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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44/134)
  • 44화

    라히크의 눈이 가늘어지는 게 멀리서도 보이는 것 같다.

    반대쪽 밀실을 벗어나려던 라히크의 걸음이 우뚝 멈추는 소리를 들은 레그리아는 손을 꽉 쥔 채 몸을 바싹 웅크렸다.

    그런데 라히크가 그녀가 숨은 석벽으로 다가와 틈을 확인하려 한 바로 그 순간.

    “퉷.”

    …비칸이 라히크를 향해 모욕적으로 침을 뱉었다.

    “나는 네 이야기를 들었다. 아비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들.”

    “……뭐라?”

    “나는 너를 동정한다.”

    설마 그녀를 돕기 위해 일부러 라히크를 자극하는 건가?

    방금 제 혈족이 눈앞에서 죽었다. 그러니 엄청난 분노와 함께 절규를 해도 부족할 텐데, 비칸은 그런 감정을 마구 분출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이제는 무려 ‘동정’이라는 말까지 꺼내다니.

    저건 절대 라히크가 참아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틈에 서둘러서…!’

    이번에는 발아래를 조심하며 빠져나간 레그리아는 끼익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문을 도로 닫았다.

    어떻게든 들키지 않은 것 같기는 한데 문제는 또 있었다.

    분명 탑 근처에는 사람들이 쫙 깔려 있을 것이다.

    들어온 길로 다시 빠져나가는 건 그녀가 탑에 계속 있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초조했지만 차분히 생각을 잇던 레그리아는 문득 자신이 뭔가를 꽉 움켜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손바닥에 자국이 깊이 팰 정도로 누르고 있었던 것은… 바로 구리 열쇠였다.

    ‘설마.’

    이 좁은 폭 문의 열쇠인 건가?

    생각할 시간은 없었기에 레그리아는 곧바로 문의 잠금 고리에 열쇠를 끼워 넣고 돌렸다. 그러자 누군가 미리 기름칠을 해 둔 것처럼 열쇠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은 레그리아는 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이건 수로. 혹은 쓰이지 않은 지 꽤 시간이 지난 하수도다.

    어쩌면 호수 가까이 연결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길에 반색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날개가 달린 벌레 떼가 한순간 훅 날아올랐다.

    ‘윽…!’

    벌레를 싫어하기에 반사적으로 물러선 그녀는 사리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뱉어내며 그대로 울음을 흘릴 뻔했다.

    사실은, 사실은 이 모든 게 그저 꿈만 같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악몽이면 정말 좋을 텐데, 늘 현실은 보다 지독하지.

    라히크가 차라리 좋은 사람이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그게 안 된다면 저 정도로 미치지 않기라도 하면 좋았을 것이다.

    세상 그 누구라도 저런 장면을 본 이상 결혼을 할 수는 없을 터.

    제 눈으로 똑똑히 본 방금 상황은 오해도 무엇도 아니니까.

    ‘사람 머리가… 그렇게 낙엽처럼 아무렇게나.’

    우욱.

    토기가 올라와 레그리아는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라히크와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오른다.

    그의 품에 안겨 샘에 들어갔던 날. 그의 손을 잡고 꾸벅꾸벅 졸았던 시간. 그리고 파티에 나갔던 그 화려한 기억 위로 짙붉은 피가 덮였다.

    이젠 라히크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일 자체가 다 그의 자작극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직 그 기억 하나가 라히크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는데.

    하긴, 그때도 그는 암살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였지.

    사람의 목숨을 앗는 것이 라히크에겐 너무나 흔하고 쉬운 일이다.

    전쟁 중이니까, 싸우지 않으면 벨리그레엄이 무너질 테니까. 그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 너머.

    그녀가 보기에 라히크는 살육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았다.

    ‘이건 장난도 연극도 아냐.’

    극심한 긴장 탓에 잠시 잊고 있던 추위가 맹렬히 달려들어 의지와는 달리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댔다.

    ‘아.’

    더는 못 걷겠어.

    나약한 생각인 건 알지만 찰박거리는 찬물을 휘저으며 걸어가자니 다리가 축축 늘어진다.

    자꾸 방금 목격한 장면이 눈앞에서 잔상처럼 떠도는 것도 문제였다.

    게다가 수로는 또 어찌나 긴지,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나오는지도 알 수가 없고…….

    비척거리며 끝도 없는 어둠을 홀로 걷자니 이대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나름대로 불행엔 이골이 났다고 여겼지만, 그 또한 그녀의 자만이었음을.

    레그리아는 뒤에서 당장이라도 라히크가 나타나 그녀의 목을 조를 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멈춰 서지 않는 건 관성 때문일까.

    비루먹은 조랑말 같은 자신이라도 예뻐해 주려고, 초라한 삶도 아껴주려고 노력했던 과거의 자신이 지금의 이 한 발을 내딛게 만든다.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어떻게 죽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나왔는데.

    그렇게 고집스레 허우적거리던 레그리아의 두 눈에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 같은 빛이 보였다.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깜빡이고 다시 보았지만 형광 도료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있다.

