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삽시간에 파티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마치 누군가 모두의 입을 틀어막는 마법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숨소리조차 없는 정적이 감돈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고 악단은 들고 있던 악기마저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렇게 장내를 지배한 라히크는 제 앞에서 완전히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숙인 릭센 경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퍽 근사하다고 여길 만한 미소를.
“압도적인 힘으로 짓눌러 뼛속까지 공포를 체득시키면 그 누구도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하지.”
“라히크.”
“그런 뒤, 개뼈다귀나 던져 주면 서로 그걸 차지하려 아귀다툼을 벌이다 결국 더 잘난 노예가 되려 애쓰게 되는 법이다.”
노예가 누구를 뜻하는 말인지 눈치채지 못한 머저리는 아무도 없다.
고통에 신음하며 팔을 부여잡고 있던 릭센 경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라히크는 그런 노장군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레그리아를 똑바로 직시했다.
“정복이란 그러한 것이다.”
“끄으으으…….”
“그러잖은가? 릭센.”
“저, 전하. 사, 살려 주시옵… 끄아악!”
콰득.
릭센 경이 애처롭게 빌었으나 라히크는 표정 없는 얼굴로 퉁퉁한 손가락을 짓밟을 따름이었다.
일부러 아플 만한 곳만 골라 관절을 밟아 누르니 끝내 뚜둑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층고 높은 파티장 안을 온통 울려댔다.
“실망스러워. 아주 실망스럽다. 이따위로 약해 빠졌으니 병사들이 제 사령관을 믿지 못해 적을 앞두고 도망이나 치는 것 아닌가.”
“컥, 죄, 송….”
“등이 찢긴 병사의 수가 일곱이나 된다는 건 군기가 완전히 해이해져 있다는 증좌다. 헌데 그걸 자랑처럼 떠들어? 벨리그레엄의 이름에 대체 어디까지 먹칠을 해야 만족할 텐가.”
탄식하던 라히크가 피투성이가 된 손에서 발을 치웠다. 그런 뒤 그는 신황청 소속의 위병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이자의 무능은 차후 군사 재판에 회부하겠다. 투옥해라.”
“아, 알겠습니다!”
“세비레이크 경. 팔라디누스에서 한 명을 차출해 죄인이 맡고 있던 곳으로 보내라. 성벽에 걸어 두었다는 병사들을 내리고 적절한 치료를 받게 하도록. 임시 사령관 임명 서류는 나가는 길에 조슈아에게 받으면 된다.”
“…명, 받들겠습니다.”
언제 왔었던 걸까.
라히크의 명령에 긴 은발을 늘어트린 채 흰 제복을 갖춰 입은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 이상 더 큰 데다 실로 신비롭게 생겨 눈에 띌 수밖엔 없는 사내다.
그때는 어딘가 파고들 구석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럴 틈 따위 전혀 보이지 않아, 레그리아는 그제야 세비레이크 경이 기사 단장임을 실감하였다.
‘아, 눈이 마주쳤다.’
잠시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보랏빛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허나 그는 끝내 명을 수행하기 위해 돌아설 수밖에는 없었다.
조슈아가 누구인가 하였더니 아마도 라히크의 보좌관인 모양이었다. 이따금 본 적 있는 얼굴인 걸 보니.
“죄인 아닌 자들끼리 파티를 이어나가지.”
하인 하나가 달려와 무릎을 꿇은 채 라히크의 구두에 튄 피를 닦아냈다. 악단은 다시 연주를 시작하고 사람들은 마치 방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소름이 끼친다.
마치 릭센 경이 축출당한 일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라히크가 그 가여운 병사들을 성벽에서 내려 주는 거니까, 좋은 일이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과정이 너무 폭력적이다.
릭센 경이 힘없는 병사에게 한 짓이나, 라히크가 릭센 경에게 한 짓이나 크게 차이가 있나?
악인을 악으로 처벌한 거라면 그래, 속 시원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게 남편 될 사람만 아니라면. 평생 살을 부대끼고 살아야 할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녀 역시 태연히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딸기 샴페인을 들겠나.”
“…당신. 세비레이크 경을 임무라는 말로 파티장에서 쫓아내려고 일부러 여기서 그런 거지?”
“글쎄.”
라히크가 오만히 고개를 까딱이며 샴페인 잔을 들어 건네주었다. 레그리아는 그걸 받아 쥔 채 확신했다.
이건 세비레이크 경에 대한 경고다.
