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34)
  • 35화

    “그게 대체 왜….”

    그렇게 되는 거야.

    무어라 하려던 레그리아는 입술을 버싯거리다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한마디를 내놓을 때마다 왠지 말려드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라히크는 그래도 기분이 뒤틀리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행동 패턴이 예상이라도 가는 혀 변태 미친놈이라면 에화는… 그냥 폭탄이었다.

    아마도 라히크와는 견원지간이겠지.

    ‘게다가 자기가 대답하기 싫은 건 아예 못 들은 체하는 것 봐.’

    하지만 침묵은 곧 긍정이다.

    에화라는 이름은 아마 본명이 아니거나, 혹은 최소한 귀족 명부에 등록된 이름은 다른 것이리라.

    “있잖아, 이건 누나가 마음에 들어서 몰래 알려 주는 건데….”

    잠시 뒤, 에화가 소파를 짚고 상체를 세우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소곤소곤거렸다.

    “내 이복형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거든 신황청을 빠져나와요.”

    “……?”

    “본 건물 현관에서 앞으로 스무 발자국. 뿌리가 벗겨진 나무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꺾어서 스무 발자국. 관리 된 관목을 지나서 좀 더 안으로 깊이 향하면 전혀 손질되지 않은 가시덤불이 있거든.”

    이상한 일이다.

    분명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 머릿속에 지도가 들어오는 것 같아.

    그냥 느낌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눈앞에 길이 보인다. 에화가 속삭이는 대로 움직이던 시야에 이번엔 키가 작은 돌탑이 등장했다.

    “가시덤불 너머에 아주 오래되어서 삭아 버린 돌탑이 있어. 보이지?”

    가까이 붙은 에화의 전신에서 열기가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그게 간지러운 탓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어쩌면 그냥 그의 입김이 귓가에 새어 들어오는 게 간질거리는 걸지도.

    에화에게선 진한 박하 향이 났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박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쌉싸름한 향이었다.

    “거기로 가는 거야. 아래에서부터 열다섯 번째 줄에 비밀 통로로 들어가는 스위치가 있으니 그걸 잘 찾아보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있는데?”

    “비밀. 원래 비밀이어야 더 가 보고 싶은 법이잖아.”

    시야가 확 돌아왔다.

    에화가 윙크를 하며 검지를 들어 그녀의 아랫입술에 댔다. 그러더니 느릿이 누르며 문지르는 게, 한두 번 꼬셔 본 솜씨가 아니었다.

    둔감한 레그리아조차도 이게 플러팅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정도이니 말 다했지.

    ‘색기가 줄줄 흐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지금까지 몰랐는데.’

    이제는 안다. 그냥 간단한 단어 하나로 줄일 수 있었다.

    그건 에화였다.

    “내 힌트는 여기까지.”

    에화는 레그리아가 부담감을 느끼며 멀어지려고 하는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알고 자신이 먼저 떨어졌다.

    너무 깔끔한 거리여서 그녀 혼자만 음흉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저 돌탑 안에 대체 뭐가 있기에.’

    아마 라히크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무언가이리라.

    에오스를 떼어놓고 가야 한다는 눈치 정도는 그녀에게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혼자 산책을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던 레그리아는 문득 들려오는 혼잣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아, 근데 나랑 결혼하면 맨날 내가 밥 차려 줄 텐데. 아내한테 밥 차려 주는 게 내 꿈이거든.”

    “지금도 결혼하자는 영애들이 많지 않니?”

    “아이 따위는 바라지도 않고 아내만 데리고 알콩달콩 잘 살 거야. 아이, 낳지 않게 해 줄게. 나랑 결혼할래요?”

    이 나라 남자들은 결혼하자는 말이 그냥 농담인 걸까.

    짧게 고민하던 레그리아는 쓸데없는 생각은 지워버리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나이 든, 그러니까 노인이 된 신성인을 본 적 있니?”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다.

    에화가 라히크와는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건 명확하니까, 어쩌면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까.

    라히크가 배치해두었을 수많은 병력의 눈을 피해 여기 몰래 들어올 수 있을 정도면 능력이 좋은 것 같은데.

    그리고 에화에게는 정보가 있었다.

    그게 그다지 그녀가 듣고 싶어 하던 건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없어.”

    “아.”

    “대부분의 신성인은 요절해. 이유는 알려 주지 않을 거야.”

    요절.

    그 단어가 주는 충격과 스스로를 분리한 레그리아는 곧 어떤 기호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혹시… 이렇게 생긴 기호. 이게 죽었다는 뜻이니?”

    “맞아.”

    “…역시 그랬구나.”

    그렇다면 그 많은 신성인들은 어째서 다 그리 일찍 죽었을까.

    레그리아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방금 오간 대화를 복기하려 했다. 분명 단서가 있을 텐데. 아까 에화가 뭐라고 했더라?

    그러나 그녀가 대화 속에 담긴 힌트를 건지기 전, 에화가 선수를 치듯 나섰다.

