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3. 전사(Kämpfer)
아침에 우는 새가 부스스 눈을 뜨기도 전인 새벽.
새하얀 두 발이 솜털 이불 사이를 조용히 빠져나와 바닥에 내려앉았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며 치닫는 바닥의 찬기에 레그리아는 몸을 움츠렸다가 느리게 다시 폈다.
‘이 시간은 확실히 춥구나.’
우트가르드는 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숲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기에 태양이 그 힘을 자주 잃는 땅이다. 헌데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인 지금 시각엔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온도가 낮은 게 당연했다.
어제 그녀는 일부러 가운을 자기 전까지 걸치고 있었다.
잠자리를 봐주러 온 에오스가 촛불을 하나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불어 끌 때까지도 레그리아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채 소파에 있었다.
그러다 침대에 들며 옆의 협탁에 일부러 대충 벗어두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가운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내가 잠든 뒤에 에오스가 다시 들어와 살피고 나가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야.’
깔끔하게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에오스의 성격상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려 둔 가운을 보았다면 곱게 다시 개어 놓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가지런히 놓인 양털 실내화에 발을 꿰자 미약한 온기가 올라와 그녀를 데워 주었다. 잠시간 발을 꼼지락거리며 얼음장 같은 발끝을 녹인 레그리아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차가운 대리석에 맨발을 댔다.
실내화는 품에 안은 채였다.
‘실내화를 끄는 소리는 바닥을 울려.’
맨발로 살금살금 걸어 나가야 들키지 않으리라.
“…….”
다행히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나왔어도 에오스가 옆방에서 깨어나 무슨 일이시냐고 묻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방은 신황청 본관의 3층, 신의 왼쪽 갈비뼈라 불리는 복도 중앙이었다. 당연히 가는 길목마다 병사들이 서 있다.
그녀를 보고는 놀란 눈으로 가로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데 그들이 결정을 내리기 전, 레그리아는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 버렸다.
어차피 저들은 결코 그녀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다.
황족의 몸을 건드리는 건 크나큰 불경죄니까. 황족이 될 사람인 그녀 역시 같은 대우를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에오스가 저 병사들을 관리하는 건 아니야. 에오스는 여관장이니 군대 쪽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
파티에서 있었던 일들로 레그리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기사만이 병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군에 속하지 않은 자가 군에 속한 이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군내에서 모든 결정권은 기사급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에오스가 잠들기만 하면, 감시병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를 무시하고 스쳐 지난 레그리아는 현관에 도착하기 전, 얼른 슬리퍼를 신었다. 이제부터는 기사를 상대해야 하는데 미친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아서.
“현관을 나서시면 위험합니다.”
복도는 병사가 지키지만, 현관에는 기사가 있다. 혹시 그녀와 정신 접촉을 하게 될 위험이 있는 신성 기사는 아니고 평범한 황궁 기사 중 하나.
3일을 주기로 현관을 지키는 기사가 달라지는데 레그리아는 그중 이 남자가 가장 선해 보인다고 생각했기에 오늘을 날로 골랐다.
“답답하여 산책을 하고 싶을 따름이야.”
“그, 그래도 위험하십니다.”
기사는 젊은 축이고, 옅은 주근깨와 함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지녔다.
딱딱하게 대꾸하려 해 보지만 아직 서투른 걸로 보아 기사 임관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하긴. 그러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잠도 거의 자지 못하고 사흘을 내리 근무하는 이런 자리에 배치되었겠지.
“그러면… 경이 같이 나가 주면 되지 않은가.”
“그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걸 보면 유한 성격이 틀림없다. 레그리아는 그 틈을 끈질기게 파고들기로 마음먹고는 최대한, 있는 힘껏 불쌍한 표정을 만들려 노력했다.
“파티가 끝나고 며칠 내내 속이 너무 좋지 못해서 그러네. 이렇게 계속 빌어야 산책을 하게 해 줄 텐가?”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라히크가 내 발을 건물 안에 묶어 두라고 지시했나?”
“그것 또한,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저 예비 황태자비 전하의 안전만을 명하셨습니다.”
