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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134)
  • 34화

    강렬한 등장치고는 너무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 탓에 레그리아는 순간적으로 저 남자와 자신이 알던 사이인가 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모든 빛을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새카만 머리칼. 그와 대비되는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은 꼭 어느 동화 속 공주님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얼굴만 그렇다는 것이다.

    표드르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엘프 같다면 이쪽은 벼랑 끝에 서서 몸을 던질까 말까 장난을 치는 광대처럼 위태롭고 위험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라히크와는 궤가 살짝 다른 미친놈 같은 느낌.

    완벽하게 재단하여 몸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수트 핏은 라히크의 제복과는 또 다른 멋이 배어난다. 거기에 한쪽 어깨에 대충 늘어트리고 있는 털가죽 코트는 저자가 직접 사냥한 짐승으로 만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싶어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신원 미상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난 에화라고 해. 반가워. 연어 샌드위치 먹을래?”

    “나는….”

    “아니면 버섯 수프도 있어. 아, 수프에 찍어 먹으려고 바게트랑 버터도 슬쩍해 오긴 했지.”

    살살 흘려대는 눈웃음이 정말 예뻤다.

    말문이 막혀 어쩔 바 모르고 있자니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스쳐 지나가 중간 문을 닫아 버리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에화는 멀쩡한 소파는 내버려 두고 테이블 옆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이것저것을 꺼내놓았다. 심지어는 연한 베이지 빛깔 식탁보까지 펼쳤는데 그 덕에 간소하게 차려놓은 식사가 더 맛깔스럽게 보였다.

    꼬르륵.

    그래도 낯선 사람이 주는 걸 먹는 건 아니다 싶어 거절하려 했건만 하필 그때 배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

    에화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죽여 웃더니 얼굴이 빨개진 레그리아에게 먹기 좋게 썰린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자, 아.”

    “…너부터 먹어 봐.”

    “그러려고 했어. 자, 나 잘 먹지?”

    혹시 약을 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용감하게 한마디 했는데 에화는 대수롭지 않게 내밀었던 샌드위치를 제 입에 가져가 우물거렸다.

    하도 맛있게 먹는 바람에 군침이 돈다.

    그런 다음 에화는 장난감 국자 같은 걸 들더니 작은 항아리에서 수프를 떠 또 장난감같이 작은 그릇에 담았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먹어 봐?”

    “응.”

    “의심이 많네. 그건 좋은 일이야. 오래 살게 해 주거든.”

    히죽 웃은 에화가 스푼도 쓰지 않고 수프를 아예 그릇째로 마셨다. 그것까지 보고 나서야 레그리아는 제 몫으로 덜어주는 수프를 받아들었다.

    “자, 예비 황태자비께서는 고상하게 스푼을 쓰셔야지.”

    “스푼이 있는데도 그렇게 들이마신 거니?”

    “응. 이게 편하잖아.”

    붉은 혀가 야시시하게 입가를 훑었다. 일부러 보란듯 하는 행동인 게 뻔하여 레그리아는 오래 눈길을 두지 않고 수프를 떠먹었다.

    사실, 이런 게 간절했다.

    죽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수프라도.

    “옳지. 잘 먹네. 난 잘 먹는 여자가 좋더라.”

    조용히 식사할 곳을 찾아 여기에 몰래 들어온 것이기라도 하다는 듯 에화는 정말 열심히 밥을 먹었다. 하도 날름날름 잘 집어먹기에 레그리아는 속으로 좀 감탄을 했다.

    그렇게 식사에 집중을 하면서도 제게 꾸준히 뭘 권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 비스킷 먹어 봤어? 여기에 버터를 바르고 소고기 카르파초를 한 점 올리면… 진짜 맛있는 카나페가 되거든.”

    “아하.”

    “먹어 봐. 자, 아.”

    “내가… 먹을게.”

    “에이, 만들어 준 사람 성의가 있는데. 응? 아, 해봐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과 분위기를 이끌어갈 줄 아는 사람이다.

    레그리아는 어느덧 자신이 에화에게 휘말렸음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순순히 받아먹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린 에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제 입에 카나페를 털어 넣었다.

    “아, 이제 좀 배가 부르네. 사흘 내내 굶주려서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칭얼거리듯 말한 에화가 소파를 등받이 삼아 기댔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올려 저를 거꾸로 쳐다보는 게 아닌가.

    어쩌다 보니 가까이서 에화의 눈을 들여다보게 된 레그리아는 움찔하며 놀랐다.

    ‘동공이…….’

    저게 가능한 빛깔인가?

    ‘눈이 꼭 보석 같아.’

