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34)

28화

신성 기사의 이름은 계보도에 푸른 잉크로 쓰여 있다.

비트리체가 알려준 것에 의하면 신성 기사의 모친은 당연히 신성인.

그 두 가지 사실에 입각하여 계보도를 보던 레그리아는 어떤 기호를 발견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신성 기사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이미 어른이 된 신성 기사의 어머니 쪽 이름엔 어김없이 잿빛 잉크로 어떤 기호가 그려져 있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이건 뭐지?’

기호의 모양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레그리아는 책을 덮으며 여상히 입을 열었다.

“신성인은 무조건 여자라고 했지?”

“네, 레그리아 님.”

“에오스. 오늘 파티에 오는 손님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신성인이 누구인지 알려 줘. 할머니일수록 좋아.”

그러나 에오스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 그녀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할머니 신성인이 어디 있어요!”

“…없니?”

“네! 시, 신성인은 항상 젊은걸요? 할머니 신성인이라니, 들어 본 적 없어요.”

셀린이 무해한 얼굴로 에헤헤 웃었다. 대답을 해서 아주 뿌듯하다는 기색으로.

그에 에오스가 무마하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소서. 신황청 내에서 태어나 바깥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아이입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에오스. 너도 ‘노인이 된 신성인’이 있다고는 대답하지는 않잖니.

일순 오싹해졌지만 레그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이 부분을 너무 캐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서다.

아니, 정확히는 캐야 하지만 에오스에게는 더 물어선 안 된다.

관심을 두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는 체해야지.

“어찌 되었든 다른 신성인을 만나 보고 싶어.”

“이번 파티에는 신성인은 올 수 없습니다. 레그리아 님만이 빛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목이 나뉘는 건 좋지 못하다는 뜻이구나.

혹은 그녀가 다른 신성인을 만나선 안 되는 이유가 있거나.

“그렇구나. 아쉽네. 궁금한 건 또 있어. 레스노 후작 같은 경우엔 본부인 외에 첩이 너무 많은데… 전부 신성인인 건가?”

방금 오간 대화를 마음속에 담아 둔 레그리아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한 것이다.

에오스는 어딘가 안도하는 기색으로 공손히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습니다. 레스노 후작은 모두 여덟 명의 첩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역시 다 같은 기호가 표시되어 있다.

잠시 고민하던 레그리아는 에오스의 차분하면서도 담담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이상스레 가슴이 옥죈다.

비트리체를 처음 만났던 날, 벼랑에서 떨어져 내리며 들었던 말이 갑작스레 의식 표면을 뚫고 올라와 귓가에 윙윙거렸다.

“그러고도 네가 모든 걸 다 알고 싶어진다면, 그때 알려 줄게.”

“무엇을?”

“이 세계의 추악한 진실을.”

그 추악하다는 진실이 대체 뭘까…….

확실한 것은 에오스는 결코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 * *

신황청 내에 속한 세인트 글로리 홀.

얼굴을 비춰볼 수 있을 정도로 반질반질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 위에 입구부터 단상까지를 잇는 긴 카펫이 깔렸다.

피처럼 진한 빨강은 황권과 신권이 일치함을 상징하는 신비로우면서도 신성한 색. 오직 황족만이 카펫으로 쓸 수 있으며 황족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파티를 주최한 황족이 입장하기 전까진 누구도 그 선을 밟고 반대편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 암묵적인 예의이자 규칙.

보통의 경우라면 여기저기서 소곤거리는 소리라도 들릴 법한데 오늘은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도 그 미친개가 황태자비가 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절반의 이유요, 또 절반은 중립파의 거대한 주축인 로에르멜 공작가의 향방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현 로에르멜 공작은 거인이라 평가받는다.

대부분 남성의 역할이라 여겨지던 가주의 자리를 거머쥐자마자 세비레이크 후작가를 후원하더니 그들과 손을 잡아 공격적으로 사업을 벌였다.

냉철한 판단과 특유의 감각으로 손대는 것마다 모조리 성공시킨 공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타국과의 무역으로 손을 뻗었다.

결과는 대성공.

여자가 무슨 공작 위를 받느냐고, 아무리 유언장에 아내에게 작위를 넘긴다고 되어 있더라도 전통에 따라 죽은 공작의 남자 형제가 계승하여야 옳다고 주장하던 입들을 닥치게 만든 큰 사건이었다.

로에르멜 공작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열 개 남짓한 살롱을 열어 젊은 귀족들을 모았다.

그리고 딸에게 살롱 관리를 맡겼는데, 암암리에 새어 나오는 소식으로는 그 안에서 불법 도박이 성행한다고 했다.

물론 증거는 전혀 없지만, 증거가 있다고 한들 그걸로 뭘 할 수 있을까.

이젠 그 딸이 신성인이 되어 황태자비 자리까지 오른다는데 말이다.

지금의 로에르멜은 양지와 음지를 넘나들며 세력을 불린 괴물이다. 그리고 이제는 권력마저 쥐려고 한다.

모두가 바짝 긴장하며 예비 황태자비를 기다릴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벨리그레엄의 미래! 신민의 근원, 이 나라를 널리 비추는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그때였다.

문을 지키고 선 시종의 외침에 눈만 굴리고 있던 귀족들이 앞다투어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가 작은 이들은 어떻게든 눈에 담기 위해 목을 쭉 빼기도 했다.

“그리고… 벨리그레엄의 작은 별, 새롭게 떠오른 밤하늘의 빛. 여름 울타리의 꽃이신 레그리아 로에르멜 님 드십니다!”