노력한 만큼 가여워 보였는지, 아니면 노여워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사는 그녀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레그리아는 짤막히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현관을 나섰다.
끼이이.
스산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든다. 꼭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달라붙어 정신을 맑아지게 도와주었다.
“저, 비전하.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그런 얇은 의복으로는 분명 감기에 거, 큼, 걸리실 겁니다.”
오늘은 달이 참 환하네.
조금은 몽롱하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가 그녀를 향해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제복의 재킷인 모양이다.
신성 기사는 흰 제복을, 축복이 없는 일반적인 황궁 기사는 검은색 제복을 입는다.
아직 훈장도 하나 달리지 않아 말갛기만 한 재킷은 무게감도 거의 없어 보였다.
“이걸 내게 주면 경은.”
“저는 튼튼하니 아무 문제 없습니다. 훈련할 땐 얼음 굴에서 일주일을 버티기도 했는걸요.”
기사는 고개를 돌린 채 대답 중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귓불까지 붉어진 것 같은데.
자신의 차림을 되돌아보던 레그리아는 한 가지를 간과하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불빛 없는 실내에서야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만, 달빛이 환히 내리쬐는 뜰에선 제아무리 가운을 걸친들 실루엣이 드러난다는 것을.
“…경의 배려에 감사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녀가 제복 재킷을 받아 어깨에 걸치자 기사는 그제야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런 변화를 퍽 재미있게 보던 레그리아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경의 이름이 무엇인가?”
“저는 조지 멕시웬입니다.”
“멕시웬 경이로군. 분명… 황태자파에 속한 가문이었지.”
“그렇습니다. 편히 조지라 불러 주십시오.”
라히크는 신황청 내의 기사들을 전부 제 사람으로 채워 넣어 두었구나.
감시를 떨어트리고 몰래 산책하는 건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특히 현관 기사를 통과하는 게 중요한 문제야.’
낮에는 마음껏 나다닐 수 있다지만 밤에는 아니다.
에오스의 눈을 피하는 건 지금처럼 잠든 시간을 노리면 될 것 같은데, 현관에 선 기사가 보고를 해 버리면 소용없었다.
‘병사들이야 기사의 소관이니 상관없어. 기사가 입을 다물라고 하면 다물 거야.’
레그리아는 고민하며 느릿느릿 뜰을 걸었다. 아무 목적지가 없는 사람처럼 정처 없이.
조지 경은 그런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라올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파티는 무사히 끝났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날은 완벽했다.
그녀는 슈만 부코바츠의 지지를 등에 업었고, 매 주마다 하루씩 슈만에게 직접 레슨을 받기로 했다.
슈만은 엄청나게 흥분한 상태로 그녀에게 벨리그레엄의 곡을 가르쳐 주려 했는데 레그리아가 직접 작곡도 할 줄 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졸도 직전까지 갔었다.
그런 격렬한 반응에 대다수의 고위 귀족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듯 보였으니 성과가 있는 시간이었지.
개인적으로는 에화라는 남자를 만나 탈출의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므로 그 또한 잘된 일이라 볼 수 있음이다.
‘그리고 비트리체 역시… 뭔가 매듭을 지은 듯했어.’
휴게실로 찾아온 디트리히 로에르멜.
그는 레그리아를 앞에 두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더랬다. 그리고 꼭 비트리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며 몇 마디를 건네고 돌아갔다.
문제라면 그 시간 이후로 비트리체는 그녀의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리하여 레그리아는 홀로 계획을 짜야만 했다.
에화가 내세운 최소한의 계약 자격.
그걸 어떻게 채울지를.
‘첫 번째. 일단은 에오스 몰래 빠져나와 숲을 돌아보는 것부터.’
그때였다.
조그마한 뭔가가 그녀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것이다.
“!!!”
경기를 일으킬 만큼 화들짝 놀란 레그리아는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었는데, 조지는 그런 그녀를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건 타람입니다. 이 녀석은 신성의 숲에 사는 귀여운 동물이에요. 무해하지요.”
“타람…?”
그냥 아주 작은 다람쥐잖아.
살랑.
풍성한 꼬리를 흔들며 다람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별 이상한 것 보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무에 뛰어올라 재빨리 사라졌다.