    어떻게 사람 눈동자가 저렇게까지 예쁠 수 있을까.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 국보급에 해당하는 왕관의 중앙에 박힌 분홍색 다이아몬드를 감상하는 것처럼 방금 보고 다시 봐도 또 탄성이 나오고 마는 눈이었다.

    “내 눈, 예쁘지?”

    에화는 그런 사실을 잘 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뚫어져라 봤다는 생각에 민망해진 레그리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예쁘게 태어난 내 얼굴이 나도 좋아.”

    에화가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는 체했다. 누가 들으면 레그리아가 대단한 칭찬이라도 해 준 줄 알 법한 말투였다.

    그런데 그게 또 재수 없게 들리지 않는다는 게 매력이다.

    진짜 곱상한 미남이라 그런가.

    잠시 침묵하던 레그리아는 문 쪽을 향해 시선을 흘긋 던졌다.

    운 좋게 식사하는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라히크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라히크가 오기 전에 어떤 이야기든 이어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선 맛있는 음식을 나눠줘서 고마워.”

    시작은 감사 인사부터.

    에화는 별것 아니라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장난스레 대꾸를 해왔다.

    “내가 더 고맙지. 맛있게 먹어 줘서 내 밥맛이 살던걸?”

    피식 웃는 에화에게서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날 것의 분위기가 흘렀다. 라히크보다 못해도 서너 살은 어릴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녀보다도 어리다는 의미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굳이 반말을 하지 말라고 지적하진 않았다. 그럴 시간에 더 중요한 것부터 물어봐야 하니까.

    “신분이 어떻게 돼?”

    “비밀.”

    “치사하네. 나에 대해서는 다 알고 여기에 찾아온 것 아니야?”

    이건 큰마음 먹고 던져본 낚싯바늘이었다.

    딱 봐도 순진해 보이진 않는데 그녀에 대해 모를 리가 있나.

    에화 역시 어떤 필요성이 있어서 그녀가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접근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화는 능구렁이처럼 넘어갔다.

    “글쎄, 세 가지 정도는 알아요. 신성인이라는 거랑 눈빛이 예쁘다는 거?”

    “나머지 하나는?”

    “우리 형이랑 결혼할 사이라는 거.”

    형?

    설마 라히크를 이르는 건가?

    라히크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기에 레그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납득이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라히크가 눈깔이 살짝 돌아있는 금빛 털의 표범 같다면… 이쪽은 별 차이 없이 그냥 색만 다른 검은 표범 같으니까.

    아니지, 좀 더 어둑하다고 해야 할까.

    라히크가 당당하게 볕 속에서 동족을 이끌고 걷는 자 같다면 에화는 어둠 속에서 홀로 버티고 있다가 단숨에 달려들어 숨통을 끊어 놓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레그리아는 부정부터 해 보았다.

    “에화라는 이름은 황족 명부에서 본 적 없어.”

    “당연히 없겠지. 나는 황제의 애인이 낳은 아들이거든.”

    민감할 수도 있는 주제인데 에화는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더니 라탄 바구니 바닥에서 곱게 접힌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곤 그걸로 그녀의 입가를 톡톡 두드려 닦아 주는 게 아닌가.

    “황제의 애인이 아이를 가지면 보통은 고위 귀족의 아내가 돼. 그러니 나를 찾으려면 황족 계보가 아니라 귀족 계보를 뒤져야 하는 거야.”

    친절하게 설명을 마친 에화가 싱긋 웃었다.

    한 번 웃을 때마다 사르르 내려가는 눈꼬리가 설탕처럼 달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을 홀리듯 웃는 건지 신기할 뿐이었다.

    레그리아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귀족 계보도를 펼쳤다. 그러니까 에화라는 이름은, 저 특이한 이름은… 역시 본 적 없는데.

    “본명이 아니지?”

    “참, 누나. 우리 형 좋아해요?”

    “아니?”

    너무 갑작스레, 그것도 다짜고짜 나온 질문인지라 레그리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직하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혹 실수했나 싶어 표정을 굳혔으나 에화는 상관없다는 듯, 오히려 좋다는 듯이 상체를 돌려 소파에 팔꿈치를 기댔다. 그러곤 꽃받침을 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네. 우리 형 좋아하지 마요. 누나가 훨씬 아까워. 형은 쓰레기거든.”

    “…보는 눈은 있구나.”

    그래도 형인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레그리아는 저를 빤히 보다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에화를 뚱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그녀는 생각과 말이 거꾸로 나갔음을 알아차리고 이번엔 귀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아, 진짜 귀엽네. 누나, 우리 형 앞에서도 이렇게 귀엽게 굴어요? 확 잡아먹고 싶게.”

    “연하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럼 누나가 나한테 말해 주면 되겠다. 확 잡아먹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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