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34)
  • 31화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라히크마저 감탄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진심으로, 재수 없게 굴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의아했다.

    그녀는 그저 동생이 선물 받은 뒤 대충 던져 놓은 첼로를 몰래 연주해 봤을 뿐이었다.

    혹시 그녀가 관심을 둔다는 걸 알면 처박아 둘 물건이라도 도로 빼앗아갈 게 뻔했으니 동생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천재는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모두의 사랑과 찬사를 받으면서 자신만의 음악을 쌓아 올려 가지.

    그녀처럼 이걸 조금 손댔다가, 저걸 또 조금 손대는 사람은 절대 천재가 아니었다.

    “칭찬이 너무 과해.”

    “과하기는요! 제가 일평생 가르쳐 본 학생만 천 명이 넘습니다. 그중 나이가 든 뒤에 처음 손대 본 악기를, 독학하여 수준급으로 연주를 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반년이라니요?”

    귀에 단 말은 경계해야 마땅한데 어째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지 모를 일이다.

    너무 칭찬을 못 듣고 자라 와서 그런가.

    예비 황태자비가 아니면 해 주지 않았을 칭찬이겠지만, 그렇게라도 잘한다는 말을 들으니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아까보다 한결 자연스럽게 웃은 레그리아는 또 한 번 겸양의 말을 입에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박수를 쳤다. 마치 그녀의 말을 가로막는 것처럼.

    “멋져요! 대단해요, 정말!”

    앳된 목소리…?

    난데없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힌 음성은 갓 피어난 꽃 속에 잠든 요정처럼 발랄하고 귀여웠다.

    “언니! 너무 뵙고 싶었어요…!”

    그러나 맹세컨대, 레그리아는 다짜고짜 제 팔짱을 껴오는 이 여자가 누군지 몰랐다.

    솜사탕 같은 분홍빛 머리칼과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가진 여자는 제 나이보다 몇 살은 더 어려 보인다.

    치맛단이 양쪽으로 넓게 퍼진 데다 프릴이 잔뜩 달린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어 더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다.

    “영애는?”

    중간에 대화가 끊긴 게 불쾌한 듯 슈만이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앗! 저는 지젤 로에르멜이라 해요. 처음 뵈어요. 이 멋진 파티장에 방금 도착했는데 첼로 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지젤도 연주를 좋아해서, 마구 달려와 버리고 말았어요.”

    지젤이 헤헤하고 웃더니 제 머리를 스스로 콩, 하고 때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레그리아는 일단 붙잡힌 팔부터 빼냈다.

    쳐내거나 밀지 않고 차분하게.

    그런 다음 그녀는 속에서 차오르는 욕지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로에르멜. 로에르멜이라고.

    하지만 여름 울타리의 자식은 1녀 1남이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저렇게 다 큰 딸이 또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어째서….’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저 무람없는 행동과 살짝 버릇없는 태도. 제가 어리광을 피우면 모두가 다 그걸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말투.

    다 너무 익숙하지 않나.

    레그리아는 저런 ‘천재’를 알고 있었다.

    “저어, 있죠. 지젤도 피아노를 들려 드리고 싶어요.”

    “…….”

    “그래도 될까요? 언니.”

    -저게 언제 봤다고 언니야?

    제 안에서 기운이 확 솟구치더니 아까와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난동을 피운다. 레그리아는 살짝 비틀거렸지만, 남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자세를 바로 했다.

    비트리체가 몸의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한다.

    다른 때라면 얼마든지 그냥 넘겨 주었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나 외에 다른 신성인은, 이 자리에 올 수 없다고 했어. 그러니까… 아닐 거야. 아닐 텐데도.’

    심장이 불온하게 뛴다.

    확인하고 싶은 욕구와 그러기 싫은 마음이 서로 뿔을 들이박으며 싸워댔다.

    그러는 동안 파티장의 주목도는 시시각각 지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사랑스럽고 비밀스러운 공작 영애.

    시선을 빼앗기엔 딱 알맞은 요소가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

    “무례하군. 영애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라히크가 ‘모르겠다’라고 한 건 모욕이었다.

    기억할 필요 없을 만큼 약소한 가문이라는 의미이거나 혹은 네가 누군지 알긴 하지만 앞으로도 쭉 모른 척하고 싶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지젤은 그런 사교계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또다시 헤헤 웃었다.

    “맞아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어요. 전 오랫동안 요양을 하다가 이제야 가문에 돌아왔거든요.”

    “요양을 했다라?”

    “저는 여름 울타리의 두 번째 꽃. 디트리히 로에르멜의 누나예요. 물론, 여기 있는 레그리아 언니의 동생이기도 하고요!”

    술렁.

    당당한 외침에 귀족들이 서둘러 의견을 주고받았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믿을 수도 없지 않나. 사실이 아니라면 목이 달아날 텐데 저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는 거라면 진실일 확률이 높다.

    “엄마!”

