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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36/134)
  • 36화

    * * *

    “아, 진짜 형한텐 아까운 여자인데.”

    황족 전용 휴게실을 빠져나온 에화는 기지개를 쭉 켜다 말고 입맛을 다시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머리칼을 지닌 여인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는다. 저기에 있는 건 실루엣뿐.

    에화는 유려하게 떨어지는 여체의 곡선을 시선으로 핥아내며 끙하고 소리를 냈다.

    그림자마저 예쁜 여자다.

    레그리아란 이름이 붙여진 신성인에게는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뭐였을까.’

    라히크가 붙여 놓은 이름 따위 부르고 싶지 않다. 누나누나 거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오직 그만이 부를 수 있는 애칭을 따로 붙이거나 그게 아니면 신성계에서 쓰던 이름이 뭔지 알고 싶다.

    아마 이제 더는 기억해내지 못하겠지만.

    그 점이 에화를 애타게 만들었다.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무엇이 되어 버렸다는 게 거슬리기 그지없다.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어떻게든 기억을 해내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끄으으….”

    “아, 너희가 있었구나. 까먹을 뻔했네.”

    때마침 들려온 고통스러운 신음에 에화는 히죽 웃으며 발을 돌렸다.

    라히크가 등신도 아니고 당연히 황족 전용 휴게실 아래엔 호위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누가 벽을 타고 올라 창문을 넘어 휴게실로 들어갈까 싶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 ‘누가’가 에화인 이상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짓이다.

    에화는 짤막하게 휘파람을 불며 재킷 안쪽에서 새끼손가락만 한 병을 여러 개 꺼냈다.

    몹시 수상쩍은 약물이 담겨 있는 병의 코르크 마개를 뽑아낸 그는 쓰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는 기사의 뒷머리를 콱 잡아 젖힌 뒤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해 약을 처먹였다.

    “컥…!”

    “그래, 그래. 옳지. 삼켜, 뒤지기 싫으면.”

    레그리아 앞에서 애교를 부리며 아양 떨던 모습은 싹 씻겨나간 그는 거칠고 무도했다.

    이게 에화의 본래 모습이다.

    그는 ‘작업’을 할 때 특히 손속이 거칠기로 유명했고 꼭 실실 웃었다.

    아, 물론 돈 안 되는 작업은 안 하긴 하지만.

    에화는 흥얼거리며 쓰러진 기사 한 명 한 명의 입에 약물을 부었다. 제대로 삼키지 못하면 목젖을 쳐서 억지로 삼키게 만드는 수고도 아끼지 않으면서.

    그가 손수 먹이고 있는 건 ‘므네모시사’라는 꽃의 뿌리를 달여 이것저것을 더 혼합해 만든 약이었다.

    대충 기억에 혼선을 일으키는 효능이 있는데, 섭취 시간을 기준으로 앞뒤로 총 24시간 정도 기억에 공백이 생기게 만든다.

    이건 이 기사들이 여기서 그를 보았다는 증언을 하지 못하게 먹이는 것이다.

    모스그라토 대공의 양자인 그가 예비 황태자비를 단독으로 몰래 만났음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니까.

    그건 레그리아의 품위를 위해서도 밝혀져선 안 되는 내용이었다.

    “아, 레그리아는 나같이 배려심 많고 가정적인 남자를 만나야 행복할 텐데. 그녀는 딱 봐도 상처가 많아 보이잖아. 그렇지?”

    “끄으, 이런… 짓을, 하고도. 커흑!”

    “무사할 것 같으냐고? 무사하니까 여기에 두 다리를 짚고 서 있는 거겠지. 혹시 머리가 안 돌아가?”

    제 관자놀이 쪽에 검지를 대고 빙글 돌리던 에화는 혀를 쯧쯧 차며 기사의 배를 걷어찼다. 막 정신이 돌아오려던 기사는 그대로 다시 한번 기절하고 말았다.

    ‘일단 씨는 뿌려 뒀고… 내가 바라는 형태로 꽃을 피웠으면 좋겠는데.’

    하나하나 착실히 약을 먹인 뒤, 에화는 허리를 펴며 답지 않게 진지한 눈빛을 했다.

    솔직히 처음엔 그냥 이용이나 좀 해먹을 생각이었다.

