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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46/134)

46화

레그리아는 끝내 제 눈가를 데우고 마는 눈물에 고집스레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유린당하는 게 무슨 황태자비란 말인가.

기만도 정도껏이지.

라히크는 언제든 제멋대로 굴 것이고, 원하는 대로 얌전히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의 정숙함을 의심할 터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난폭하게 굴겠지.

애정이나 다정함 또한 모두 그가 내킬 때뿐.

“흥이 떨어졌다.”

레그리아의 뺨을 타고 기어이 눈물이 흐른다. 그걸 본 라히크는 마치 못 볼 꼴을 보았다는 것처럼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어린아이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 어딘가 처박아 둔 점토 장난감처럼, 레그리아는 뭉개지고 짓밟힌 채 그렇게 침대에 내던져져 있었다.

라히크가 거칠게 문을 열고 나설 때까지도 그냥 그렇게.

“비전하, 세상에! 어, 어쩜 좋아요…!”

“호들갑 떨지 마라. 훈김 욕조를 가져와. 체온부터 높여드려야 한다.”

“네, 네!”

셀린과 에오스가 무어라 말을 주고받았다.

레그리아는 의지 없는 헝겊 인형처럼 이리 옮겨지고 저리 옮겨지며 그저 방금 보았던 무엇을 떠올리기만 했다.

어딘가에 집중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미쳐버릴 것 같아서.

‘혈흔…….’

라히크의 흰 제복은 평소와 같이 깔끔했다.

단 한 군데만 빼고.

수많은 훈장이 달린 가슴팍, 사자 머리 모양의 브로치. 늘 볼 때마다 죽은 사자를 보는 것 같았던 바로 그것의 눈에 붉은 자욱이 튀어 있었다.

마치 그로써 완성되는 작품이라는 듯이.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처럼.

“아하하하!”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린 레그리아를 향해 셀린이 걱정스러우면서도 두려운 눈길을 보냈다.

채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처럼 온갖 감정이 담긴 위가 요동을 친다. 헛구역질이 나지만 도무지 토하는 법을 몰라 뱉어낼 수조차 없었다.

레그리아는 졸린 자국이 선연한 제 목을 마구 긁다가 두 손에 얼굴을 처박고 소리를 질렀다.

우는 대신 소리를.

“비전하… 우리 비전하, 어떡해요. 제, 제가 오늘 밤에 옆에 이, 있어 드릴게요. 네?”

안절부절못하던 셀린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에오스가 그녀의 머리를 감기는 동안에도 계속. 제 몸이 다 젖는데도 그냥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셀린의 미약한 온기는 레그리아에게 약간의 위안이 되어 주었다.

“……에오, 스.”

한참 뒤에 입을 열자 잔뜩 쉰 소리가 샌다. 알아듣기 힘들 텐데도 에오스는 곧바로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예, 비전하.”

“머리카락… 잘라, 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너무할 정도로 빠른 답에 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올라왔다.

이젠 제 머리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나 싶어 손가락 사이로 에오스를 노려보자 중년의 여관장은 짤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 종속된 몸입니다. 전하께서는 비전하의 긴 머리를 좋아하시니 잘라 드릴 수 없습니다.”

“……하.”

“……그러나 그 외에도, 비전하. 가까이서 모시는 몸으로 감히 조언을 드리자면… 부디 황태자 전하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목에 남은 흉한 자국들에 닿는 시선 속에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그래 봤자 그뿐이지만.

에오스는 라히크가 다시 날뛰는 날이 오면 오늘과 같이 그녀를 버리고 물러설 것이다. 문 안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묵인하고 이렇게 들어와 그녀를 씻기기나 하겠지.

그 거대한 충성심의 발로가 어디인지 알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극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부탁드리건대 유순히 구세요. 황태자 전하 같은 분은 맞서시면 안 됩니다. 길들여야지요.”

붉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빗어내던 에오스는 잠깐 망설이며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짤막한 한마디를 마저 내놓았다.

“그리하셔서라도 우선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산다는 것이 언제부터 이런 것이었던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짐승도 자유를 알진대 인간은 어디 덜할까.

에오스의 말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썩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해.’

빠져나가야 한다.

탈출.

그게 지금부터 그녀의 절대적인 목표였다.

그렇다면… 연기 하나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비칸. 초원의 전사.’

그는 분명 그녀를 도왔다. 더 얻어맞을 수도 있는데 걸레짝이 된 몸으로 그걸 감수하며 그녀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었다.

거기서 레그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남자가 그녀를 도와줄 것임을.

‘라히크의 앞에선 양순히 굴어 그를 속이고 뒤로는 비칸과 접촉할 방도를 찾는 거야.’

생각을 하느라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에오스가 어깨 위로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러다 퉁퉁 부은 손목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치료를 하고 주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심하게 부으셨어요.”

“그래.”

물에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레그리아는 다시금 눈을 떴다.

연녹색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 * *

하지만 누가 그러던가. 비극에 종결이 있다고.

잠시 뒤.

잠자리에 들었던 레그리아는 제 앞에서 미친 것처럼 깔깔거리는 비트리체를 마주하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꿈속에 비트리체가 나타나지 않기에 오늘도 그럴 거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 걸까.

