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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134)
  • 29화

    아마 적을 앞두고 등을 보인 게 죄라는 뜻일 것이다. 등의 상처는 도망쳤다는 증거이니.

    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그토록 잔혹하게 대우할 필요가 있나?

    “아이고, 이것 참! 제가 주책없었습니다. 신성인께서는 이런 대화가 불편하실 텐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화살이 그녀에게 날아왔다.

    레그리아는 저를 보는 릭센 경의 눈빛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저건 조소다.

    긴 세월 받아 왔던 눈빛인데 모를 리가 있을까.

    ‘하지만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어.’

    사실 갑작스레 사람들 앞에 서게 된 그녀로서는 혼란스러웠다.

    좋은 황태자비가 되려는 척을 해야 하나?

    선뜻 나서서 제 의견을 내세우며 받아쳐도 되는 걸까.

    그도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물고 웃기나 하면 되는 걸까?

    라히크는 그녀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따로 말해 준 적 없었다. 반대로 파티장 내에서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다.

    “평안하셨습니까, 전하.”

    “전하. 그리고… 여기서 뵙는 군요, 릭센 경.”

    “안녕하십니까, 황태자비 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히크의 주변으로 몇몇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다. 그녀에게도 간단히 인사를 건넨 이들은 이내 국경의 야만족에 대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놈들이 짐승을 조종하는 게 가장 문제입니다.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지 짐승 떼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더군요.”

    “그 짐승들이 둥지 튼 곳을 찾아내 새끼부터 모조리 태워 죽이는 것만이 답입니다! 제가 예전부터 화공을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이들이 야만족이라 칭하는 건 틀림없이 초원 연합국이었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수업을 받을 때 간단하게 설명을 듣고 지나갔었다.

    그러나 수업은 수업.

    저런 잔인한 말을 아무렇게나 뱉을 정도로 초원 연합국에 대한 증오가 강할 줄이야.

    ‘그 말은, 초원 연합국 쪽에서도 벨리그레엄에 대한 증오가 강하다는 거야.’

    혐오는 쌍방이다.

    결코 일방적일 수 없지.

    저게 중요한 이야기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레그리아는 저도 모르게 귀를 활짝 열고 있었다.

    그녀를 병풍 취급하든 어쩌든 딱히 상관없다.

    이 세계에서 생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정보가 있다면 모두 기억해 둬야만 했다.

    “예비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릭센 경은 아니고 그 옆에 서 있던 이름 모를 남자가 그녀를 떠보듯 말을 건네 왔다.

    레그리아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나직이 대꾸했다.

    “나는 전쟁에 대해서 잘 아는 바는 없네.”

    “하하핫, 역시 그렇군요.”

    “다만.”

    그냥 조용히 지나가면 될걸. 있는 듯 없는 듯 공기처럼 가만히 있는 게 뭐가 어려워서.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러한 방식은 더 큰 증오와 분노를 불러일으켜 반드시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건 알아.”

    “……예?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그녀가 제 의견을 내세울 줄은 몰랐다는 듯 남자들이 다 같이 놀란 눈치를 내보였다. 그러더니 라히크를 흘끔거리는 게 아닌가.

    말을 하는 건 그녀인데 그럴 수 있도록 허락한 게 라히크가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경은 갓 태어난 아기까지 모두 학살할 셈인가?”

    그리고 그건, 확실히 그녀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저항의 불꽃은 단 한 사람만 살아남아도 타오를 게 분명해.”

    “이것 참… 특이한 사상을 지닌 분이시군요.”

    몇몇 남자들이 콧수염을 매만지며 젠체했다.

    “허허, 반대로 진취적인 레이디라 할 수도 있지요.”

    “물론 군사학이 ‘레이디’가 갖춰야 할 소양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건 ‘기사’의 소양이지요.”

    “그래도 예비 황태자비께서 벌써 국외의 일에 관심을 두고 계시니 좋은 일입니다. 국내의 일에도 그만큼 큰 관심을 두어 주실 테니 말입니다. 하하핫!”

    이 나라는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여자라고 다 무시하는 건 아니되 기사가 아닌 여자는 무시했다.

    자신의 신분과 직분에 따라 발언의 넓이나 무게가 완전히 갈리는 느낌.

    그녀를 당혹스럽게 하는 건 ‘황태자비’라는 자리에 있는 여성조차 국내외의 정치나 전쟁에 대해 알 필요 없다고 단언하는 태도들이었다.

    ‘어째서?’

    그렇다면 황태자비는 왜 존재하는 거지?

    오직 나라의 살림을 살아내기 위해?

    그건 또 그 일을 도맡은 부서가 따로 존재할 것 아닌가?

    이해가 가지 않아 라히크를 돌아보았지만, 그녀가 입을 연 뒤부터 그는 그저 느긋이 상황을 관전 중이었다. 금빛 눈동자에 어린 흥미가 지금 그가 꽤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딱히 도와달라거나 끼어들어 달라고 쳐다본 것은 아니고 ‘지금 저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의미를 담은 시선이었기에 레그리아는 곧 다시 귀족들을 향했다.

    어느새 그녀의 주변엔 사람이 늘어났다.

    다들 이 주제에 대해 확실히 흥미를 가지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대신해, 이번엔 릭센 경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예비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벨리그레엄 신민을 해치는 그 야만족들을 어찌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다분히 악의적인 물음이다.