    누군가 한 손에 도료를 푹 묻힌 채 천장을 따라 주욱 그은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길을 알려 주고 있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이미 걸어 나온 천장에도 도료는 발려 있었다.

    그저 비탄에 빠진 그녀가 바닥만을 보고 걸어 몰랐을 뿐.

    ‘저건 에화가 해 둔 거겠지.’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레그리아는 고개를 들어 올린 채로 입을 살짝 벌렸다.

    형광 도료는 빛을 발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도 ‘보일’ 뿐.

    천장을 한 번이라도 보았더라면 쉽사리 발견할 수 있었을 테다.

    절망과 슬픔을 번갈아 떠돌며 한탄을 일구기 전에, 희망을 찾아 딱 한 번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 보았더라면.

    ‘에화. 당신이란 사람은.’

    왜 이렇게 상냥한 거야?

    일순 눈물이 핑 돌았다.

    이건 배려다.

    그녀의 이동 경로까지 모두 계산해서 적절하게 배치해 둔 도움들이 등을 부드럽게 떠밀어 나아가게 하고 있었다.

    이 끝에 이르면 안전해질 수 있다는 듯이.

    분명 에화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녀를 움직였고 끝내 충격적인 광경마저 보게 만들었으나 레그리아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지.

    계속해서 마음 한편에선 라히크가 괜찮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제게 보여 주는 모습들이 나쁘지 않아서. 그래서 다소 제멋대로에 성질이 못됐다 하더라도 인간성 자체가 없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그녀는 에화 덕분에 똑똑히 깨닫게 된 것이다.

    라히크는 절대 피해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선 그에게서 반드시 달아나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출구야…!’

    레그리아는 철창이 쳐진 수로의 끝에 다다라 고개만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이 주변엔 아직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저편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긴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건 아니니 괜찮았다.

    “비전하!”

    “계십니까! 비전하!”

    병사들이 쇠방망이를 두들기며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저렇게 해서 숲에 사는 위험한 짐승을 내쫓는 것이다.

    그녀가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레그리아는 살짝 벌어져 있는 철창 사이를 조심스레 빠져나온 뒤 몸을 낮춰 살금살금 움직였다.

    이미 비는 그쳤다.

    머지않아 달빛이 이지러진 작은 호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렵지 않게 찾아낸 레그리아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두 발에 힘을 주고 그 안에 뛰어들 뿐.

    ‘차가워…!’

    호숫가의 일부는 이미 살얼음이 껴 있었다. 골이 울릴 정도로 찬물을 뒤집어쓴 레그리아는 헤엄은 애초에 포기하고 그저 기어들어 가려 버둥댔다.

    호수 밖이 아니라, 호수의 바닥으로.

    미친 듯이 발을 문질러대고 머리칼에 엉겨 붙었을지도 모를 거미줄을 떼어내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 물속에서 보는 달도 아름답구나.’

    작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폭이 좁은 것이었나.

    새카만 호수는 그녀의 생각보다 깊었다.

    어느 순간 몸에서 힘이 풀려 아래로, 아래로. 빨려들 듯 느리게 떨어져 내리고 있던 그녀는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수면 너머로 달이 보인다. 아마도 영영 잊지 못할 금빛 달이…….

    “레그리아 로에르멜!”

    쿨럭, 쿨럭!

    갑작스레 팔이 잡혀 건져 올려지는 바람에 폐부를 열고 숨이 가득 들어왔다. 물과 함께 기침을 내뱉은 그녀의 시야에 악귀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린 라히크가 존재했다.

    “네가 감히! 감히 죽어서 나를 떠나려고 했나?”

    저를 붙들고 고함을 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데 그냥 실소가 났다.

    방금 사람을 죽인 손과 저를 구한 손이 같다.

    다른 이를 죽이는 건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그녀에게는 스스로 죽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니.

    “웃어? 완전히 실성한 건가?”

    “아니, 그냥…….”

    라히크가 그녀를 들어 안았다. 언제고 그러했다는 듯이. 그 자세가 제일 편하다는 것처럼.

    레그리아는 담요를 들고 허겁지겁 뛰어오는 셀린과 조지 경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바닥에도 거울이 있을까 싶어서.”

    “미쳤군.”

    라히크가 단언하며 호숫가를 벗어났다.

    레그리아는 제게 둘러지는 양털 담요를 꾹 움켜쥐며 멀어지는 호수를 응시했다.

    저 아래에 거울이 있을 리가 없지.

    그녀는 이미 탑의 지하에서 또 다른 거울을 보았으니까.

    ‘어째서 모든 진실은 바닥에 숨겨져 있는 걸까….’

    벽난로에서 불꽃이 힘차게 타오르고 있는 방안에 도착한 뒤, 레그리아는 몸에서 힘을 뺐다.

    이제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질 차례일 테니까.

    하지만 라히크는 그러지 않았다.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는 듯한 눈빛을 하며 목엔 핏대가 서 있기까지 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신사적인 매너를 지켰다.

    아직까지는.

    “황태자비 자리가 네게는 그토록 가치 없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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