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34)
  • 27화

    2. 형제(Bruder)

    아침부터 신황청 곳곳에 흥분 섞인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청소하던 견습 신관들도, 곳곳에 장식을 달던 부제들도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사제들이야 근엄한 체 뒷짐이나 지고 있으나 그들도 입꼬리가 실룩이기는 마찬가지다.

    오늘은 실로 오랜만에 신황청이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받는 날.

    본래는 한 해에 단 한 번. 성 요하네스의 달에만 신도의 방문을 허용하는데 이번 경우는 조금 특별했다.

    고위 귀족들만을 위한 비밀 파티.

    초대된 손님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으나 유독 신경 써서 먼지 하나 없이 걸레질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귀족 중에서도 진짜 귀족에 속하는 계급이 온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내놓을 후원금은 눈 돌아갈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이리라.

    그걸 상상하며 히죽거리던 사제들은 괜히 견습 신관에게 타박을 주며 좀 더 꼼꼼하게 청소를 하라고 지시했다.

    견습 신관들은 이 행사가 끝나고 나면 자신들에게도 돌아올 맛있는 음식과 디저트를 상상하며 손을 재게 놀렸고.

    지금만큼은 견습 신관 중 그 누구도 쉬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지금은 앙상한 잔가지의 달이고, 다음 달은 얼어붙은 호수의 달. 그다음은 성 요하네스의 달.”

    “네, 마, 맞아요!”

    “그리고 꽃잔디의 달부터 봄이 시작된다는 거지.”

    본래라면 셀린 역시 머릿수건을 두르고 앞치마를 동여맨 채 열심히 무릎 굽혀 타일 사이에 낀 때를 빼내고 있어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셀린은 지금 고운 새 옷을 차려입고 레그리아의 곁에 있었다. 레그리아의 붉은 머리칼을 말총 빗으로 조심조심 빗겨 주면서.

    라히크는 약속을 지켰고 입맞춤의 대가로 셀린은 본래의 배속에서 완전히 빠져 그녀의 옆에 오게 되었다.

    에오스는 그게 전례 없던 일이라 하였는데 그 ‘전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라히크가 가진 권력인 모양이다.

    레그리아는 ‘3월-꽃잔디의 달’이라고 써둔 종이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느리게 내렸다.

    마지막에 적힌 건 12월이 아니다. 6월이었다.

    벨리그레엄 식 표현으로는 ‘태양이 왕좌에 오르는 달’.

    바로 이때, 레그리아는 정식으로 황태자비가 될 터였다.

    ‘그러니 반드시 6월이 오기 전에 신황청을 빠져나가 몸을 감출 길을 찾아야 해.’

    그녀에게 가을은 없다.

    지면이 달아오르는 계절. 여름이 끝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걸 넘어서면 끝내 라히크의 아내가 되고 말겠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고 아마도 아이를 낳고, 투덕거리며 싸우다 보면 세월은 금세 흐를 터다. 그다음엔 중년이 된 라히크가 어린 여자와 연애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테지.

    화가 나지도 않을 것이고 가슴이 아프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한 여자만 바라보는 황제 같은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심지어 그녀와 그처럼 사랑으로 시작한 것도 아닌 관계에선 더 할 말도 없으리라.

    그러니 레그리아가 진짜 견디기 힘든 건 따로 있었다.

    그가 황제로서의 특권을 실컷 누리며 젊음도 늙음도 즐기는 동안 그녀는 그냥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숨이나 쉬게 되리라.

    한평생 그녀가 갖고 싶어 했던 건 무엇도 쥐지 못한 채로.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결말이었다.

    “태, 태양이 왕좌에 오르는 달이라 해도 그렇게 더운 건 아니에요. 특히 여기 우, 우트가르드는 여전히 서늘해요. 워낙 나무가 빽빽하다 보니 바깥과 기후가 조금 다르다고 드, 들었어요!”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알아차린 셀린이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아서 입을 벌려 짹짹거려 주니 이보다 고마울 수가 없다.

    에오스는 셀린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라히크가 붙여 준 것이니 반발하거나 배척하진 않았다.

    다만 레그리아는 너무 셀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에오스에게 질문을 했다.

    “귀족 계보는 거의 다 외웠어. 로에르멜 공작가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주겠어?”

    이제 레그리아는 에오스에게 존대하지 않았다. 에오스가 그걸 극도로 불편해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에오스 역시 완전히 아랫사람의 자세를 취하며 그녀를 윗사람으로 대했고.

    그런 게 어색하긴 하지만 여기선 여기의 법을 따라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라히크가 그러기를 원하니까.

    “비트리체 로에르멜. 1녀 1남 중 장녀. 아버지께서 일찍이 돌아가신 이후 비트리체와 그 동생이 모두 어렸기에 어머니께서 공작 위를 이으셨다는 거지? 남동생의 이름은 디트리히 로에르멜.”

    “그렇습니다, 레그리아 님.”