    여기서 인권을 내세우면 그녀가 아직 벨리그레엄 사람이 아니라 그런다고 할 테고, 그렇다고 해쳐야 한다고 대답하는 건 방금 자신이 내세운 의견을 스스로 정면에서 반박하는 꼴이 되었다.

    어차피 이들은 야만족이라 부르는 초원 연합국을 어떻게든 쓸어버리고 싶어 안달이다.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하던 전혀 듣지 않고 전쟁을 치를 거라는 점이 가장 나쁜 부분이었다.

    듣지 않을 의견을 묻는다는 건 조롱에 가까웠고.

    “그들의 수장이 원하는 게 있을 테지. 서로 간에 원하는 것을 내세우며 입장 차이를 좁히고 조율하는 게 외교가 아니던가? 이 나라엔 군부만 존재하고 외교관은 존재하지 않는 건지 궁금한데.”

    “물론 외교관은 있습니다. 아, 그런데 그 야만족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요!”

    어떤 남자 귀족의 익살스러운 대꾸에 주변에서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그걸 주의 깊게 지켜보던 레그리아는 확신을 했다.

    이들은 단 한 번도 초원 연합국과 같은 위치에서 회의를 가진 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도 저를 대하듯 이런 유들거리는 태도를 유지했을 테지.

    레그리아는 소란스럽게 떠드는 자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과연 초원 연합국에서 벨리그레엄 신민을 죽인 숫자가 많을지, 벨리그레엄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제 나라 신민을 죽음에 몰아넣은 숫자가 많을지.”

    “…….”

    “어느 쪽의 목숨값이 더 무거울지는 신만이 아실 테지.”

    어째서 라히크가 웃으라고 했는지 명확하게 이해가 간다.

    웃음은 무기가 되고 방패가 되었다.

    이런 자리에서 기분이 상했음을 드러내는 건 철부지나 하는 짓.

    비트리체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칠 순 없으니 대신 레그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웃으며 비꼬는 것이다.

    “……예비 황태자비 전하. 하셔도 되는 말씀이 있고 아닌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릭센 경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장군의 주변으로 서늘한 기류가 흐른다.

    레그리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릭센 경이 그녀에 대한 태도를 적대적으로 바꾸었음을.

    뚱뚱한 몸에서 새어 나오는 한기가 손끝을 시리게 만들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저희 벨리그레엄 군부는 신민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군부를 모욕할 수 없으며 기사가 아닌 자는 본디 이런 대화에 끼어들어서도 안 됩니다.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렇군. 그렇다면 경은 처음부터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대화로 포문을 열었다는 건데. 나는 대화가 이어지는 긴 시간 내내 술이나 홀짝이며 웃기나 하면 되었다는 거군.”

    한마디 한마디를 꺼내놓을수록 레그리아는 냉담해졌다.

    ‘비트리체에겐 감히 저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면서.’

    넌덜머리가 난다.

    아까부터 열이 받은 비트리체가 그녀의 안에서 쿵쿵 발을 구르고 있기에 실제로 정말 속이 메슥거리기도 했다.

    뛰쳐나와서 저 느물거리는 자들의 멱살을 잡고 머리 박치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걸 막는 게 너무나 곤욕이었다.

    “여기까지.”

    줄곧 지켜보고만 있던 라히크가 그제야 나섰다.

    할 말을 다 했으니 답답하진 않았기에 레그리아는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파티 분위기를 나서서 망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릭센 경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빈정거리는 건 좋지 못한 버릇입니다. 저는 감히 제 아이들이 기사에게 빈정거리도록 두지 않지요. 저 야만족들에게 목이 뜯기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게 누군데 말입니다!”

    “…….”

    “예비 황태자비 전하께서 아직 뭘 잘 모르셔서 그런 것으로 알고 이번은 너그러이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아아아악!”

    “!”

    줄줄 이어지는 개소리가 점점 선을 넘자 주변에 서 있던 자들이 슬슬 불편한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하나둘씩 자리를 뜨려고 뒷걸음질을 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비명이 장내를 가로지른 것은.

    우드득!

    “끄, 으아아아악!”

    레그리아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본 건지 의심했다.

    처음엔 손가락. 그 다음은, 팔이었다.

    산 채로 팔이 뜯겨나가듯 뼈가 비틀리는 흉포한 소리. 덜렁거리는 신체 기관. 그 뒤에 따라붙은 건 끔찍한 비명이다.

    고막이 얼얼해질 정도로 고통으로 가득 찬 발악에 악단마저 연주를 우뚝 멈추었다.

    ‘팔이….’

    방금까지 기세 좋게 한기를 뿜어내던 릭센 경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그에게서 느릿느릿 시선을 옮긴 레그리아는 퉁퉁한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여 축 늘어진 것을 발견했다.

    거미의 다리 하나를 뒤틀어 놓은 것처럼, 그렇게 무심하여 잔혹한 얼굴로…… 릭센 경을 단번에 무참히 밟아 놓은 절대자가 느른히 발을 움직였다.

    “야만족을 굴복시키는 일이든 오래 묵어 썩어 버린 쓰레기에게 버릇을 가르치는 일이든.”

    “흐으으, 커흑.”

    “저항은 이리 꺾는 것이다.”

    …그 절대적 지배자의 이름은 라히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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