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올려다본 라히크는 사납게 웃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힌다.
‘승기를 되찾아오기를 바라는 거구나.’
강제로 떠밀린 검투사가 된 기분이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달아나고 싶은데 나가서 싸워 이기라니.
하지만 비트리체마저도 그녀가 도망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콧대를 팍 눌러놓지 못하기만 해봐. 내가 나설 테니!
진퇴양난이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당해 왔던 비교와 무시가 여전히 그녀의 속을 갉아 내리고 있었다.
무얼 연주하든 어차피 저 애보다는 못할 텐데…….
이제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없는 세계에서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착각했지.
사실은,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낙원 같은 게 있을 리 없는데.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잠시나마 꾸었던 단꿈이 식도에 눅진히 들러붙었다. 연주가 절정을 향하자 손바닥 안쪽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난다.
이대로 돌아서서 어디론가 가 버리고 싶다. 이 엄청난 연주를 듣고 어떻게 그 다음에 피아노에 앉을 수 있을까. 무슨 낯짝을 들고…!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문득 저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 돌아왔는지 세비레이크 경이 군중 속에 서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들 피아노에 앉은 요정을 보고 있는데 오직 세비레이크 경 하나만은 그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정말 이상하게도.
‘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저를 봐주고 있구나 싶어진 게 이유일까.
흔들림 없는 그 시선을 고요히 마주하고 있자니 어떤 곡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 이 순간 연주하고 싶은 곡을 말하라면 오직 그것뿐일 듯했다.
“와, 정말 멋집니다! 제 가슴이 다 웅장해지는군요!”
“참 복도 많으시지. 숨겨둔 따님이 이리 재능 넘치실 줄이야.”
“바로 독주회를 가지셔도 될 것 같군요. 다시 듣고 싶습니다.”
이런 자리에선 통상적으로 하나의 악장, 혹은 15분 이하로만 연주하는 게 예의다.
다들 지루함을 느낄 만큼 연주가 너무 길어져서도 안 되고 관심을 혼자 독차지해서도 안 되니까.
레그리아는 자신만만하게, 꼭 동생처럼 웃는 지젤을 보며 이제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음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예비 황태자비께서도 연주를 하실 줄 안다 들었습니다.”
슈만 부코바츠가 나서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무게 중심을 잡았다. 그에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재미난 광경을 어떻게 놓칠까.
레그리아에게는 끔찍한 시간이더라도 저들에겐 유희일 뿐.
‘고통도, 위로도 모두 이 곡에.’
대답 없이 조용히 의자에 앉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방금 선보인 첼로 연주 실력 정도로는 지젤이 보여준 피아노 연주엔 댈 수 없을 거라는 냉정한 평가다.
건반 위에 손을 얹은 레그리아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려 들지 않는다. 어차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긴 세월 아등바등 노력해 보았어도 결코 동생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도 나의 음악을 연주할 수는 있는 거야.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더라도 상관없어.’
새하얀 눈밭 같은 차가운 건반을 누른다. 지금 그녀의 온 마음을 담아서.
파티와 어울리진 않을지 몰라도 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앉힌 만큼 곡은 그녀의 마음대로 고를 셈이었다.
“……이건.”
“베토벤의 비창 아닌가요?”
“쉿, 조용히 좀 하세요.”
다정한 선율 속에 담아낸 염세와 회한. 다가오는 고통과 불안을 피하려 하지 않고 그저 담아낸다.
무섭더라도 어쩔 수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뿐. 가진 것 역시 이것뿐이다.
그러니 나의 고통을 낭만으로 감싸자.
극도의 슬픔을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피아노와 한 몸이 되어 선율 속에서 흔들리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니까.
‘승기가 넘어왔군.’
그리고 연주에 몰입한 레그리아의 곁에 선 라히크는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만족스럽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레그리아의 재능은 한계 없는 축복이다.’
연주는 비참하고 애잔했다.
무엇이 그리 고통스러운지 레그리아는 마치 온몸으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결국 모든 감정을 삼킨다. 눈물 한 방울 떨어트리지 않고 담담히 연주를 이어가는 게 저 여자의 고집이었다.
어쩌면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계속 건드리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차라리 모든 감정을 터트리며 그의 품에 기대 울기라도 하였으면 싶은데, 레그리아는 결코 그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극도로 강력한 거부엔 광기마저 서려 있다.
제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용납지 않는 저 자존심이 괘씸하기 그지없다.
선율이 물살처럼 흐른다. 연주가 이어질수록 장내엔 기묘한 흐름이 생겨났다.
연주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과 아닌 이들로 감상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상관없다. 어차피 슈만이 인정하면 들을 귀가 없는 머저리들은 죄 천재로구나 할 테니.’
소문은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피아노 연주까지 이어지도록 할 생각이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이야.
라히크는 꼿꼿하게 서 있는 로에르멜 공작을 흘긋 살피고는 그 곁에 서 있는 영애의 표정을 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꽤 봐줄 만했다.
뭐 저렇게까지 충격을 받은 건진 모르겠으나 괜찮은 광경이다.