조지는 그런 다람쥐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레그리아가 앞서서 가 버리자 헐레벌떡 뒤따라왔다.
“같이 가요, 비전하!”
“동물을 좋아하나 봐.”
“예. 사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정말 좋아했어요. 말이면 말, 강아지면 강아지. 토끼나 심지어는 닭조차 좋아했죠.”
“다정한 사람이네.”
“예?”
무심코 흘린 칭찬에 조지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러더니 목덜미가 뜨끈하다는 듯 그는 뒷목을 문질렀다.
“에이, 제가 뭘요. 다들 이렇지 않습니까. 동물 좋아하고, 아이 좋아하고.”
“자신보다 약자를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얼마 없어.”
“하하, 그런가요?”
“응.”
역시 선한 사람이구나.
아마 라히크는 조지가 자신에 비하면 아주 못한 남자라 생각하여 현관을 지키도록 명해 두었을 것이다.
그 오만한 남자는 세상 그 누구도 저보다 잘났다고 여기지 않긴 하지만, 조지 같은 타입은 더더욱 아랫급으로 여길 테지.
하지만 너무나 재미있게도 몇 마디 나누어 본 조지는 하필이면 레그리아의 이상형이었다.
그녀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바로 그런 남자.
소박하고 순수한, 손해 보며 살더라도 남의 등에 칼을 꽂진 못할 사람.
“그런데 비전하께서도 동물을 좋아하시나요?”
지금도 보라.
이 남자는 어느새 제 말투가 좀 더 편하게 바뀌었음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좋아해.”
“그렇군요! 말은 타 보셨습니까?”
“말은… 타 보기는 했어. 몇 번.”
동생이 승마를 처음 배울 때였다. 그녀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겠노라 떼를 쓰는 탓에 모친께서는 하는 수 없이 쓸모없는 첫째 자식까지 승마장에 데려가야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레그리아는 제 동생보다 자신이 훨씬 말을 잘 탄다는 걸 알아차렸다.
동생은 고삐를 쥐고 등자로 배를 차며 억지로 제가 원하는 대로 가게 하려 했으나 레그리아는 말의 큼지막한 눈을 들여다보며 소통을 하려 애를 썼다.
말의 근육을 느끼고, 힘차게 달리는 다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러게. 떠올려 보니 다시 타고 싶네.”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려서 승마를 하고 싶다 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럼 답답증도 조금 가실 겁니다!”
“그럴까?”
“예. 말을 타면 신나잖아요.”
순수한 선의로 가득 찬 조지의 눈동자는 개암나무 색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등 뒤로, 낡은 탑이 보인다.
태연히 대화를 나누며 레그리아는 기어이 자신이 원하는 곳까지 도착했다.
‘정말 에화가 알려 준 그대로였네.’
에화가 무얼 한 건지 몰라도 눈앞에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영상과 똑같은 길이 나왔기에 레그리아는 어렵지 않게 탑을 찾아냈다.
‘다음 난관은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 가시덤불인데.’
이걸 잘라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딘가에 사람이 들어갈 만한 길이 보이지도 않는다.
에화는 대체 여길 어떻게 통과하라는 거지?
“아야.”
“비전하!”
가시덤불에 함부로 손을 가져다 대다 찔리고 말았다.
레그리아는 골을 내며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괜찮으십니까! 귀하신 손에 피가…!”
“괜찮으니 수선 피우지 마.”
깊이 찔렸는지 꽤 따끔거린다. 조지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곤 온 정신을 집중해 가시를 빼냈다.
“아무래도 약을 바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따로 가지고 다니는 연고가 있는데 현관 근처에 두었거든요. 돌아가면 그거라도 얼른 발라 드릴게요.”
거절하려던 레그리아는 벌리던 입을 그대로 다시 닫았다.
저 너머의 탑에 가보려면 두 가지 열쇠가 필요하다.
현관을 지키는 기사.
만에 하나를 대비해 그녀의 이동 경로를 지워 줄 수 있도록 비가 내리는 밤.
그럼 서툴게나마 이 남자를 유혹해서 그녀를 돕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저기.”
“예?”
“빨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