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34)
  • 43화

    “꽤 재미있는 술수였다.”

    소름이 쭉 끼칠 정도로 낮은 음성이었다. 귓바퀴를 타고 찌르르 울리는 목소리는 아는 이의 것이라 더욱 공포스러웠다.

    꼭 그녀에게 하는 말 같아서.

    그러나 레그리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목소리는 반대편 밀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네 야만족 친구들이 벨리그레엄을 방문했더군. 그들 모두 즐거운 관람을 했다지.”

    라히크다.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한 음절마다 새겨진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라히크의 등장과 동시에 앞서 불어오던 한기와는 격이 다른 기운이 휘몰아친다.

    손끝부터 얼어붙어 숨 쉬던 모습 그대로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끔찍한 느낌. 몸속을 맴돌아야 할 피가 차게 식어 굳어 버리고 동공조차 돌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인간을 양식으로 삼는 괴물을 만나면 이럴까.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뼈째로 씹어 먹힐 것 같아 레그리아는 호흡마저 멈추었다.

    이를 완전히 드러낸 포식자의 살기는 죽도록 무섭다.

    헌데 저 기세를 맨몸으로 맞으면서도 초원의 전사는 담담할 뿐이었다.

    사자를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수천 마리 물소 떼. 무릇 풀을 뜯는 짐승이 가진 뿔처럼 남자는 그저 강건하여 레그리아는 그를 다시 볼 수밖에는 없었다.

    “보아라, 네 친구를.”

    툭.

    라히크가 뭔가를 던졌다. 그러고 나서야 북풍처럼 매서운 한파가 그쳐 레그리아는 자신의 목을 더듬을 수 있었다.

    ‘나, 살아 있구나.’

    산 채로 죽음을 체험하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온몸이 가늘게 떨렸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더 지켜보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지금 돌아서 나간다면 반드시 라히크가 알아챌 터다.

    그간 지켜본 바로는 라히크는 청력이 특별히 좋은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에겐 육감이라는 것이 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꼭 사냥 직전의 맹수 같은 축복.

    ‘라히크가 나가기 전까지 움직여선 안 돼.’

    그건 먹잇감으로서의 본능이었다.

    “내 혈족은 명예롭게 죽었다. 그는 전사의 땅에서 낙원을 누리리라.”

    초원의 전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투박한 말투로 내뱉는 벨리그레엄어는 그리 유창한 것은 아니었으되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레그리아는 숨죽인 채 벽 틈에 눈을 붙이고 안쪽을 살폈다.

    아까 라히크가 던진 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낙원 같은 건 없다고 그리 말해 주어도 알아먹지를 못하는군.”

    “네가 무어라 하든 초원인은 신념을 지킨다.”

    “그 잘난 네 혈족이 죽어갈 때 무어라 비명 질렀는지 아나?”

    “전사의 죽음을 모욕하지 마라.”

    “그래, 기꺼이 들려주마. 그러기 위해 한 놈은 살려서 데려왔으니.”

    사납게 일그러진 라히크의 옆얼굴이 시야에 아로새겨졌다.

    레그리아는 이미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녀의 앞에서 보이는 라히크의 모습과 지금 라히크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서.

    ‘왜 저렇게 악의에 차 있는 거지?’

    그녀는 초원 연합국과 벨리그레엄 사이에 얼마나 증오의 골이 깊은지 모른다. 모르기에 함부로 이 상황을 판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히크가 초원에서 온 전사 한 명을 저렇게 붙잡아두고 유린하는 것이, 벨리그레엄 신민을 안심시키고 지키는 일일지도 몰랐다.

    전쟁이라는 건 원래 선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라히크가 옳다거나 그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나는… 저런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싶지 않아.’

    살을 부대끼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오늘 이 장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에게 안길 때, 그와 마주 앉아 식탁에 있을 때.

    오늘 이 장면은 제 삶의 순간순간에 말뚝 박혀 가장 행복하다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보란 듯 발목을 걸어 넘어트릴 게 분명했다.

    그러고는 속삭이겠지.

    이런 남자가 네 자식의 아버지라고.

    “투힌!”

    “비칸! 비칸! 죽었어! 모두…!”

    그때, 덩치 큰 사제들이 어떤 초원인을 질질 끌고 와 내팽개쳤다.

    서로를 부르는 이름으로 레그리아는 매달려 있던 전사의 이름이 비칸임을 알게 되었다.

    “패배자끼리 다지는 우정이라니. 실로 눈물겹기도 하지.”

    “아아악!”

    우두둑. 두둑.

    연골이 연신 짓이겨지는 소리가 고막을 할퀴는 듯한 비명과 뒤섞여 울려 그녀는 이제 어질하기 시작했다.

    저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저게, 지금.

    짧은 사슬을 뒤흔들며 벗어나려 애를 쓰는 비칸의 두 눈에 증오가 서려 있다. 라히크가 투힌이라 불리는 그의 혈족을 서슴없이 짓밟은 탓이다.

    “네 혈족의 머리가 저와 같이 굴러다니는 꼴을 보기 싫다면 슬슬 너희의 근거지를 읊어라. 그런다면 너와 이 자만큼은 살려 주마.”

    “악마! 끄아아아악!!!”

    “내 제안이 너그러울 때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 것이다. 야만족.”

