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무슨….”
“그러니 이토록 방종하게 군 거겠지. 오늘 널 찾느라 얼마나 많은 병력이 낭비되었는지 아나?”
그 병력 속에 당신은 없었으면서.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입술까지 새파랗게 질렸기에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전하, 옷을… 저대로 두시면 크게 앓으실 겁니다.”
이것저것을 챙겨온 에오스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미간을 좁힌 라히크는 그런 에오스에게 대충 손을 휘저어 나가라는 뜻을 전했다.
“누구도 들어오지 마라. 내가 허락할 때까지.”
“…예, 전하.”
쿵.
단절의 소리를 들으며 레그리아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라히크는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물러서겠지.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것 외에는 라히크가 내보이고 있는 저 분노를 감당할 길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
“평소엔 그 잘난 혀를 가만히 두질 못하더니 어째서 지금은 입을 닫고 있느냔 말이다!”
지금 라히크의 눈에는 얼어 죽어 가고 있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걸까.
말을 하고 싶어도 너무 지쳐서 머릿속이 그저 멍했다.
옷을 갈아입는 건 포기했으니 그냥 잠이라도 재워 주었으면.
이 모든 끔찍한 하루를 꿈속에 욱여넣고 밤새도록 차근차근 뜯어 살피고 싶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라히크는 떠날 생각도, 그녀를 내버려 둬 줄 마음도 없어 보였다.
“벗어라.”
“뭐….”
“스스로 벗어. 네가 모두를 따돌리고 나갔어야 한 이유가 무엇인지 봐야겠으니.”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최악으로 떨어지려는 걸까.
숨길 수 없는 경멸이 새어 나오자 라히크에게서 냉기가 더더욱 거세게 느껴졌다.
사람마다 다르게 닿아오는 열기와 냉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전자는 그녀를 도우려 하고 후자는 그렇지 않은 쪽인 모양이다.
이 냉기는 세비레이크 경의 내면에서 느꼈던 겨울과도 또 궤를 달리한다.
레그리아는 완연한 위협과 함께 위험을 동시에 느꼈다.
‘우선은 하라는 대로 해서 라히크를 진정시키기부터 해야겠지.’
굴욕적이지만…….
“…….”
털썩.
물을 잔뜩 머금어 무겁기 그지없는 가운이 어깨를 타고 흘러 카펫에 떨어졌다. 온통 젖어 쓸 수 없게 된 카펫 위로 물이 고여 번져간다.
그 뒤에는 허벅지며 가슴에 휘감겨 있는 귀찮은 잠옷을 벗을 차례였다.
비척거리며 일어서던 레그리아는 무릎에 힘이 풀려 그대로 넘어졌다.
하지만 라히크는 잡아 주지 않았다.
죄인을 보듯 냉엄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아, 아닌가.
죄인이라 판단되면 그냥 죽여 버리니까 아직까지는 의심 중일 뿐이구나.
그녀가 부정을 저지른 건 아닌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의처증에 걸린 남편처럼 그녀에게 모욕을 주어서라도 제 의심을 기어코 채우고 말 자였다.
‘나는 실망한 걸까.’
속옷만을 남기고 잠옷까지 다 벗어버린 그녀를 보던 라히크가 눈썹을 실룩였다. 뭔가 아주 불만스럽고 화가 난다는 듯한 태도에 레그리아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제 옷을 갈아입어도 될까.”
“하. 끝까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군.”
“그래, 몰라. 나는 산책할 자유조차 없다는 건지. 당신이 나가지 못하게 하니까 등불 하나 들지 않고 산책을 한 거잖아.”
“산책? 고작 산책을 했는데 그 깊은 호수에 빠졌다는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건가?”
“어두워서 발밑이 보이지 않았어.”
라히크의 금색 동공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더는 참아 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턱을 우악스레 쥔 그가 강제로 입을 벌려 키스를 해 왔다.
혀뿌리가 빠져 버릴 것처럼 거센 입맞춤이 눅진해지기 시작한 건 비벼지는 젊은 육체 사이에 불이 확 인 순간부터였다.
레그리아는 그의 목을 껴안지도, 더 달라며 아양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나무토막처럼 견뎌낼 뿐, 어떤 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이 빌어먹을 몸은… 그녀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 대질 않은가.
“흣, 흐으…!”
춥다. 너무 추워서 매달리고 싶어 허리가 절로 들썩였다. 레그리아는 제 몸을 엄히 꾸짖으며 라히크를 밀쳐내려 하였으나 그녀의 기색을 짐승 같은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있나.
고개를 틀며 그가 혀를 추잡스레 빨아댔다. 타액 한 방울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제 것이라는 양 그녀의 깊은 곳까지 침투해 숫제 영혼마저 핥아댈 기세다.
그런 그가 너무 부담스럽고 싫어 몸을 움찔거리자 라히크는 입을 맞댄 채로 목을 울려 경고했다. 단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기만 해보라고.
“그, 흐으, 아!”
