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34)
  • 33화

    나직하고도 정중한 음성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연하게도 라히크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세비레이크 경.”

    고마워라.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이기 위해 손을 주어야 하니 레그리아는 자연스럽게 지젤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한 발짝 물러선 지젤은 세비레이크 경을 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언니! 아는 분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영애. 그럼 이만.”

    “잠깐만요! 저도 같이 가요!”

    세비레이크 경은 서늘한 시선으로 지젤을 응시하더니 이내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인사 외의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레그리아를 이끌었다.

    한 발짝씩 천천히, 그녀의 걸음에 맞추어서.

    덕분에 레그리아는 세비레이크 경의 단단한 팔뚝에 몸을 좀 기댈 수 있어 걷는 게 훨씬 수월했다.

    “언니, 피아노는 어디서 배운 거예요?”

    “나중에.”

    “힝, 그렇지만 지젤은 지금 궁금한걸요.”

    저를 향하는 녹색 동공 밑바닥에 악의가 넘실거린다.

    레그리아는 그걸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기에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황족은 누구의 말이든 무시해도 된다며.

    라히크 역시 제멋대로 그러지 않나.

    “언니, 언니!”

    언니, 언니, 언니, 언니…….

    미칠 것 같다. 다행이라면 황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 휴게실은 파티가 열리는 글로리 홀의 바로 옆에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귀족들이 쓸 수 있는 휴게실은 좀 더 먼 곳에 있으니 이건 황족만의 특권이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헐떡거리려는 숨을 막고 문 앞에 서자 걸음을 멈춘 세비레이크 경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고 그는 곧 따라붙으려는 지젤을 막아섰다.

    “거기까지. 더 다가오지 마십시오.”

    “왜요?”

    “아직 사교계에 정식 데뷔를 하지 않으셨으니 잘 모르실 수 있다 판단하여 예의 없음을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황족만이 입장할 수 있는 공간이니, 영애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어, 언니는 되는 거예요…?”

    “예. 당신은 안 됩니다.”

    무례할 정도로 직설적인 말이다.

    지젤은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레그리아는 그러든 말든 제발 좀 쉬고 싶었다.

    제 안을 헤집는 충격을 혼자 삼킬 시간이 필요하니까.

    “쉬고 나오십시오. 앞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세비레이크… 경.”

    “표드르면 충분합니다.”

    덤덤한 목소리와 인상이 그날의 울음에 젖었던 사내가 맞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레그리아는 입속으로 ‘표드르’라고 중얼거리곤 미소 한 조각을 남긴 채 문을 닫았다.

    쿵.

    느리고 무겁게 닫힌 문에 기대어 멍하니 앞을 응시하던 레그리아는 이내 스르르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아.’

    어쩌지. 토할 것 같아.

    주변을 서둘러 둘러보았지만 토할 수 있는 양동이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완벽하게 꾸며진 이 휴게실엔 그런 것 따위 둘 공간은 없어 보인다.

    우선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서인 듯 문 안쪽에 문이 또 있었다. 비스듬히 열린 두 번째 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저 안이 꼭 동화 속 세계처럼 느껴진다.

    한쪽 벽면엔 따뜻한 난롯불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고, 소파 주변과 유리 테이블은 이름 모를 꽃과 나무로 장식되어 있었다.

    진한 푸른색 쿠션이 크기 별로 여러 개 놓여 있어 저 소파까지 가기만 하면 누워서 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도저히 지금 일어설 수가 없다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어.’

    두툼한 카펫이라도 깔려 있어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영락없이 감기에 걸렸으리라.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무시할 게 못 되니까.

    “…….”

    방금 있었던 일을 억지로 기워 복기하자니 갑자기 몸이 으슬거리며 떨려 왔다. 설상가상으로 눈가에 오른 열은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머릿속이 혼몽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동생이야. 틀림없어.’

    레그리아는 이제 가족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건 신성인의 영혼과 육신이 결합되며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한다.

    아마 반년만 지나도 이전의 삶이 어땠는지 거의 잊을 거라 하였지.

    어쩌면 레그리아는 행복할 수 있었다.

    이전 삶을 전부 잊어버리고, 평범한 이 나라 사람이 될 수도 있었겠지. 여기서 도망한 뒤에는 평민인 체하며 어느 시골에 내려가 피아노 교습실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작스레 나타난 동생으로 인해 잊혀 가던 기억들이 얼어붙어 고정되고 말았다.

    그녀에겐 잊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아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는 척하긴 죽어도 싫다. 하지만 그녀가 연주를 듣고 동생인 것을 바로 알아차렸듯 저 애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니 그렇게 끈덕지게 들러붙은 거겠지.