    “하지만 장담할 수 있어. 나랑 결혼하면 장수하게 해 줄게. 백발이 되어 머리가 성기고 키가 줄어들고… 주름이 자글자글해질 때까지 둘이 같이 살자.”

    쿵쿵.

    사근거리는 어조에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두근거린다.

    물론 레그리아는 이성적인 사람이었기에 이게 그저 일시적인 육체의 반응일 뿐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저렇게 공주님처럼 생긴 남자가 평생 같이 살자는데 설레지 않으면 그건 진짜로 심장 없는 나무토막이겠지.

    ‘한없이 가벼워 진심 한 오라기 깃들어 있지 않은 고백.’

    다르게 생각하자면 그렇기에 유쾌하기는 하다.

    라히크와의 결혼 외에 다른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다는 건 레그리아의 앞에 벼랑이 아니라 외나무다리가 설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안하지만 건너가고자 하면 건너갈 수는 있는 다리.

    굳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않으면 같이 즐거울 수 있을 테지.

    ‘예를 들면… 계약 결혼 같은 건 괜찮을지도 몰라.’

    만약 도망치는 게 안 된다면 공식적으로 황태자비가 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니까.

    고심하던 레그리아는 제 머릿속을 배회하는 생각을 절반 정도만 꺼내 보기로 했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뭔지 말해 줘.”

    “어쩌지. 나 진짜 누나가 마음에 들려 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잖아.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 주면 좋겠어.”

    원하는 방향이 같았으면 한다.

    라히크를 죽이겠다는 것만 아니면 레그리아는 에화에게 기꺼이 이용당해줄 의사가 있었다. 그녀 역시 에화를 이용할 테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지금은 너무 이르고.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잖아.”

    “처음 만난 사람한테 청혼한 게 누구인데.”

    “나지. 그래도 지금은 안 돼요. 그 돌탑에 다녀온 뒤에 얘기하면 몰라도.”

    에화가 실실 웃음을 흘리더니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퉁겼다. 레그리아는 불만에 찬 얼굴로 한쪽 뺨을 부풀렸다.

    이런저런 말을 던져 놓곤 정작 중요한 얘긴 하나도 해 주지 않는다.

    돌탑에 가 보라는 건 아마 시험이겠지.

    그녀가 라히크의 감시를 따돌리고 거기까지 가서 뭔가를 볼 정도의 능력이 되는지 살피겠다는 것 같았다.

    “좋아. 대신 내가 그 돌탑까지 가서 보라는 걸 보고 나면… 계약 조건은 내 쪽이 더 우세해지는 거로 약속해.”

    “편하실 대로.”

    사실 약속하라고 한들 지키지 않으면 그만일 뿐이지만 애초에 레그리아는 원하는 게 하나뿐이었다.

    제 인생을 살게 내버려 두는 것.

    라히크와는 조금 다르더라도 어차피 에화 역시 수많은 걸 가진 자다. 돈이든 권력이든 애정이든 모자람 하나 없이 큰 티가 흘렀다.

    저런 남자가 굳이 그녀에게 매달릴 이유도 없고 진짜 그녀를 좋아할 리도 만무하다.

    ‘라히크에게 신성인이라는 내 존재가 없어지면 아마 정치적으로 타격을 크게 입을 거야.’

    그리고 아마도… 내면적으로도.

    지금까지 몇 번이고 정신 접촉을 해 왔던 그녀가 없어지면 내면이 피폐해질 건 확실했다.

    레그리아는 도덕성과 양심을 자신의 마음 한쪽 편에 살며시 놓아두었다. 계속 보고 있자니 아주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지만 한쪽 눈을 감고 모른 체 지나가지 못할 것은 또 아니었다.

    라히크는 그녀에게 잘해 주었다. 심지어는 목숨을 구해 주기까지 했지. 그걸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평생 책임을 져야 하나?’

    그럼 그녀 자신의 삶은 대체 언제 살고.

    그런데 에화가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더 걸려던 바로 그때였다.

    똑똑.

    바깥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정중한 노크음이 안쪽 문을 울렸다.

    “비체 누님. 혹 거기 계십니까.”

    거기에 더하여 어떤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비체라면, 비트리체를 찾는 것일 텐데.

    “이크, 진짜 동생이 왔네. 그럼 난 이만 빠져 줄게요.”

    “아…!”

    “대답은 나중에 들으러 갈게.”

    에화는 아주 비밀스럽게 귀엣말을 하더니 이내 상큼하게 웃으며 순식간에 창틀을 넘었다. 그러자마자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커튼을 친 레그리아는 뻣뻣한 천을 손아귀에 말아 쥐고 문을 쳐다보았다.

    “저는 디트리히 로에르멜이라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좋아.”

    “감사합니다.”

    허락을 얻은 상대가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이내 나타난 자는…….

    아까 지젤에 대한 충격 탓에 미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비트리체의 남동생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