‘꼭 레그리아가 뒤통수를 치고 제 것을 빼앗아 가기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이군.’
어이가 없다.
방금 저 여자가 선보인 연주는 괜찮았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그 정도 수준은 라히크 역시 연주할 수 있다.
진짜 천재란 천재라 불리는 자들을 위협하는 자다.
범인(凡人)과 달라 평생 죽을 때까지 자신이 일궈내는 예술을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보라. 이곳에 선 대부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질 않은가.
한데 음악에 조예가 깊은 자들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특히 슈만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주름진 얼굴을 온통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그런 슈만의 반응에 곁에 서 있던 자들도 뭔가를 느끼는 척이라도 해 보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고.
“…….”
연주가 끝났지만, 파티장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라히크는 누구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 박수를 쳤다.
“이런 연주를 두고 경지의 저편에 있다고 표현하지. 그렇지 않나? 슈만.”
“……예, 실로… 실로 그러합니다.”
슈만이 간신히 눈가를 훔치고는 비틀거리며 레그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한 듯 보이는 레그리아의 두 손을 움켜쥐고 거세게 외쳤다.
“이 슈만! 오늘 이 순간부터 예비 황태자비 전하의 수족이 되고자 합니다. 부코바츠 가문을 부디 영솔로 받아주소서.”
영솔(榮率).
그 특이한 단어에 레그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건 기사들이 하는 충성의 맹세와 비슷한 범주에 속하는 말이었다. 당신의 영광의 그림자에 속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의미로, 충성을 바치겠노라는 뜻이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기도 했다.
저런 청을 하는 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도 좋다는 허락이나 다름없으니까.
“세상에, 저 자존심 강한 부코바츠 후작 부인이 영솔의 맹세를?”
“말도 안 돼요. 저 깐깐한 분이… 제 아들은 재능이 없단 이유로 수업조차 받을 수 없었다고요.”
“부코바츠 후작 부인은 억만금을 줘도 내키지 않으면 연주를 하지 않기로 유명하지요.”
“저런 분이 인정을 하다니… 로에르멜의 둘째 딸보다는 예비 황태자비 전하의 연주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뜻인가 봅니다.”
흥분 섞인 속삭임이 드레스 틈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물론 부정적으로 보는 자들도 있었다.
“황태자 전하와 미리 이야기가 되었겠지요. 부코바츠 후작 부인은 워낙 황태자 전하를 아끼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분이 얼마나 대쪽 같은데요. 게다가 영솔의 맹세를… 그냥 할 수 있나요?”
“커흠,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건 곧장 반론에 부딪혔다.
슈만의 성격은 사교계 내에서도 유명했던 것이다.
그런 슈만의 선언은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모두들 혼란스러워 했다.
그리고 그 맹세를 받은 대상자인 레그리아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뭐지…?’
꿈이라도 꾸고 일어난 것 같다.
연주를 하는 동안은 의식이 날아가 버려서 깨어난 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지하는 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다.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된다.”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라히크가 부드럽게 일러 주었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그러겠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에 레그리아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겠네.”
와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홀이 뒤흔들렸다.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내는데 그 바람에 샹들리에의 촛불이 몇 개 꺼질 정도였다.
레그리아는 얼떨떨한 채로 슈만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라히크는 대단히 만족스러워 보이니 이 영솔의 맹세가 뭔지 차후 따져 물어야겠다.
일단 메슥거리는 속을 가라앉힌 뒤에.
“라히크,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아.”
“그게 좋겠지. 황족 전용 휴게실엔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으니 편히 쉬고 와도 된다.”
“응.”
그 말을 끝으로 라히크는 슈만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휴게실까지 데려다준다더니.’
역시 믿는 게 아니었다.
레그리아는 저를 향해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인 입들을 향해 설핏 미소를 짓곤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붙잡을 수 있을 만큼 너무 느리지도 않게 확실한 간격을 두고 문을 향했다.
비트리체가 그녀의 내면에서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저것 좀 보라며, 한 방 먹은 표정 아니냐고.
그런 말을 듣고 로에르멜 공작 쪽을 슬쩍 보았지만 레그리아가 느끼기엔 딱히 동요는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비트리체는 딸이었으니 제 어머니의 표정을 그녀보다야 잘 읽을 것이다.
“언니! 저, 언니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
“지젤이랑 음악 이야기를 해 줘요. 네에? 언닌 정말 대단해요!”
그렇게 간신히 태연함을 가장하며 걸어 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지젤이 무람없이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려왔다.
그렇게 말하면 꼭 모두가 들어줄 거라는 듯 당당한 태도는 거절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 딱 좋다.
혼신을 다한 인내심으로 지젤을 쳐내지 않은 레그리아는 꽉 붙잡힌 팔을 빼내기 위해 몸을 슬쩍 비틀었다.
‘싫어.’
닿는 것조차 싫다.
만약 이 애가 그녀의 동생이 맞다면. 진짜 그 애도 귀족의 몸에 빙의하여 이곳에 온 거라면…….
“휴게실까지 모시겠습니다, 레그리아 님.”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