    신황청 내에 심어 둔 조직원에게 보고를 받았으나 딱히 신성인이 미쳐 날뛰었다는 이야기 하나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라히크가 던지는 꿀 발린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하고 멍청한 인간이겠거니 싶었다.

    그리고 날 때부터 천재로 잘난 그는, 둔해 빠진 자들을 세상에서 제일 혐오했다.

    ‘순해 빠진 집짐승인 줄 알았더니.’

    그저 목줄에 매인 척하고 있을 뿐이었나.

    겁도 없이 낯선 남자를 한 공간에 들이고도 비명 하나 내지르지 않은 침착함. 뭘 넣었을지 모를 음식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영리함.

    거기에 먼저 계약 같은 위험한 단어를 꺼내는 대범함까지.

    에화는 저를 똑바로 향하던 연녹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러자마자 아래가 후끈하니 열이 오르더니… 그대로 물건이 서 버렸다.

    “아, 어쩜 좋아. 반한 것 같은데. 나.”

    에화는 두 손에 얼굴을 푹 묻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금까지 그에게 얻어맞은 기사들이 보았다면 기가 막혀서 스스로 기절해 버릴 만한 광경이었다.

    ‘속 알맹이가 바뀌었다고 사람이 그렇게까지 반짝거릴 수가 있나.’

    비트리체 로에르멜은 연회에서, 살롱에서, 음험한 뒷골목에서 여러 번 마주친 적 있다.

    그때마다 참 재미없는 눈이라고 여겼었다.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여자.

    제멋대로 방만히 구는 것 같지만 사실 정말 원하는 건 단 하나도 하지 못한 머저리다.

    ‘제 동생 눈깔을 찌른 것만 빼면.’

    그건 좀 흥미로웠지. 그 다음에 갑자기 통로인으로 가서 산 채로 관에 눕겠다 하여 공작의 뒤통수를 거나하게 친 건 재미있었고.

    하지만 그뿐.

    비트리체는 볼 때마다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무료함과 권태, 무력감이 뒤섞여 마주하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오게 만드는 그런 눈빛을.

    ‘레그리아는 달라.’

    비트리체가 하강하는 종류의 인간이면 레그리아는 상승하는 인간이다.

    살고자 하는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희망을 향한 기대와 의지가 어려 있어 꼭 새싹처럼 보였다.

    얼마나 얼어붙은 땅이든 괘념치 않고 제 머리로 있는 힘껏 치받고 올라가겠다는 결심이 보는 그를 설레게 만들었다.

    어디까지 올라갈까 지켜보고 싶달까.

    “그렇지?”

    “허억!”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기어가면 돼요, 안 돼요? 암살자를 앞에 두고 등을 보이면 될까요, 안 될까요. 대답해 봐요.”

    콰직.

    대체 언제 날린 건지 제 눈앞에 내리꽂히는 단도를 보며 남몰래 엎드려 땅을 기던 기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히 저 괴물이 쳐다보고 있던 곳과 반대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기어갔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하아. 난 나를 지들 같은 머저리로 아는 새끼들이 그렇게 싫더라.”

    “이런 무도한…! 황태자 전하께서 가만히 계실 줄 아는가!”

    “…확 공짜로 죽여 버리고 싶네.”

    낮게 중얼거리던 에화가 눈 깜짝할 사이 암기를 쏘아냈다. 목덜미, 손목, 발목과 같이 죽지는 않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고통받으며 치료를 해야 하는 곳의 근육을 끊어 놓을 작정이다.

    어쨌든 돈도 안 받았는데 목숨을 거두는 건 너무 손해 보는 장사였기에 그 정도로 넘어가 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거기까지. 더 하면 베겠습니다.”

    스릉.

    차가운 칼날이 달빛에 반사된다. 저와 기사 사이를 갈라놓은 검을 바라보던 에화는 공격이 가로막혀 바닥에 떨어져 버린 암기를 보며 혀를 찼다.

    “이제 왔어? 재수 없는 정의의 사도님.”

    “이들은 평범한 황궁 기사입니다. 신성 기사의 규율 제1조. 약자를 보호한다. 해당 맹세를 기억하고 도를 지나친 공격을 삼가십시오.”

    은발의 미인이 그를 향해 일갈했다.

    표드르 이안 실버레이크.

