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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134)
  • 41화

    “복수도 쥐새끼처럼 궁상맞게 하는구나, 아우야.”

    “덕분에 내가 사흘 내내 굶었거든. 이쪽은 천하게 태어나 그런지 밥을 굶으면 한이 된단 말이지.”

    키득거리는 에화와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올리는 라히크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콰르르릉!

    하늘이 으깨지기라도 하는 듯 거나한 천둥이 세상을 울린다. 그걸 바라보던 에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제 발아래를 물컹거리는 늪으로 만들었다.

    잽싸게 빠져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 난 벼락 맞아 죽긴 싫어서 이만! 내 마지막은 사랑하는 아내의 품에서 눈을 감는 걸로 정해져 있거든.”

    “쥐새끼 같은 놈.”

    “부탁인데 한 사흘은 여기 가둬져 있어 주라, 형. 내가 준비한 성의가 있는데.”

    하느작거리며 장난스레 손을 흔드는 에화의 머리 위로 흐린 하늘이 파직거렸다.

    몇 초만 더 있어도 라히크가 가진 고유의 축복인 벼락이 온 사방에 메다꽂힐 것이다. 거기에 맞아 통구이가 되는 건 사양이었기에 에화는 늪 속으로 재빨리 빨려 들어갔다.

    “아아악!”

    “컥!”

    쾅! 콰앙!

    벼락이 무차별적으로 지면을 내리찍는 꼴을 마지막으로, 에화는 안락한 퀴제의 수도 지부로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에화가 미리 배치해 둔 퀴제의 암살자들이 늪 속에서 튀어 나가 라히크의 목줄기를 노린 기습을 퍼부었다.

    ‘자, 이제 이렇게 시간을 좀 끌어놓기는 했는데.’

    너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만약 그가 레그리아라면 반드시 오늘을 결행일로 고를 것이다.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 누구도 바깥에 나오려 하지 않는 날. 그리고 라히크가 없는 날.

    오늘이다 싶어 그가 직접 나서서 시간까지 끌어 주었으니 빠르게 움직이면 탑에 가 볼 수 있으리라.

    ‘자, 어서어서 움직여라. 느릿느릿 움직이면 귀신이 잡으러 갈 테니.’

    평민들이 어린아이에게 일을 시킬 때 부르게 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에화는 느긋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가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이 흘러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에화 시누엘 모스그라토.

    모스그라토 대공의 유일무이한 아들이나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비밀의 황자이기도 한 그는 판을 짜고 뒤흔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그리고 지금 그의 모든 재능은 레그리아를 제 곁으로 데려오는 것에 쓰이고 있었다.

    * * *

    ‘비가 몰아치는구나.’

    새벽녘, 먼젓번과 같이 남몰래 깨어난 레그리아는 아주 조용히 움직였다.

    우선 이불을 돌돌 말아 끈처럼 만든 뒤, 조심스럽게 벗겨낸 침대 시트와 함께 엮었다.

    그러는 내내 바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바람이 창문을 때려대는 굉음에 그녀가 만든 작은 소음 정도는 묻혀 버렸다.

    레그리아는 그렇게 만든 끈을 침대 다리에 묶어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려 두었다.

    마치 이걸로 탈출을 모의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물론 그녀는 이걸 사용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생각은 없었다.

    다쳐서 걷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신의 왼쪽 갈비뼈 근처의 경계는 삼엄했다. 갑자기 뛰어내렸다간 들키지 않을 리가 없다.

    ‘가장 안전한 건 조지를 통해 현관으로 나가는 거야.’

    누구도 그녀가 현관을 통해 제멋대로 들락거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램프 밑이 오히려 어둡다는 속담을 적절히 활용한 예시였다.

    ‘다만 나 때문에 만에 하나 조지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라히크가 조지에게 화를 내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녀가 현관을 통해 나갔음을 알면 난리를 치겠지.

    그래서 레그리아는 이걸 준비해 둔 거였다.

    탈출은 이걸로 하려고 했다고, 혹은 한 거라고. 어느 멍청한 사람이 현관을 통해 도망을 치느냐고. 조지 경을 통해 현관을 나선 건 그냥 정말 답답해서 산책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그런 식으로 항변할 방도를 만들어 둬야지.

    “비전하. 오늘도 나가십니까? 그런데 오늘은 날이 너무 안 좋은데….”

    “조지 경. 비 오는 날이 얼마나 운치 있는지 아는가.”

    “어음, 그렇기는 합니다만은… 오늘은 운치보단 비에 쫄딱 젖으실 거예요.”

    현관에 도착하자 조지 경이 그녀를 맞아 주었다.

    레그리아는 그의 만류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직접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허둥거리던 조지 경이 결국 우산을 펼쳐 들고 그녀에게 씌워 주었다.

    “꼭 나가고 싶으시면 진짜 잠깐만 계시는 겁니다. 잠깐만요.”

    “그럴게. 늘 다니던 길만 다니고.”

    “아! 하긴, 숲 쪽은 나무가 빽빽하니 빗방울이 좀 덜 떨어지긴 할 겁니다.”

    자기는 온통 비를 맞으면서 그녀에겐 우산을 주는 게 참 기사답다.

    레그리아는 제 목적을 위해 조지 경을 이용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며 걸음을 서둘렀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봐야 할 것을 보고 조지 경을 원래 자리에 돌려 두어야지.