    그러던 그때, 지젤이 치맛자락을 와락 움켜쥐더니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기다리라 하여도 그리 빨리 달려가니.”

    “엄마, 저 언니를 만났어요!”

    단 두 마디의 대화였을 뿐이다. 한데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냉혈한, 마녀, 거인.

    수많은 별명을 가진 로에르멜의 수장.

    로에르멜 공작이 제게 안기는 지젤의 등을 다정히 토닥여 주는 게 아닌가!

    그 믿기지 않는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엄마, 라고…?”

    무심코 한 마디를 중얼거린 레그리아는 얼른 혀를 깨물어 더 입을 열지 못하게 스스로를 막았다.

    그녀의 안에서 비트리체가 발광을 했다.

    당장 달려가 지젤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뺨을 치고 싶어 아주 안달이었다.

    -엄마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난 저런 애 들어 본 적도 없어!

    잠시만, 제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지 말아 줘.

    머리가 핑글 돈다. 점점 미열이 올라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우연도 이렇게까지 빌어먹을 우연이 다 있나.

    “로에르멜 공작. 이건 또 처음 듣는 소식이군.”

    “황태자 전하. 딸 하나를 잃은 날에 다른 딸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쁘기 한량없을 뿐입니다.”

    라히크의 말투에 어이없음이 묻어났다. 그 역시 알지 못한 상황이라는 걸 확인한 레그리아는 만개한 꽃처럼 생글거리는 지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반짝이는 연녹색 눈동자 깊숙한 곳 어딘가에 그녀의 동생이 숨어 있진 않을지.

    ‘신성인이라는 걸 속이고 데려와서 소개했을 수도 있어. 그러기엔 완벽한 자리긴 하니까.’

    지금 이 상황은 보이는 그대로 해석할 게 아니다.

    지젤을 데려와 굳이 여기서 내보이고 레그리아에게 쏠렸어야 할 관심을 양분시킨 건 로에르멜 공작이 크게 둔 수였다.

    첫째 딸이 신성인이 되어 황태자비에 오른들 결코 라히크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지는 않겠다는 직설적인 뜻이며 중립파로서 로에르멜의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앞으로도 중립을 유지하겠다.’

    ‘그건 다 알겠어. 알겠는데.’

    왜 하필 내놓은 수가, 이런 지독한 운명의 농간이어야 하나.

    “이런, 저희 때문에 즐거운 분위기가 깨져 버렸군요. 늦게 온 잘못도 있사오니 제 둘째 딸의 흥겨운 연주로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로에르멜 공작은 등장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레그리아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얼핏 지나가는 눈길 한 번조차 없다.

    마치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런 것조차 이전의 삶과 거울처럼 닮을 필요는 없을 텐데.

    “그거 괜찮군. 무슨 연주를 할 테지? 영애.”

    “지젤이 연습을 해온 게 있어요. 부끄럽지만 부족한 솜씨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지젤이 끼고 있던 긴 장갑을 벗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곤 피아노를 향해 도도도 달려가 거기에 있던 연주자를 밀어내고 의자에 착 앉았다.

    약간 버릇없지만, 어차피 연주자는 평민이니 어깨를 쳐서 의자에서 떨어트렸다고 한들 죄가 될 것은 아니다.

    실제로 눈살을 찌푸린 건 레그리아뿐인 듯했다.

    -너 진짜 저년이 연주를 하게 내버려 둘 거야? 난 저런 애 모른다니까? 공작이 또 어디 빈민가에 가서 아무나 주워 왔겠지! 뻔해!

    둥.

    피아노의 높은 건반이 울림과 동시에 비트리체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스러졌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스치듯 움직인다. 그건 마치 수면에 내려앉은 꽃잎 같았고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빠른 선율은 요정의 노래처럼 들렸다.

    ‘아아.’

    레그리아는 순간, 탄식했다.

    ‘나는 이런 연주를 알아.’

    베토벤의 황제.

    동생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 쳤던 곡.

    살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칼 뒤로 동생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이젠 거의 잊어버려 기억이 선명하진 않았으나 동생의 연주를 알아듣지 못할 리는 없었다.

    결코.

    “세상에, 정말 대단하군요.”

    “듣자마자 춤을 추고 싶어져요.”

    “마치 요정 같은 연주예요. 그렇지 않나요? 저런 실력자라니…….”

    명치가 지끈거린다. 누군가 거세게 배를 치고 지나간 것처럼, 슈만이 해 주었던 칭찬이 이젠 그녀를 더할 나위 없이 부끄럽게만 만들었다.

    봐, 다들 저 애에게 감탄하고 있잖아.

    천재라는 건 저런 건데…….

    “괜찮나?”

    그때,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더니 제 몸에 기대게 만들었다.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묻는 음성에 레그리아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쓰러지면 안 돼. 저자의 연주가 끝나면 반격의 시간이니. 그 뒤에 황족 전용 휴게실에 데려가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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