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34)

38화

앞뒤 설명 없이 일단 결론부터 냅다 던진 레그리아는 조지의 얼굴에 떠오른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다.

“손가락. 다쳤을 때 쪽 빨아주면 낫잖아.”

“아! 역시 그런… 뜻이셨군요.”

사실 이건 레그리아로서는 꽤 용기를 낸 것이었다.

다친 걸 핑계로 좀 친해져 볼 속셈이다.

자신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고 생각한 대상이 반대로 성큼 다가오면 아랫사람은 동경과 함께 애정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적절한 이유가 있는 스킨십을 반복하면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길로 움직이면 습관이 형성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은 어느덧 자신만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은 착각마저 자아내니,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혼자 아주 잠깐만, 늘 다니던 길로 산책을 하겠다고 약속하면 그러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책에서 본 내용을 교과서적으로 실행하며 레그리아는 다친 손을 내밀었다.

말문이 막힌 듯하던 조지는 헛기침과 함께 정중히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맞춤했다.

감히 자신이 어찌 그러겠느냐는 듯 경건하기까지 한 자세다.

그녀가 허락하기도 전에 강제로 손을 낚아챘을 라히크나 아양을 떨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야한 짓을 해댔을 것 같은 에화와는 전혀 달랐다.

“날이 상당히 추워 감기에 걸리실까 걱정스럽습니다. 이제 다시 잠자리에 드시는 게 어떨까요.”

“다시… 갇히고 싶지 않아.”

에오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용감한 기사에게는 무찔러야 할 나쁜 용이 필요한 법이다.

레그리아는 자신의 연기가 어색해 보이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돌아가면 또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겠지. 늘 감시당하고 있고….”

“감시라니요. 설마 그럴 리가요. 어찌 귀하신 분을 감시하겠습니까?”

“이미 그러고 있는걸.”

씁쓸하게 어깨를 늘어트린 레그리아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얼른 걸음을 떼어 놓았다. 마치 억지로 끌려가지 않으면 크게 혼이라도 나는 것처럼 풀이 죽은 모양을 꾸며내면서.

그러자 머뭇거리던 조지가 결국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혹… 지금 몹시 불편하신 상태이십니까?”

“나는 도움이 필요해, 경.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아. 산책이라도 마음껏 하고 싶을 뿐이야.”

“……산책조차 마음대로 못하시는 거군요.”

상세하게 다 설명하며 줄줄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상대가 더욱 끔찍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쪽이 좋았다.

기사는 레이디를 지켜야 한다.

기사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 두 가지 명제는 ‘기사’라는 존재의 근간.

그녀가 보이는 것만큼 행복하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면 도움을 주고 싶어 하리라.

레그리아는 아주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조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오늘은 경 덕분에 조금 나아. 고맙네.”

“비전하…….”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경을 곤란케 만들 수는 없으니.”

“저는.”

조지 경이 무어라 하려다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레그리아는 그런 기사의 어깨를 아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이해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부디 부러지지 않는 열쇠가 되어 주기를.

레그리아는 그렇게 소망하며 에오스가 깨지 않도록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조용히 침실에 들었다.

피곤이 몰려왔기에 잠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에오스의 눈을 속이고 산책을 나간 날로부터 며칠이 금세 흘렀다. 오늘은 근무일이 끝나 다른 기사와 교대를 했던 조지가 다시 돌아와 현관 기사로 선 지 이틀째.

그녀에겐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날이다.

레그리아는 조지가 근무하는 날 동안엔 최대한 정원을 오래 산책하며 그의 시야 안에 있으려 노력했다.

현관의 거대한 문 옆에는 마찬가지로 큼지막한 창이 있다.

조지는 내부에서 경비를 서지만 아마 그 창을 통해서 그녀가 걷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종종 등 뒤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이 느껴지는 걸 보면.

“비전하, 바, 바람이 영 수상해요. 곧 폭풍이 불어 닥칠 것 가, 같아요!”

셀린이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곁을 바짝 따라붙었다.

그 말을 듣고 레그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비가 오긴 올까 싶을 정도로 맑지만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기는 하다. 오후가 되면 아예 바깥을 나올 수 없을 정도가 될 것 같긴 했다.

‘이건 폭풍 전야일까.’

구르는 낙엽 더미로 무심히 시선을 옮긴 레그리아는 문득 고개를 돌리다가 현관 안쪽의 조지 경과 눈이 마주쳤다.

비가 오기만 하면, 그러면…….

“에오스. 라히크는?”

“오늘도 따로 전언은 없으십니다. 레그리아 님께서 공부하시는 부분에 대한 보고는 받고 계시온데… 혹 한 번 오시라 청을 넣는 게 좋을지요?”

“아니, 됐네.”

라히크는 파티 이후로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다 잡은 물고기라 생각해서 더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차라리 다행이다.

이 모든 계획은 라히크가 없어야 성공하는 것이니까.

“각 가문에서 초대장을 보내온 것이 있습니다. 통상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모아 격에 맞지 않는 한미한 가문의 것은 빼낸 뒤 전달 드리기에, 오늘 오후에 받아 보실 수 있으실 듯합니다.”

“내가 참석할 수 있니?”

“황태자 전하와 동승하시면 가능합니다.”

“모두 모아서…….”

라히크에게 보내. 그러면 그가 결정하겠지.

무심코 그렇게 대답하려던 레그리아는 멈칫하고는 말을 삼켰다. 그런 뒤, 속을 가다듬으며 그녀는 조용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주렴. 살펴볼 테니.”