    ‘본 건물 현관에서 앞으로 스무 발자국. 뿌리가 벗겨진 나무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꺾어서 스무 발자국…….’

    마음속으로 셈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이다.

    겨울비가 세상을 적시다 보니 추웠지만 레그리아는 조지 경에게서 느껴지는 열기 덕에 크게 떨지 않을 수 있었다.

    그에게 배어나는 다정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은 첫날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지금은 거의 이동식 난로 수준이었다.

    “여기에서 근무하지 않는 날엔 다른 곳에 배치되나?”

    “아, 저 말입니까? 배치되는 건 아니고 훈련을 합니다.”

    “고되겠네.”

    여상히 대화를 주고받으며 레그리아는 일부러 가시덤불에 치맛자락을 걸리게 만들었다.

    손가락 표피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이 덤불의 가시가 날카롭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얇은 실크 잠옷 따위는 금세 찢겨 버리겠지.

    “하하, 그래도 황실 기사가 되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훈련이 힘들어도 동료들과 함께 하니 재미있기도 하고요.”

    “기사가 천직인가 봐.”

    “예. 아무래도 신성 기사님들에 비하면 저깟 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황궁 기사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걸 보고 긍지라고 부르지.”

    레그리아는 조지 경을 추켜 세워 주며 그대로 몸을 돌렸다.

    찌이익.

    헤벌레 웃던 조지 경의 눈이 커다래지고, 레그리아는 원하던 대로 치맛자락이 찢어졌음을 알아차렸다.

    “비, 비전하! 바, 바, 발목이 보입니다…! 아니,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얼굴이 시뻘게진 조지 경이 그대로 눈을 꾹 감았다.

    이 나라에서는 여성의 가슴골보다도 발목을 더욱 은밀하게, 혹은 야릇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성의 의복은 바지가 아닌 이상 전부 다리를 가리며 바닥에 길게 질질 끌리는 모양이다.

    아주 쓸모없고 비실용적이었다.

    ‘아, 그래도 좀 많이 찢어지긴 했나.’

    발목이 문제가 아니라 허벅지께 까지 쭉 찢기고 말았다.

    레그리아는 성긴 가시덤불에서 천 자락을 뜯어내며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옷이 엉망이 되어 버렸네. 이런 꼴로 돌아다니다 누군가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내 명예는….”

    “제, 제가! 제가 두를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기사들이 지원받는 우, 우비가 있는데 그거면 가려지실 겁니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주겠니? 고마워, 경.”

    그녀의 손에 우산을 쥐여 준 조지 경이 삐거덕거리며 빗속을 헤치고 달렸다.

    조지 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레그리아는 웃음을 거뒀다. 손에 힘을 주어 보기 싫게 덜렁거리는 천 자락을 마저 찢어낸 뒤 그녀는 그것과 우산을 손에 쥐고 더 안쪽으로 달려갔다.

    ‘서둘러야 해.’

    가 본 적은 없지만, 이 근처에 연못이라기에는 크고 호수라기에는 작은 수원지가 있다고 들었다. 거기로 향한 것처럼 꾸며내는 게 지금 그녀의 계획이었다.

    ‘우선 하나.’

    아무 덤불 아래에나 옷자락을 떨어트린 그녀는 우산과 실내화를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마치 그쪽으로 향하다가 떨어트린 것처럼.

    작은 탑에는 관심도 두지 않은 듯이.

    거기까지 해 둔 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렸다.

    이렇게 뛴 적이 없어 그런지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도 벌써 호흡이 가빠 온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시덤불 사이를 헤친 그녀는 피부가 긁혀 피가 나는 걸 느끼면서도 덫을 벗어나려는 짐승처럼 몸을 바동거렸다.

    그렇게 간신히 파고든 뒤, 그녀는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기어 탑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누가 저를 볼까 싶어서.

    ‘아래에서부터 열다섯 번째 줄에 비밀 통로로 들어가는 스위치가 있다고 했어.’

    오래 생각했다.

    에화는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는 걸까.

    전혀 신을 믿을 것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신황청에 올 일이 뭐가 있었을까.

    신성 기사들은 누구나 신황청에 올 수 있다곤 하지만 그가 이 고루한 장소에 발을 들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비전하! 비전하? 어디 계십니까!”

    그때였다.

    덤불 너머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온 것은.

    레그리아는 서둘러 탑을 돌아 몸을 감추었다.

    기사이니 빠르게 다녀올 거라 여겼지만 예상보다도 2분 정도 더 빨랐다.

    레그리아는 탑의 벽면을 하나하나 손바닥으로 짚으며 쌓아 올려진 벽돌의 숫자를 셌다.

    ‘열다섯 번째 줄은 여기야.’

    하지만 스위치가 앞쪽에 있을지, 이쪽에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비전하! 저 놀리지 마세요!”

    조지 경의 목소리에 애탐이 묻어났다. 정말 미안했으나 레그리아로서도 이렇게까지 한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단순히 라히크가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가 궁금한 게 아니다.

    에화의 말에 담긴 끈적거리는 늪 같은 어조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증오는 오래 묵었다 하여 사그라들지 않는다. 더더욱 독한 독이 될 뿐.

    그날 그녀가 에화에게서 느낀 기시감은 증오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증오에 대한 답은… 높은 확률로 이 안에 있겠지.

    ‘아!’

    딸깍.

    빛 하나 없이 어두운 돌벽을 더듬던 레그리아의 손이 뭔가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열린 탑 안쪽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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