그러잖아도 라히크가 없을 때 세비레이크 경이 막무가내로 신황청에 찾아왔던 것에 대한 걸 그냥 넘어간 게 수상쩍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찍어 누를 작정이었구나.’
이곳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녀 앞에서 확실하게 누가 우위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라 볼 수 있다.
거기까지 판단을 내린 레그리아는 라히크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얼굴엔 빙그레 미소를 띤 채로.
누구도 말다툼을 해서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게.
하나 그녀가 외면을 하도록 라히크가 내버려 둘 리 없다.
레그리아와 마찬가지로 입가에 미소를 걸친 라히크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입술을 눌러 붙였다.
뜨거운 숨결이 귓속마저 어루만지는 듯해 그녀는 라히크에게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왜 또 성질을 부리는 거지?”
“당신이 나를 이용했잖아.”
“내가?”
“시치미 떼지 마.”
레그리아는 조용히 대꾸할 뿐이었다.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라히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아마 이전부터 눈에 거슬렸을 무능한 장군 하나를 치우고, 신성 기사단 팔라디누스가 그의 아래에 있음을 공고히 하고.
그러니 다들 멋대로 떠들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그녀를 깔보는 릭센 경이 실수를 할 때까지.
“그렇게 잘난 체하며 나서서 나 대신 폭력을 써서 이겨 주면, 저자가 다음엔 나를 존중할까?”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이 꺾여 들개 밥으로 내던져지고 싶지 않으면.”
“굴복은 하겠지. 당신에게. 내가 아니라.”
그리고 그녀에 대한 반발심과 증오는 더욱 커질 것이다.
상상만 해도 피곤한 일이었다.
“저기 슈만 부코바츠가 있군. 가서 인사를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싫으면 지금 바로 황족 전용 휴게실에 데려다주지.”
“내가 원하는 걸 걸면서 치사한 협박 하지 마.”
“그대는 괜한 기 싸움 하지 말고.”
매번 너라고 부르더니 공식적인 파티랍시고 호칭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이런 곳에서까지 하대하는 것보다야 저 편이 낫다지만 그녀로서는 곱게 볼 수가 없었다.
약점을 잡고 흔들기는.
‘세비레이크 경과 이곳에서 접촉해 볼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선생.”
“작은 태양을 뵈옵니다.”
슈만 부코바츠는 잔머리 한 올 없이 머리칼을 빳빳하게 빗어 위로 틀어 올린 노인이었다. 매부리코와 날카롭고 영민한 잿빛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예술가라기보다는 전사에 가까운 분위기.
레그리아는 슈만이 첫눈에 마음에 들었기에 일단 세비레이크 경에 대한 것은 뒤로 밀어 두기로 했다.
“예비 황태자비 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네, 부코바츠 후작 부인.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어머나, 그저 슈만이라 불러주세요. 저 망둥이 같은 제자님이 제 욕이라도 하시던가요?”
“이 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하던걸.”
“과찬이십니다. 꼭 제가 없는 자리에서만 칭찬을 하는 버릇은 여전하시군요, 전하.”
꽤 친한가 보구나.
방금 라히크가 내보인 폭력성 앞에서도 움츠러들거나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아마 이와 비슷한 장면을 많이 보아 무뎌진 게 틀림없었다.
정말, 라히크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가 이렇게 또 추가되었다.
“피아노를 배우신 적 있나요?”
“좋아하는 편이지.”
“그거 멋진 일이군요! 예비 황태자비 전하께서 예술을 아시니 이 나라의 홍복입니다.”
슈만이 주름진 입술을 오므리며 홍홍 웃었다. 레그리아 역시 애써 미소하고 있는데, 라히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대, 첼로도 켤 줄 알지 않은가.”
“조금이지만….”
“모두를 위해 첼로를 한 곡 연주해 주는 건 어떤가?”
라히크가 악단 사이에 놓인 첼로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덩그러니 놓인 채 누구도 손대지 않던 악기다.
그녀가 제일 처음 만지도록 준비된 것.
본래 파티라는 게 짜고 치는 각본대로 흘러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었다.
“그대가 연주를 하면 분위기가 환기될 듯도 한데.”
제가 친 사고에 대한 수습을 아무렇지 않게 떠넘기며 라히크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쩔 수 없이 첼로 앞에 앉게 된 그녀를 향해 군중이 호기심 찬 시선을 보낸다.
‘괜찮아.’
이렇게 첼로 연주를 하게 될 줄은 미리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나름대로 곡도 정해 두었으니까.
