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34)
  • 42화

    “아파라….”

    바닥에 부딪친 레그리아는 눈가를 찡그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떨어지면서 무심코 손목으로 바닥을 짚는 바람에 인대가 늘어났는지 시큰거리는 통증이 몰려온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멈추기엔 이미 멀리 와 버렸지.

    자신이 만들어 둔 그 모든 서툰 흔적들이 먹히기를 신께 기도하고 싶으나 그녀는 종교조차 가지고 있지 않기에 기댈 곳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제 두 발로 묵묵히 걸어 나갈 뿐.

    ‘목이 따가워.’

    얼마나 먼지가 많은지 몇 번 숨을 내쉬었을 뿐인데 벌써 입안이 텁텁했다.

    레그리아는 제 얼굴에 들러붙는 거미줄을 헤치며 벽을 더듬었다.

    다행이라면 어둠에 금세 익숙해진 시야 덕에 길을 분간할 수는 있다는 것 정도.

    ‘이게 뭐지?’

    몇 발을 떼어놓자 벽에 걸린 자루가 보였다.

    만져 보니 끈이 삭아 있지 않다. 새것 같은데.

    혹 에화가 미리 준비를 해 둔 건 아닐까 싶어 입구를 여니 그 안엔 성냥과 작은 양초 그리고 연고가 있었다.

    그녀가 이런 것들을 필요로 할 줄 이미 알았다는 듯한 구성에 살짝 놀라며 레그리아는 서둘러 성냥에 불을 붙였다.

    탁탁, 치익.

    얼어붙은 손 탓에 두 번 정도 헛손질을 했으나 결국 불은 붙었다.

    작고 가느다란 양초로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엔 양초 꽂이까지 있어 레그리아는 촛농에 손을 데지 않을 수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보통 탑이라는 게 높이 세워놓은 구조물이니 계단은 아래가 아니라 위를 향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방금 그녀가 들어온 입구에서 어딜 둘러보아도 위로 갈 수 있는 수단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래, 아래로 이어져 있을 뿐.

    새카맣게 입을 벌린 입구가 그녀를 단숨에 삼켜 씹어 버릴 것만 같다.

    대체 어떤 악의적인 비밀이 숨어 있기에 저토록 어두운 걸까.

    대저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것들이 암흑을 틈타지 않던가.

    레그리아는 입술을 사리물고 걸음을 뗐다.

    맨발로, 소리 하나 나지 않게.

    다행히 계단은 미끄럽기만 할 뿐, 뾰족한 돌조각 따위가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누군가 이미 청소라도 해 두었다는 듯이.

    양초는 작았지만 한 발 앞을 비춰 주기엔 충분하였으므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나는 폭이 넓고, 다른 하나는 좁다.

    “…….”

    먼저 좁은 폭 문을 열어보기로 했지만 단단히 잠긴 탓인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포기한 그녀는 넓은 폭 문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문을 여는 손이 떨린다.

    이번엔 잠금이 되어 있지 않아 쉽사리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 밀실이야.’

    공기가 제대로 통하지도 않는 듯 퀴퀴한 냄새가 난다.

    거기서 그녀가 발견한 건 아무렇게나 뒤집힌 채 썩어 가고 있는 라탄 바구니와 벌레의 집결체가 되었을 듯한 낡은 이불이었다.

    ‘누가 여기서 살았나?’

    레그리아는 한쪽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는 책 무더기를 보고 무릎을 굽혀 양초를 가까이 가져가 제목을 확인했다.

    <수생생물학>, <법의학자가 되기 위하여>, <신은 죽었다>.

    대부분이 이런 식의 꽤 어려운 전문 서적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런 두꺼운 책 아래에 동화책이 서너 권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엄마, 아빠 새가 날아가요…?’

    개중 가장 해져 낱장이 떨어질 것처럼 간당거리는 책을 펼쳐 든 그녀는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시장에서 사 온 마법의 새 한 마리와 새장. 밤중에 열린 새장의 문을 통해 날아가 버린 마법의 새. 그걸 잡으려고 허둥거리는 부모님.

    하지만 새는 결국 잡히지 않고 창문 틈을 통해 사라졌고 화자인 아이는 그 모습을 보며 ‘안녕, 잘 살아야 해.’라고 말한다는 내용이다.

    그다지 특별할 건 없었다. 뭔가 그녀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것도 없는 듯했고.

    ‘그냥 이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가?’

    의도를 가늠할 수가 없다. 이젠 그가 그냥 그녀를 놀린 건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펼친 그녀는 뭔가가 제 발에 툭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허리를 굽혀 주우려 했다.

    “이 귀찮은 새끼!”

    그러던 바로 그때.

    레그리아는 석벽을 타고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움직임을 멈췄다.

    “이래도 입을 안 여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그 불쾌한 목소리는 아주 지척에서 들렸으나 바로 옆엔 사람이 없었다.

    물건을 주워든 레그리아는 그게 뭔지 확인할 새도 없이 움켜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빛이야.’

    이끼가 낀 돌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그 말인즉, 이 벽 반대편에 또 다른 밀실이 있다는 뜻이었다.