“아, 라히크. 그 새끼 표정이 아주 볼만하던데. 근래에 내가 본 것 중 최고의 표정이었어.”

“내 눈물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노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응. 그러니까 물러났지. 아니면 왜 물러났겠니. 네 목까지 졸라가며 짐승같이 흘레붙으려 했는데.”

비트리체가 즐거운 얼굴로 다가와 그녀의 코끝을 톡 쳤다. 그러더니 돌연 레그리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는 게 아닌가.

다소 뻣뻣하게 안긴 레그리아는 비트리체가 왜 이럴까 싶어 머뭇거렸다.

“원치 않는 곳에 떨어져서 고생이 많아.”

“!”

“많이 아프고, 많이 힘겹겠지. 그에 대해선 나도 유감이란다. 네가 조금이라도 이 나라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비트리체의 위로가 돌처럼 굳었던 마음을 녹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가장 큰 이해자는 비트리체였다.

함께 모든 상황을 보고, 겪고, 들었으니까.

무표정하던 얼굴이 서서히 울음으로 일그러진다. 끝까지 눈물 한 방울 뱉어내지 않으려 했던 고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레그리아는 비트리체의 품 안에서 울고 말았다.

“그래, 그래. 억울하지. 이딴 나라에 오게 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와서 고생만 하고.”

“돌아가고, 싶어.”

“안타깝게도 신성계로 돌아가는 길은 나도 몰라. 네가 떠난들 내가 다시 그 몸을 입고 살아날 수 있는 것도 아니란다. 나는 이미 육신과의 끈이 떨어졌으니.”

“……아.”

“이제 그 몸은 네 거야. 네가 쓸 수밖에는 없지.”

조금 냉정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 덕에 오히려 현실이 직시됐다.

도망치고 싶다. 달아나고 싶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비트리체는 그런 말들이 모두 공허한 빈껍데기임을 알아본 것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비트리체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두 다 아니까.

눈물을 닦아낸 레그리아는 진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트리체가 오구구 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곧 너를 떠날 거야. 우리에게 주어진 건 오늘 밤밖에 없어. 그러니 웃어 줄래?”

“……떠난다고? 어디로…?”

“글쎄.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으로. 이 험난한 곳에 너만 던져 두고 가자니 마음이 안 좋지만, 원래라면 우리가 이렇게 의식 속에서 만나는 것도 안 되는 거였을 테니.”

가지 마.

무심코 그렇게 붙잡으려던 레그리아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비트리체의 몸을 빼앗아 놓고는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하지만… 가슴이 아팠다. 오늘 일어난 그 어떤 일보다도 그녀를 슬프게 만든 건 방금 비트리체가 던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쁜 일이 연속하여 일어나는 데 충분히 이골이 났다고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비트리체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는데.

최악의 날에 친구마저 잃게 되다니.

“디트리히 말이 맞아. 내 의식이 어째서 육신에 머물러 있는지는 몰라도 떠나든지 너를 내쫓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거였겠지.”

“그게 무슨….”

“아, 그것부터 설명해 줘야겠구나. 디트리히가 찾아온 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했지?”

비트리체의 말에 레그리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파티 날, 휴게실에 찾아왔던 디트리히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꼭 비트리체 누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며 단 몇 마디를 했을 뿐이다. 아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기에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이따금 무슨 말을 했을까 하고 궁금했던 적은 있지만, 가족 간의 사적인 대화일 수 있으니 레그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건 어릴 적, 나와 디트리히가 함께 만든 비밀 언어야. 이미 있는 언어를 재해석하여 단어를 만들고 우리끼리만 알아듣게 문법을 새로 정했지.”

“……?”

“공작이 모르게 우리끼리 비밀 대화를 주고받고 싶었거든.”

세상에,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어쩌면 비트리체는 대단한 언어학자가 될 만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 냈다니.

놀란 레그리아를 향해 비트리체가 어깨를 으쓱했다.

“디트리히는 내가 네 안에 있음을 알더라. 표드르가 말해 줬겠지.”

“아.”

“왜 이렇게 된 건지는 몰라도 만약 고대 주술 같은 것에 의한 거라면, 한 몸에 의식체가 둘인 건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것이 뻔하지. 그러니 디트리히는 선택하기를 원했어. 나는 내 선택을 했고.”

담담한 음성엔 한 점 후회조차 없다. 오히려 그녀에게 몸을 넘기고 사라질 수 있어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발 이 몸을 다시 가져가라고, 그리고 그녀가 죽겠노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차라리 행복할까.

하지만 레그리아는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처절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네 마음, 다 알아. 시시한 죄책감은 갖지 않기로 했잖니? 기억해?”

“…응.”

“착하지.”

비트리체가 그녀의 볼을 쓸었다. 그러면서 미련 없는 얼굴로 후후 웃었다.

“나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겠지만 너는 여기 남겠지.”

“…….”

“너와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은 몰랐어서 망설여지네. 과연 모든 진실을 아는 게 네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다른 신성인들처럼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세상에는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나은 진실도 존재한다.

그건 레그리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허나 판도라의 상자가 의미하는 것은 희망도, 경망스럽게 남의 비밀을 들추려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늘 생각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본 것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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