    한번 관심 가진 건 끝까지 파헤쳐 놔야 만족하던 애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아는 척을 할 필요는 없긴 해. 지젤이 신성인이라는 걸 로에르멜 공작도 밝히지 않았잖아.’

    가만. 그럼 그걸 왜 밝히지 않았지?

    -신성인은 발견하는 즉시 신황청에 신고를 하게 되어 있어. 그건 알지?

    ‘응, 알지.’

    -하지만 불법적으로 신성인을 모으는 집단도 존재해. 신성인을 성노예로 팔아치우는 자들이지. 질 나쁜 신성 기사들에게 말이야.

    ‘로에르멜 공작이 그런 일에 손을 대고 있는 건 아닐 거잖아.’

    -그래, 그건 아니지. 내 어머니라면 신성인을 무기로 사용하고자 할 테니까.

    비트리체가 시니컬하게 답했다.

    신성인을 황가나 신황청 몰래 보유한 이유.

    신성인이 가진 힘.

    ‘설마… 신성 기사들에게 강제로 정신 접촉을 시키려고?’

    정신 접촉을 하고 난 뒤, 까칠하던 신성 기사의 태도가 얼마나 우호적으로 변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아는 바가 있다. 누구와도 짝을 맺지 않고 수많은 신성 기사와 정신 접촉을 한다면, 이론적으로는 접촉한 모두가 우방이 될 수도 있기는 했다.

    신성 기사들 역시 바로 그런 걸 가장 경계하지 않던가.

    ‘표드르는 괜찮을까?’

    -네가 이미 깊숙하게 접촉했잖아. 하룻밤 내내. 이미 표드르의 내면엔 네가 도장을 찍은 거나 마찬가지니 저년이 시도하려 해 봤자 소용없어.

    비트리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다행이긴 하지만 역시 조금 미안하다.

    그 정도로 깊게 연결이 되면 앞으로도 표드르는 그녀 아닌 다른 신성인의 접촉을 허용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의지를 가지고 선택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그녀가 아닌 다른 신성인이 간섭하려 들면 곧바로 강력한 거부를 느낄 테니.

    ‘내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 표드르는 어쩌지.’

    사실 그렇게까지 깊이 침투할 생각은 없었는데.

    한숨을 내쉰 레그리아는 이제 몸의 떨림이 좀 나아졌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소파까지 갈 힘은 있다. 정신을 조금 차리고 나니 그제야 위장이 쪼들리듯 아파 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먹지 못했구나, 나.’

    파티에 대한 부담감 탓에 아침부터 굶었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휴게실에 준비되어 있는 빵이나 살라미, 치즈 같은 건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금 간절한 건 흰죽과 간장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네.’

    덜컹덜컹.

    소파 옆의 창문이 마구 흔들린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레그리아는 구두를 벗고는 부어 있는 발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조금 더 서 있었으면 새끼발톱에 멍이 들었을 것 같다.

    굽이 깎아지를 듯 높은 구두는 정말 취향에 맞지 않았지만, 모두의 위에 서는 이는 키가 커야 한다는 에오스의 주장에 어쩔 수 없이 신은 거였다.

    “하아.”

    구두를 옆으로 치워 두고 얇은 스타킹만 신은 상태가 되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소파에 몸을 붙이는 동안에도 창문은 여전히 덜컥거렸다. 경첩이 맞지 않기라도 한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신황청 건물은 상당히 낡은 것을 오랜 세월 개보수하며 써 왔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하는 레그리아도 계속해서 갉작거리는 소리가 이어지자 일어서 볼 수밖에는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인가 싶어 창문께로 다가간 그녀는 움찔하며 멈춰 섰다.

    “아, 이제야 열렸네. 뭘 이렇게 꼭꼭 닫아 놨대?”

    낯선 음성이다.

    라히크나 표드르보다 좀 더 젊고 발랄한 목소리는 분명 남자의 것이었다.

    어딘가 장난스럽지만 꼭 그만큼 위험한 분위기.

    주춤거리며 물러선 레그리아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소리를 지르면 표드르가 뛰어들어올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아.

    ‘하지만 만약… 만에 하나. 이 사람이 내가 기다리던, 라히크와 적대하는 누군가라면?’

    어쩌면 제게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안녕?”

    망설이는 사이 창틀 위로 누군가 훌쩍 올라탔다. 우아한 흑표범처럼 날렵하면서도 유려한 움직임이다. 이렇게 담을 넘는 걸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바짝 긴장한 레그리아를 향해 남자는 손목에 걸린… 라탄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해사한 눈웃음을 살살 흘리면서.

    “배고파 보이는데. 같이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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