    이어지는 라히크의 조롱에 비칸의 두 눈이 형형하게 번득였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 특유의 무력감과 분노가 여기까지 전해져 온다.

    결국 투힌은 완전히 걸레짝이 된 제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아직… 아직 너무 어리잖아.’

    라히크가 한 걸음 옆으로 옮기는 바람에 투힌의 얼굴을 보게 된 레그리아는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넘었을까 싶을 만큼 앳되다.

    조지 경이나 에화보다도 어린 게 확연히 드러나는데 저런 자를 잡아 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고문하고 협박을 해?

    차라리 끌고 온 자가 차라리 어른이었더라면 이런 역겨움까지는 일지 않았으리라.

    이 상황 자체를 납득하는 건 아니지만 라히크 역시 어쩔 수 없이 저러는 거라고, 다 벨리그레엄을 위해서라고.

    그렇게 애써 생각하였던 것이 산산조각 난다.

    어른거리는 등불 아래에 드러난 라히크의 얼굴은… 분명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완벽한 우위에 서 있는 이 상황을.

    ‘최악이야.’

    황태자로서의 그는 우수할 것이다.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성군은 되지 못하더라도 난세를 이끌 폭군은 될 수 있을 테지.

    그러나 그건 제 남편이 아닐 때에나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거였다.

    적에게 저토록 잔혹하게 구는 남자가 아내를 존중하고 자식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정복할 거리가 없다면 저 잔인함과 폭력성이 누구를 향하게 될까.

    레그리아는 그게 두려웠다.

    저보다 훨씬 커다란 남성에게 얻어맞은 기억은 나이가 들어서도 흉을 남긴다. 제 자식에게 저와 같은 상처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정말 조금도.

    “죽여라! 전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애석하군. 너 정도로는 저자의 입을 열기에 충분할 만큼 약하지 않은 모양이니. 다음엔 너보다 더 하찮은 것으로 끌고 와야겠구나.”

    “이… 이 악마!!!”

    비록 레그리아는 벨리그레엄 인에 빙의하였으나 어린 초원 전사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하여 라히크가 마침내 검을 들어 내리치려는 자세를 취했을 때, 레그리아는 무슨 수를 쓰든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려 당장 그 행동을 멈추게 하려 했다.

    만약 비칸이 투힌이 아니라 그녀를 똑바로 보며 느리게 고개를 젓지 않았더라면.

    분명하게 그녀에게 의사를 전달하지 않았다면… 레그리아는 기필코 소리를 내질렀을 테다.

    “……!”

    그리고 그 다음 일은,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 뒤죽박죽으로 섞여 버렸다.

    툭.

    ‘이크’ 하는 소리를 내며 피하던 사제의 발에 채어 굴러간 그 ‘무엇’을 레그리아는 보고야 말았다.

    부릅뜬 채 새카맣게 죽어 버린 눈.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한… 자신에게 벌어진 죽음을 믿지 못하는 자의 표정이 고스란히 박혀 있다.

    목만 남은 채로.

    이윽고 피 분수가 치솟는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느리게, 느리게만 보여서.

    기어코 돌 틈을 파고든 혈흔이 그녀의 눈에까지 튀는 동안 레그리아는 넋을 놓은 채 망연히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방금… 죽인 건가?

    “전하, 레그리아 님의 의복이 찢겨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갑작스레 나타난 에오스 때문이었다.

    에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쪽을 훑더니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채 라히크에게 어떤 천 조각을 내밀었다.

    아까 그녀가 아무 덤불에나 던져둔 잠옷 조각이다.

    “호수 쪽 방향인데 같은 위치에 슬리퍼와 우산이 떨어져 있는 것 또한 발견하였습니다. 현재로서는 정황상 호수 쪽으로 가신 듯합니다.”

    “기사들은.”

    “그 누구도 레그리아 님의 흔적을 본 적 없다고 합니다. 병사들은 아직 추궁 중에 있습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레그리아는 토끼처럼 뛰어대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통제하려 애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그건 그녀가 잘하는 일 중 하나였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파 오기는 하였지만, 맥박을 짚으니 그리 빠르게 뛰지는 않는 걸 보니 성공적으로 제어를 한 모양이다.

    ‘지금은 놀라면 안 돼. 충격도, 무너지는 것도… 모두 나중에.’

    에오스가 이 정도까지 라히크의 심복일 줄은 몰랐다.

    그 사실에 배신감이나 충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안도를 해야 마땅했다. 그래야 앞으로 더욱더 에오스를 조심할 테니까.

    레그리아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이성을 유지하고 머리를 차갑게 식히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제 꼴이 아주 엉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지투성이에, 옷은 온통 젖었고 옷은 찢기기까지 했지. 발도 먼지로 인해 새카매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호수로 향했다면, 어떻게 먼지를 뒤집어썼겠는가?

    ‘내가 살려면, 에오스의 의심을 사실로 만들어야만 해.’

    얼른 호수에 뛰어들어 이 먼지를 씻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기절해 버리면 가장 좋았다.

    결단을 내린 레그리아는 에오스와 라히크가 함께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서둘러 뒷걸음질을 쳤다.

    맹세컨대, 방금 바닥에 지져 끈 양초에 뒤꿈치가 부딪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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