너무 몰입해서 혼자 미친 듯이 연주하지만 않으면 되리라.
그런데 그녀가 첼로의 소리를 들어 보고 있던 그때, 슈만이 나섰다.
“첫 곡은 죽음과 소녀. 그게 좋겠군요.”
슈베르트의 걸작 중 하나인 죽음과 소녀.
하지만 그건 현악 4중주이기에 첼로 하나만으로 연주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특히 첼로는 쉽게 편성되어 있기에 곡에 담긴 깊이를 전부 다 담아낼 수 없다.
게다가 실내악이긴 하지만 첼로만으로 연주를 한다면 음이 지나치게 낮아 파티라는 장소와도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슈만은 자신의 제안을 철회하지 않았다.
아마 ‘쉬운 곡’을 연주하도록 미리 라히크와 이야기라도 되어 있던 모양이다.
“……좋네.”
굳이 그렇게 원한다면야 못할 것은 없었다. 첼로 파트에 변주를 좀 주면 되니까.
활을 쥔 레그리아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연주를 시작한 그녀는 어느덧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 자체에 빠져들었다.
항상 이게 문제였다.
연주를 시작하면 주변의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버리는 것.
‘아, 예전보다 첼로를 연주하는 게 편해졌어.’
몸이 바뀌면서 키가 커져서이리라.
선율이 그녀의 발목부터 타고 올라 목까지 부드러이 감싸 안는 기분이다. 짜증도 분노도 모두 바스러지고 남은 건 오직 그녀와 음악뿐.
막히는 길 하나 없이 눈앞이 환히 트이고 어느덧 몸이 부유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둥둥 뜬 채로 그녀는 음표 속을 헤쳐 날았다.
레그리아는 즉석에서 편곡까지 하며 점점 더 연주에 빠져들고, 빠져들고, 빠져들었다.
누군가 떠드는 것도 들리지 않는다. 저를 향한 시선들도 인식이 되지 않았다.
무엇도 지금 첼로와 그녀의 연결을 끊어 놓을 수 없다.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15분 남짓의 1악장 연주가 끝났을 때.
사위는 다시 한번 침묵에 휩싸였다.
어느새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뜬 레그리아는 저를 향한 얼빠진 시선들에 화들짝 놀랐다.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다들 왜 저러는 거지?
그렇게 연주가 별로였나?
‘내가 또 내 세계에만 갇혀서… 나만 즐거운 연주를 했나 보구나.’
동생은 이따금 그녀가 연주하는 걸 들을 때마다 그렇게 지적했다.
언니는 너무 마니악하다고. 그래서 자길 따라올 수가 없는 거라고.
분명 이번에도…….
“고혹적인 연주로군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슈만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으로 레그리아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하나둘씩 정신을 차린 듯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갈채에 이번에 얼떨떨해진 건 레그리아 쪽이었다.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은 칭찬에 후한 모양이다.
그렇게 결론 내린 그녀는 조심스레 일어서서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에오스가 익히도록 한 허리를 굽히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고 감사를 표하는 황족 특유의 방법이었다.
“첼로를 켤 줄 아는 정도가 아니군요. 스승께 오래 가르침을 받으시었나요?”
“음, 아니. 혼자 배웠네.”
“혼자…? 설마 방금 그 연주를, 아니지. 첼로를 독학으로 공부하셨다는 뜻인지요?”
그녀에게 다가온 슈만이 눈가를 살짝 좁혔다. 믿을 수 없다는 투이긴 했지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기에 레그리아는 그저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어떻게 처음 연주를 하게 되셨나요? 이 슈만, 이제 진심으로 궁금해졌습니다.”
“별건 아니었네. 단지… 첼로가 아깝게도 버려져 있어서 손을 대 본 것뿐이야.”
“그냥 있어서, 손을 대셨다고요. 그런데 연주를 하실 수 있으셨단 말씀인가요?”
“처음에야 당연히 서툴렀어. 연주다운 연주를 할 수 있게 된 건 반년이나 지나서인데….”
“고작, 지금 고작 반년 만에 무려 연주를! 그것도 독학으로…! 아무 스승 없이! 해내셨단 말씀인지요?”
그러니까 그게 맞긴 한데.
레그리아는 슈만이 내뿜는 어마어마한 기세에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세상에! 제 학생들이 다 예비 황태자비 전하 같기만 했어도 이 슈만은 천재를 길러낸 천재로 소문이 자자하였을 겁니다!”
……이게 그렇게 흥분할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