    세상에 저보다 더 예쁜 남자는 없다고 자부하지만 표드르는 예외였기에 재수 없게 표정을 찌푸리고 있어도 참아 줄 만했다.

    “아아, 그렇게 악의 축을 본다는 눈빛으로 보지 말라고. 나도 상처받아.”

    에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살초를 날리려던 손을 거둬들였다.

    더 난동 피워서 좋을 건 없겠지.

    “당신 역시 황제 폐하의 핏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이런 망나니짓을 반복할 겁니까?”

    “이거 억울한데. 내가 뭘 했다고 정색하고 그래.”

    “멀쩡히 제 일을 하고 있는 기사들을 때려눕히고 므네모시사를 먹이지 않았습니까?”

    “정당방위였어. 정당방위. 그러게 왜 나를 막아서려고 해. 건방지게.”

    빛깔이 다른 눈동자가 서로를 노려본다. 문답무용. 표드르가 선 곳을 중심으로 풀이 누렇게 말라죽더니 이내 새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반면에 에화가 선 곳을 중심으로는 단단하던 땅이 질척거리는 늪으로 변해간다.

    한쪽은 얼고 다른 쪽은 눅진해지니 서로가 상극일 수밖에.

    하지만 정당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에화 입장에서는 화를 낼만 한 자격이 있었다.

    굳이 입 밖에 내면 쪼잔한 새끼밖에 더 되나 싶어 닥치고 있었는데, 사흘이다. 무려 사흘.

    에화가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저를 향해 쥐 떼처럼 달려드는 기사들을 상대해야 했던 시간이 말이다.

    그건 모두 오늘 이 파티에 그가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의 자랑스러운 이복형이 꾸며 놓은 술수였다.

    그런데 제게 인내심 쪼가리가 남아 있을 리 있나.

    하나같이 황실에서 나왔다는 걸 숨기지도 않은 채 시간차로 교대하며 공격을 퍼부어 숨 돌릴 시간도 주지 않았는데.

    솔직히 이 정도면 아주 유하게 넘어가는 거였다.

    그 지옥에서 악착같이 빠져나와 레그리아를 만났는데 그게 생각보다 좋았거든.

    “참. 하나뿐인 친구가 죽었는데 기분이 어때?”

    “그 입, 조심하십시오.”

    표드르의 주변으로 얼음으로 이루어진 창이 생성되었다.

    평소라면 신나서 싸웠겠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하다.

    아무리 혈기 왕성한 그라 하더라도 이젠 좀 쉬어줘야 하지 않겠나.

    에화는 표드르를 향해 손을 설렁설렁 흔들며 제 발밑에 생성된 늪으로 서서히 꺼져 들어갔다.

    “다음에 놀아줄게. 다음에. 형한텐 비밀이다?”

    “에화 시누엘 모스그라토!”

    “너도 라히크가 경계를 강화하는 건 싫잖아. 그치?”

    에화가 던진 마지막 말은 땅속에서 울려 퍼지듯 음산했다.

    어차피 맞출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분풀이 조로 늪에 꽂힌 얼음창이 스르르 사라지고서야 주변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마치 방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고요해진 공간.

    표드르는 에화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는 수상쩍은 병을 발견하고 묵묵히 집어 들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눈앞에서… 바, 방금 여기 있었는데!”

    “후.”

    멍청한 기사 놈이 아주 온 세상에 다 알리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먹을 움켜쥐며 약병을 손안에 감춘 표드르는 이를 악물었다.

    인정하기는 싫으나 모스그라토 공자의 말이 옳다.

    이 사건은 황태자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는 분명 경계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비트리체를 완전히 속박할 테니까.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조용히 마셔 달라 하여도 듣지 않겠지.”

    “황태자 전하께 모든 걸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네.”

    표드르는 한숨과 함께 기사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바닥에서 발이 뜨는 바람에 버둥거리는 자를 잠시간 지켜보던 표드르는 다른 손에 쥔 병의 코르크 마개를 이로 뽑아냈다.

    “모든 건 비트리체를 위해.”

    기사에게 기억을 지우는 약물을 먹이는 표드르의 표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단정했다.

    잠시 뒤, 목격자가 그 누구도 없음을 확신한 표드르는 어두운 구름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 한 초승달로 시선을 주었다.

    달만이 이 밤의 일을 알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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