성인의 배를 빌어 태어난 그 아이들은? 제 어미가 당한 일을 보고도 또 그런 짓을 아내에게 반복한다고?”
분노로 눈앞이 새카맣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뭐 하러 낳았단 말인가. 대체 무엇 하러 그 진통을 겪고 입덧을 하고 아이가 생겼음에 기뻐하고!
“레그리아. 너무 화내지 말렴. 대부분의 신성 기사들은 모친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자라.”
“…뭐라고?”
“제 모친이 신성인이며 어떤 분이었는지 명확하게 기억하는 건 귀족 가문 출신의 신성 기사뿐이야. 평민으로 낙인찍힌 신성인은 아이를 낳자마자 빼앗기는 일이 대다수지. 심하면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아이를 빼앗기기도 해.”
“…….”
“평민 출신의 신성인을 어머니로 둔 신성 기사들은… 신성 기사단에 들어가는 게 예정되어 있어. 그래서 신성 기사단 전용 보육원에 보내지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교육소로 가고, 그 다음에는 훈련소. 성인이 되면 비로소 기사단에 입단해.”
“허.”
멀쩡히 낳은 사람이 있는데 아이가 어머니 없이 자란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대체 어떤 쓰레기가 그런 제도를 고안해 낸 거지?
점점 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 신성인들은 대체 무슨 죄가 있는데!
“자신의 짝을 잃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신성 기사들은 제 몫이 된 신성인을 임신시켜. 그리고 짝이 된 다음… 그녀가 죽을 거란 사실을 거듭 깨닫고 같이 죽어 가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어쩔 수 없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신성 기사들은 세뇌를 당하며 자라거든. 너희를 위해 강림하는 특별한 신성인이 있을 것이다. 임신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신성 기사를 배출해야만 한다. 그렇게.”
징그러워.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오직 도구로만 본다는 게 이런 거구나.
라히크 역시 똑같다.
그녀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준 적 없지.
황태자비랍시고 치켜세우지만 결국 후사를 볼 도구에 불과했다.
비트리체가 한 말을 곱씹으며 배신감을 삼키던 레그리아는 문득 의아해졌다.
“하지만 신성인은 한 해에 하나에서 둘. 아무리 많아도 세 명 정도밖에 나타나지 않잖아.”
“그래, 맞아.”
“신성 기사의 수와 맞지 않을 것 같은데.”
“신성인은 어차피 한 명 밖에 아이를 낳지 못해. 증식이 불가능하지. 뭐, 그렇다고는 해도 수가 맞지 않는 건 마찬가지지만.”
비트리체가 화려한 적발을 손가락에 꼬며 시선을 먼 곳에 보냈다. 기억을 더듬는 듯해 레그리아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디트리히가 해 준 말이 있었는데… 아, 기억이 났다.”
“응.”
“신성 기사들 중 짝을 얻을 수 있는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아. 나머지는 공용으로 쓰이는 신성인에게 치유를 받지. 우리는 그들을 천사라고 불러.”
‘공용’으로 ‘쓰인다’라니.
레그리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비트리체가 다시 그녀의 미간을 꾹 눌러 인상을 펴게 했다.
“천사들은 전원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임신을 거부하게 된 자들이야. 아이를 낳지 않고 오래 살게 해 주는 대신 수많은 신성 기사들을 상대해서 그들의 기운을 안정화시켜야 하지.”
“그 ‘천사’들은… 전부 신성 기사단 소속이야?”
“맞아. 혹시 네게 유용한 정보가 될까 싶어 일러 주자면, 표드르에게 말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거야.”
당장 만나고 싶다.
그녀가 애타게 찾았던 나이 든 신성인이 거기엔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이 세계의 도시에 대해 알고 있을 테지.
달아나서 어디에 정착하면 좋을지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그 눈이야. 전사의 눈빛을 갖고 있어, 너는.”
그때, 비트리체가 돌연 그녀를 칭찬했다.
“내 악명을 이용해. 다들 두려워하고 있을 거란다. 울타리를 부순 미친년이 다시 튀어나올까 봐.”
“자기 자신을 일컬어 미쳤다고 하는 건 너뿐일 거야, 비트리체.”
“그렇지? 그러니 넌 내 악명을 이용하여 모두가 너를 추앙하게 만들고, 은밀히 동경하게 만들렴.”
비트리체가 그녀를 다시금 꼭 끌어안고 소곤거렸다. 한마디 한마디가 마왕의 속삭임 같다.
벗어날 수 없는 주문에 걸린 것처럼 레그리아는 독한 시선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들은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악착같이 연기해. 웃음을 네 검으로 삼고 눈물을 네 창으로 삼아. 살아남도록 도와줄 조력자를 찾되, 결코 믿지 마. 믿음은 너를 죽이고 고독은 너를 살릴 테니. 이 세상은 미쳐서 네 포궁에서 아이만 끄집어내면 되는 것들이 널렸단다.”
“…누가 빼앗길 줄 알고.”
목숨도, 인생도, 아이조차도 모두 그녀의 것이다.
약탈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음. 이건 앞서 한 이야기와 상충되는 건데, 할 수만 있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도록 해. 그게 널 버티게 해 줄 거야.”
“사랑하되 믿지는 말라. 그 사랑마저도 원동력으로 삼아 살아가라는 거겠지.”
“똑똑하네.”
이제 시간이 다 됐다.
레그리아는 그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언제부터인가 비트리체가 물거품처럼 조금씩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으니까.
“너는 살아남을 거란다, 레그리아 로에르멜.”
비트리체의 마지막 한 마디는 귓속에 남아 끈질기게 웅웅거렸다.
마치 어떤 신성한 계시처럼.
그리고 얼마 뒤, 레그리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움찔.
손가락 끝이 떨린다.
느리게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니 아침이었다.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더럽고 추잡한 땅덩어리를 신비롭게 바꿔 놓는 계절.
레그리아는 호수에 스스로 뛰어든 날로부터 2주 만에 깨어났다.
어느덧, 얼어붙은 호수의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