“알겠습니다.”

혹시 초대장 속에 에화가 보낸 것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힌트나 도움 같은 걸 주려고 한 걸지도.

‘어쩌면 자신이 어느 가문 사람인지 알려 주려는 걸 수도 있어.’

귀족 계보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뒤져가며 살핀 결과 에화로 의심되는 이름은… 약 열 개 정도가 있었다.

신성 기사일 것. 라히크를 적대할 것. 후작 작위 이상의 고위 귀족 가문일 것. 그리고 젊은 나이의 남자일 것.

그 조건들을 충족하는 이름 중 과연 누구일까.

‘널 찾아내겠어.’

콰르릉.

하늘은 흐리기만 할 뿐, 아직 비는 보이지도 않는데 천둥소리가 난다. 성급한 구름 끼리 서로 머리라도 박고 있는 모양이다.

‘만약 밤부터 비가 내린다면… 역시 오늘 밤이 좋겠지.’

라히크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인간이니 시간을 질질 끄는 건 좋지 않다.

밤새도록 내릴 비는 그녀의 발자국을 지워 줄 테니, 용기를 내자.

레그리아는 어깨에 두른 숄을 단단히 여미며 발길을 돌렸다.

그럼에도 그녀의 의식은 계속해서 그 낡은 탑에 붙들려 있었다.

* * *

“저를 사교계 중심으로 세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쨍한 목소리가 세련된 집무실 안을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대부분의 물건이 검정으로 통일된 집무실 내부는 그 주인의 강박증과 결벽증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듯 모든 물건이 줄에 맞춰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

단 하나도 흐트러지는 걸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먼지 한 올 떨어져 있지 않은 공간.

“약속하셔 놓고! 아무 파티도 가지 못하게 하시면 어떡해요!”

그런 통제된 장소와 분홍 머리 계집아이는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연한 하늘색 천 위로 은빛 시폰을 둘러 풍성하게 주름을 잡은 드레스와 허리께에서 살랑거리는 커다란 리본. 하녀가 공을 들여 몇 시간 동안 말아 준 머리칼은 엉덩이까지 늘어트려진 채로 흔들거린다.

인형처럼 아름답게 꾸민 지젤은 새카맣고 무거운 테이블을 두 손으로 쾅 짚은 채 그 너머에 앉은 공작을 향해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런, 화가 났느냐.”

“당연히 화가 났죠! 저도 이제 귀족이라면서요!”

지젤은 약이 단단히 오른 상태였다.

그 끔찍한 파티가 끝난 날로부터 시간이 상당히 흘렀다.

정식 데뷔는 아니라지만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곳에 얼굴도장을 찍으러 간 거였는데,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

파티가 끝날쯤엔 그녀에게 관심 갖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

그런 대우는 태어나 처음이었기에 지젤로서는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그 굴욕을 부채질하는 건 공작의 반응이다.

나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흰 머리 한 올 없는 공작은 여전히 형형한 눈빛과 예리한 기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젤을 ‘평가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지젤을 도무지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나를 평가한다고? 감히 나를?

“어쩔 수 없지. 네가 슈만 부코바츠를 사로잡지 못한 것을.”

“그건…!”

욱하는 마음에 발을 구르며 악을 쓰려던 지젤은 저를 향하는 차가운 눈빛에 도톰한 아랫입술을 꾹 깨물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내 언니도 여기에 와 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눈물이 핑 돈다.

마지막 기억은 언니에게 소리를 마구 질렀던 거였다.

그녀는 흥분하면 이성을 자주 잃었는데, 그럴 때마다 언니가 다 달래주어서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언니는 평소와 달랐다.

평소라면 다 들어준 다음에 그녀를 안고 쓰다듬어주었을 텐데 그날은 어두운 표정으로 나가 버렸어.

집을 나갔다고!

한 시간 뒤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제 언니를 찾아 뒤따라 나갔다.

‘그 다음 기억이 없어.’

눈을 떠 보니 웬 퀴퀴하고 냄새나는 공간에, 쓰레기 같은 거나 걸치고 있었다.

그때 얼마나 무서웠던가!

다행히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어떤 사람이 찾아왔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녀를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로에르멜 공작가.

빙의니 강림이니 신성인이니 하는 말들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본래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곧 상황을 파악했다.

공작에게 찰싹 달라붙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사교계의 꽃이 되어서 제2의 인생을 살려고 했단 말야.’

원래 그녀는 모험심이 강했다. 늘 도전적이고 가만히 있는 걸 못 견디기도 했다.

처음에야 충격이었지만 나중에는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이 특별하기에 일어난 거라는 걸 이해했다.

설명을 들어 보니 이곳의 사교계라는 건 살던 곳과 그다지 다르지도 않았고 상류 사회가 어떤지야 너무나 잘 안다.

지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녀는 이 세계에 빠르게 적응했고 이젠 아예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영애들과 다르지 않아졌다.

그러니 자신이 있었다.

먼저 피아노 연주로 시선을 끌고, 그 다음엔 유려한 화술과 재치로 인기를 모을 계획이었는데.

‘언니가 내 걸 다 빼앗아갔어.’

이럴 줄 알았어. 언제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지젤이 부르르 떨었다.

황태자비라는 그 여자는 ‘언니’가 틀림없다.

첼로 연주를 들었을 때부터 의심했고 피아노를 연주가 끝난 뒤엔 확신했다.

언니가 아닐 리 없어.

왜냐하면 그 여자는…….

‘내가 망가트려 놓은 꼭 그대로 연주했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