사르륵.

문이 열어젖혀짐과 동시에 얇고 긴 천이 바닥을 쓸어내는 소리가 적막 위로 울려 퍼졌다.

예비 황태자비가 입은 것은 번잡스러운 장식이나 러플 따위가 일절 달려 있지 않은 깔끔한 드레스였다. 새하얀 빛깔의 천은 몸의 곡선을 따라 유려히 흘러내렸고 무릎께에서 살짝 펼쳐졌다.

쇄골과 목선은 강조하되 결코 가슴골이 드러나지는 않도록 디자인된 드레스는 붉은 머리칼과 어우러져 그녀를 너무도 고결히 보이게 했다.

금장식이 달린 망토는 어깨에서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졌는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장신구였다.

벨리그레엄 대제라 불리는 300년 전의 황제가 자신의 사랑하는 반려를 위해 제작했다는 붉은 다이아몬드 팔찌가 가녀린 팔목에서 반짝거렸다.

“전혀 포악해 보이지 않는걸요?”

“눈빛이 상당히 현숙하시네요.”

레그리아의 자태를 확인하고 놀란 귀부인들의 속삭임이 부채 뒤를 재빠르게 오갔다.

“뭐, 저러면 딸이 바뀐 게 차라리 낫지요. 도움 하나 되지 않는 쓸모없는 것보다야.”

“맞아요.”

속삭임들은 일견 비정한 듯했지만 그게 귀족이라는 집단이다.

개인보다는 가문이 우선시되고 그 가문의 힘으로 개인이 권력을 누리니 집단을 공고히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는 없는 게 차라리 낫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황태자의 팔짱을 끼고 나타난 레그리아 로에르멜은 합격이었다.

‘그’ 미친개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정숙한 자태.

내딛는 걸음은 차분했고 경망스럽지 않았으며 살짝 짓는 미소는 우아했다.

비트리체 로에르멜은 고상하지 못하게 이를 다 드러내며 깔깔거려 외모적인 장점을 다 깎아 먹었으나 레그리아 로에르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나라의 사교계에서 숭앙하는 완벽한 ‘레이디’의 모습.

라히크는 우호적인 파티장 내의 분위기를 확인하고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파티를 시작하지.”

가벼운 한마디와 함께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 * *

파티가 시작되었지만 내내 풀리지 않은 의문거리에 골몰하고 있었던 탓에 레그리아는 자신을 두고 떠드는 입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그다지 관심이 없기도 하고.

본래 제 몸도 아닌 것이다. 외모 칭찬을 듣는 들 기쁠 리가 있나. 남의 얼굴을 보고 예쁘다 하는 것이니 감흥이 없었다.

“어쩜,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맞아요. 그 미, 아니, 그분과 같은 얼굴이신데 어쩜 저리 다르실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기분이 딱히 좋진 않다.

다들 계속해서 비트리체와 그녀를 비교하고 비트리체를 깎아내렸다. 그러면 그녀의 위치가 더 높이 올라가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지만 강탈자는 그녀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성인의 ‘강림’이라는 건 칭찬받아야 할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었고 비트리체는 자의로 몸을 준 것이니 죄책감을 갖는 건 아니지만 따지자면 빼앗은 건 맞으니까.

모두 희생을 치른 비트리체를 존중해야 마땅한데 이 분위기는 대체 뭔지.

“전하.”

“릭센 경.”

라히크의 곁에 서서 샴페인 잔을 들고 있던 레그리아는 제일 먼저 다가오는 자가 누구인지 살폈다.

기꺼이 반갑게 맞이해 주는 라히크의 태도와 ‘릭센’이라는 성으로 미루어 보아 황태자파의 일원 중 하나였다.

“이 늙은이가 예비 황태자비를 뵈옵니다.”

허연 수염을 쓸어내며 그녀를 바라보던 릭센 경이 뚱뚱한 몸을 우스꽝스럽게 굽히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레그리아는 배운 대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고개만 까딱였다.

“반갑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아무렴, 이 릭센만 믿으십시오.”

벌써 술을 마셨는지 코와 광대가 붉어서 그다지 믿음은 가지 않지만 배운 걸 떠올려보자면 릭센 후작은 국경 수비를 맡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기는 했다.

당연히 신성 기사이기도 하다.

지금은 전선에서는 물러나 지휘관의 역할에만 머무르고 있으나 젊은 시절에는 도끼를 든 학살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무용이 대단했다지.

릭센 경에 대한 정보를 되새기던 레그리아는 제 눈앞의 노인과 겹쳐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요즘 미쳐 날뛰는 야만족 탓에 좋은 소식이라고는 없었는데 이리 전하께서 강건하시고 또 경사를 들으니 이 늙은이의 마음이 좋습니다.”

“국경에서 다른 문제가 있나?”

“큰 문제는 아니옵니다. 단지 그 무식한 야만족 놈들이 전법을 바꾸었는지 밤에 짐승을 타고 국경을 넘나들며 병사들을 농락합니다. 오늘 오전에 들어온 보고까지 합하면 벌써 일곱이나 그 짐승들에게 등을 찢겼다더군요.”

“등을?”

라히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더 낮아졌다.

어떻게 들으면 그윽하다지만 레그리아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라히크의 기분이 수직 낙하하였음을.

“그런 겁쟁이 놈들은 당연히 매질을 하여 본보기로 성벽에 걸어 두었습니다. 하하핫!”

“…그렇군. 그 외에는.”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줄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릭센 경이 히죽 웃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레그리아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닫았다.

‘사람을 매달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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