    “비트리체 로에르멜은 약 다섯 살 무렵부터 벌써 미친개라고 불렸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별명은 점점 더 확고해졌고.”

    “네, 맞습니다.”

    배운 것을 확인하자 에오스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오스는 그녀에게 ‘파티에 나가 다른 귀족들을 만나기 전에 꼭 익혀야 할 사항 10가지’를 적은 종이를 주었는데, ‘비트리체 로에르멜 보고서 읽기’는 그 목록 중 하나였다.

    “꽃이 주제였던 무도회엔 죽은 꽃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나오기도 하고, 보통의 경우엔 슈트를 입고 남장을 한 채 영식들과 어울리며 궐련을 피우고 당구를 치는 기행을 일삼았다라. 제멋대로 굴고 술에 취해 욕설을 하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들면 그게 대머리일지라도 머리채를 잡고….”

    “그래서 적이 많습니다. 더욱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셔야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실 겁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지자 에오스가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사실 비트리체가 세운 놀라운 업적들은 더 말을 하면 할수록 입만 아팠다.

    명실상부 벨리그레엄의 미친개.

    하지만 레그리아는 비트리체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붙여 둔 그 별명이… 오히려 멋있다고 여겼다.

    너는 정말 남의 눈치를 조금도 보지 않는구나.

    레그리아는 비트리체가 통로인에 자원한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비트리체는 죽음까지도 제멋대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죽을 시기와 죽었을 때 입고 있는 옷과 죽음의 상황까지도.

    평생 단 한 번도 멋대로 살아보지 못한 레그리아로서는 비트리체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은밀히 동경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의 눈을 빼앗았다고 적혀 있었어.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됐는지는 알아?”

    비트리체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딱히 가족에 대해 할 말이 없기에 묻지도 않았고.

    하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게 생겼으니 어느 정도 두루뭉술하게라도 알아두어야겠지.

    ‘사이가 아주 안 좋나? 장난으로 그랬을 것 같진 않은데. 분명 사유가 있었을 테지.’

    허나 에오스는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로에르멜 공작이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그날 사건의 목격자를 전부 죽였다고 합니다.”

    “……죽여?”

    “공작은 무서운 자입니다. 레그리아 님도 멋대로 주무르려 들 게 분명하오니 대화를 나누시다 낌새가 이상하면 무조건 황태자 전하를 찾으세요. 황태자 전하께서 보호해 주실 겁니다.”

    “보호라…….”

    그 단어가 주는 무력한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레그리아는 눈가를 살짝 좁혔다. 하지만 에오스의 조언이 이론적으로는 옳다.

    그녀는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이제야 겨우 조금 배웠다지만 그건 책에서 배운 것이고 실제는 또 다를 테지.

    게다가 어느 세상이나 사람을 먹잇감으로 보는 승냥이 떼는 널려 있는 법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비척거릴 뿐이니 맹수의 영역에서 보호받는 수밖에 없다.

    영역의 제왕이 그녀의 목덜미에 이빨을 꽂아 넣기 전까지는 다른 영역의 맹수가 와 위협할 순 없을 테니까.

    하지만 떠난 곳에 또 다른 제왕이 있다 한들 이 산에서 보호받으며 살기가 더 싫다면?

    영역을 나간 순간 단숨에 목숨이 끊긴들 끝내 벗어나고자 한다면 어찌해야 할까.

    ‘오늘 파티장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는 잘 알겠어.’

    최대한 라히크에게서 멀어질 것.

    그래야 라히크의 적이 다가올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라히크가 무너지기만을 꿈에서마저 바라고 있는 세력이었다.

    ‘황태자비. 그렇게 좋은 자리면 원하는 다른 사람이나 하라 그래. 기꺼이 내 줄 테니까.’

    레그리아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자유를 갈망할 줄은 몰랐다.

    밖에서 하늘을 날다 사냥꾼에게 총을 맞아 죽더라도 새장 속의 안락한 삶은 싫었다.

    이미 한 번 그렇게 살았는데 두 번째 기회를 얻었음에도 왜 그래야 하나.

    하지만 자유란 비싼 값을 치러야 겨우 한 줌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석이었다.

    그걸 얻기 위해서는 지불해야 할 것이 많다.

    우선, 정보부터 구해야만 했다.

    ‘이번 연회에서 꼭 만나서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어쩌면 내가 탈출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팔락.

    손끝에서 낡은 책장이 넘어간다.

    엊그제 받은 귀족 계보도는 너무나 두꺼웠고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가문의 문장이며 색을 하나하나 외우는 데는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라히크나 에오스는 일명 ‘황태자파’와 ‘중립파’를 중점에 두고 외우도록 유도했지만 실제로 지금 레그리아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그 반대였다.

    모스그라토 대공을 위시한 파벌.

    황태자 라히크와 적대하는 자들.

    그녀가 라히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그들뿐이었다.

    파티가 시작되기 전, 낮 시간을 활용하여 각 가문의 계보도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피려던 레그리아는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고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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