    레그리아는 자신이 가진 이 미약한 빛이 새어 나갈까 싶어 황급히 양초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돌 틈에 눈을 가져다 댔다.

    저쪽에서 어마어마한 한기가 몰아치고 있다.

    한겨울을 가져다 가둬둔 것처럼 시린 기운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도 넌 입을 열지 않을 거지? 그럼 물부터 가자고.”

    촤아악!

    양동이에 담긴 물이 누군가를 향해 쏟아졌다.

    레그리아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고문 장면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마 그녀가 절대로 봐서는 안 될 일이었을 거라는 것도.

    “와, 독한 새끼. 신음 한 번을 안 내네요. 소금물이라 쓰라릴 텐데.”

    “너 지금 이 야만족 새끼 편을 드는 거야, 뭐야?”

    “아, 아니. 저는 그 말이 아니라….”

    “모자란 놈 같으니라고는!”

    반대편 밀실에 있는 사람은 총 세 명.

    아마도 붙잡혀 있는 건 초원 연합국 출신이고 고문하는 쪽은 벨리그레엄인인 듯하다.

    덩치가 상당한 체형을 살피던 레그리아는 저들이 사제임을 깨달았다.

    그것도 지나가며 한두 번 정도 마주친 적 있는 자들이다.

    그녀에게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하던 자들.

    “채찍을 가져와! 이번 주에도 전하께 드릴 말씀이 없었다간 낭패를 보는 건 우리이니.”

    “예, 예!”

    덩치가 자리를 비키자 레그리아는 잡혀서 갇힌 자의 몰골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신이시여.’

    저게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짓인가.

    너무나 잔혹한 몰골이다.

    식사를 아예 주지 않은 건지 남자는 상당히 마르고 초췌해진 상태였다. 살이 내려 근육이 억세게 두드러지는 온몸엔 구타당한 흔적이 가득했고 채찍질을 당하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듯 여기저기가 곪아 있었다.

    그냥 두면 세균에 감염되어 분명 죽을 것이다.

    지금도 이미 상태가 나빠 보이는데 저기에 대고 소금물을 부었다고?

    심장이 숨 가쁘게 뛴다. 불온하고 징그럽고 기분 나쁜 것을 목격하면 늘 이러했다.

    레그리아는 진저리를 치며 묶인 남자를 응시했다.

    두 손목에 가죽으로 된 구속구가 달려 있었고 그건 천장의 고리와 연결되어 있다. 무릎을 꿇린 채로 편히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게 해 둔 것부터가 심히 잔악하다.

    물론 저 남자가 아주 나쁜 사람이어서,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 저렇게 둔 걸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들려온 단편적인 정보로는 아마 초원 연합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만약 그게 이유의 전부고, 저 남자가 악랄한 죄인이 아니라면 레그리아는 결코 신황청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새끼, 아주 죽여 주마. 나를! 이렇게! 귀찮게 만들어?!”

    철썩!

    듣기만 해도 제 피부가 뜯겨나갈 것처럼 아픈 소리가 고막을 울려댔다.

    눈을 질끈 감은 레그리아는 혹 들킬까 싶어 최대한 감정을 통제하려 했다.

    감정은 잠시 접어 두자.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약 저 장면을 그녀가 보는 것이… 에화의 의도라면, 왜 그랬을까.

    ‘라히크의 적. 신황청에 의해 고문당하고 있는 자.’

    그렇다면 초원연합국 내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일 것이다. 아주 강하겠지.

    ‘내 탈출에 필요한 요소. 나를 쫓아올 추격자들에게서 지켜 줄 사람…….’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벽에 눈을 붙인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헐벗긴 채 매달려 매 맞던 남자가 고개를 번뜩 치켜들어 그녀가 숨은 곳을 정확히 노려본 것은.

    ‘헉.’

    기절할 정도로 놀란 레그리아는 뒤로 물러서다 가득 쌓인 책을 넘어트릴 뻔하고 간신히 멈춰 섰다.

    휘청거렸지만 순간적으로 무게 중심을 잘 잡아 들키는 일은 없었다.

    ‘분명히 날 봤어.’

    저자도 신성 기사일까?

    신성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엔 특별한 고유 축복 외에도 시력이나 청력, 후각, 육감 중 하나가 보통 사람의 몇 배로 뛰어나다고 한다.

    만약 저 남자가 시력이 뛰어나다면 그녀가 여기에 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만도 하지.

    ‘신성 기사라면… 가까이 갈 수만 있어도 내가 정신 접촉을 통해 기운을 안정시켜 줄 수 있어. 지금 상태보다 나아지도록 회복시켜 줄 수도 있을 거야.’

    아, 사제들만 없었더라도 접촉했을 텐데!

    탈출 모의를 하기에 가장 완벽한 상대가 아닌가.

    입안이 바짝 마른다.

    낯선 초원 출신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쏘아보고 있는 채였다.

    등을 내리치는 채찍 줄기가 제법 매서운데도 신음 한번 흘리지 않는다.

    그저 석벽 너머의 그녀를 보고 있을 뿐.

    그런데 연신 채찍질을 하던 사제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허리를 편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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