그녀의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올려 한 번에 잡아 버린 라히크가 그대로 침대로 끌고 가 눕혔다. 제 위에 올라탄 남성이 이미 빳빳하게 흥분해 있다는 걸 레그리아는 벗은 허벅지에 찔러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이내 혀에 퍼붓던 집착을 다른 곳으로 돌린 라히크는 입이 하나밖에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듯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
진짜 맹수에게 씹히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아파 몸을 틀었으나 단단히 잡힌 손목 탓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레그리아를 완전히 결박한 그는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듯 제 사냥감을 천천히 음미했다.
춥, 츄웁.
목덜미를 빨아 집요하게도 흔적을 새기는 소리가 방안을 요사스레 울렸다. 분명 문밖에 서 있을 에오스에게 소리가 다 들리고야 말 것 같아 레그리아는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았다.
라히크의 기분에 따라 이런 일을 당한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다.
그가 원하면 얼마든지 다리를 벌려 줘야 하는 처지라지만 알고 있는 것과 정말 그런 대우를 받는 건 별개였다.
“젖었군.”
하지만 낮게 내리깔린 음성이 귓가를 저미듯 스며들자마자 아랫배가 확 꼬여들며 야트막한 신음이 샌다.
이건 정말 그녀의 감정이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육체의 반응이었다. 라히크의 음성이 끔찍하게 섹시한 탓이다.
“이렇게 질척해서야. 누가 보면 황태자비가 아니라 어디 사창가에 구르던 계집인 줄 알겠어.”
“호수에, 빠졌, 흣!”
호수에 빠졌기 때문에 몸이 젖은 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려 하였으나 라히크는 또다시 그녀의 혀를 잡아챘다. 어디 더 지껄여 보라는 듯이.
굳은살 박인 남자의 손이 허벅지를 벌려 안쪽의 여린 살을 쓸어낸다. 호흡이 빼앗기느라 딱 죽을 것 같았던 레그리아는 그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해 불안했다.
독기만이 남은 손으로 바위 같은 어깨를 쳐댔지만 그래 봤자 달걀을 던지는 것보다도 못한 움직임이었다.
타액을 싹싹 훑어가며 그녀의 입천장을 간질이고 목구멍 안쪽까지 더듬어대려는 그의 집요함이 숨을 앗는다. 꼴딱꼴딱 넘어가려는 그녀의 의식을 단번에 현실로 끌어내린 건 제 손으로 단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금역에 나타난 침입자 탓이었다.
“뭐, 흣!”
“이런. 내 비께서는 거칠기도 하시지.”
너무 놀라 혀를 깨물어 버렸다. 순순히 떨어져 나간 라히크는 선혈이 흐르는 입가를 대충 닦아내며 흐트러진 채 숨만 색색 내쉬는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뭘 하는 것 같은데.”
“놔. 결혼도 안 했는데 이런 더러운 짓!”
“더러워?”
라히크의 입매가 위험해졌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레그리아는 어떻게든 달아나려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었다.
그 무력감을 천천히 즐기며 라히크가 느른히 반문했다.
“스스로 벗은 것이 누구인데.”
“그건 당신이 벗으라고 해서…!”
“곱게 말을 들었다? 고마운 일이군. 다른 사내가 그리 시켜도 고이 벗어 주겠어.”
억지다. 라히크의 동공 속에 들불처럼 타오르는 분노를 알아차린 레그리아는 어떻게든 정신 접촉을 하려 시도했다.
죽을 것처럼 피곤하지만 라히크를 진정시키려면 이 수밖에 없다. 지금 그는 너무나 위험했다.
“진작 이럴 것을 그랬군.”
“컥!”
그러나 그녀는 다시 튕겨져 나왔다.
그의 내면에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 강력한 거부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아파…!’
머리가 얼얼하고 심장 박동이 한계까지 치솟아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보통 거부를 당하면 바로 구토를 한다던데 먹은 것 없는 속에서는 신물만이 치솟았다.
“온갖 사내에게 웃음이나 팔고 다닐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그 격에 맞게 대우했을 텐데.”
“라히, 크…!”
정신이 조각조각 부서져 발치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라히크의 손아귀가 그녀의 목을 조르며 숨통을 틀어쥐었다.
숨을 쉴 수 없어 버둥거리자 더더욱 우악스레 누른 그는 제 용도를 전혀 다 하지 못하는 천조각 아래를 너무도 쉽게 침범했다.
뜨겁다.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피부가 차갑게 식은 가슴을 뭉그러트리며 억지로 열기를 피워 내려 든다. 정점을 비벼내며 물에 젖은 장작에 불씨를 붙이려 한들 연기만 날 뿐이라는 걸 알 텐데도.
“그만! 그만, 해.”
다른 곳에 집중하느라 손아귀 힘이 약해진 찰나, 레그리아는 헐떡거리며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무너지고 싶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조금이라도 황태자비로 존중한다면. 여기서… 멈춰.”
“……끝까지 명령질이군.”
그래서 나는 너를 미워한다.
단단하게 쌓아 올린 벽을 끝내 허물어 바닥부터 무너져 내리게 만드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을 길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