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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134)
  • 26화

    “키스를… 진심이야?”

    깜짝 놀란 레그리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토끼 눈이 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라히크는 차오르는 웃음기를 억누르며 짐짓 진지한 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해, 해가 지지도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짓을….”

    “퍽 순진하기도 하지. 대낮부터 아래를 비비는 짐승이 숱하게 많거늘.”

    “그건 그 사람들이고. 나는….”

    절대 못 해.

    물기 많은 연녹색 눈동자에 어린 단호함이 그를 유쾌하게 만든다. 저리 고집을 피운들 어차피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등을 밀어주지 않으면 레그리아는 저 자리에서 석상이라도 된 양 절대 움직이지 않겠지.

    하여간에 손이 많이 간다. 일일이 떠먹여 주어야 하지.

    아양피우는 법부터 가르쳐야 한다니.

    라히크는 속으로 혀를 차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는 레그리아에게 다가가 가녀린 허리를 한 팔로 휘감아 안아 들었다.

    “어려울 것 없다. 입맞춤 한 번에 네가 원하는 아이를 하녀로 주는 거면 싸게 먹히는 것 아닌가.”

    “당신은 연애를 많이 해 봤을지 몰라도 나, 나는 아니야. 지나가던 사제들이 보면 어떡해? 소문이라도 나면….”

    “내기를 잊었나? 분명 섹스 외의 것은 허용이라 했던 것 같은데.”

    환히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불그스름한 머리칼을 달구어 꼭 자그마한 불꽃처럼 보이게 했다. 아직은 작은 모닥불에 불과하지만, 그는 오늘 가능성을 보았다.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찬란히 꽃피울 수도 있는 재능.

    오물이 묻어 빛이 감춰지고 만 원석.

    그가 보기에 첼로는 수준급이고 피아노는 감히 형언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재능이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어째서 자신만의 연주법 하나 찾지 못한 채 저리 방치되어 흙길이나 굴렀느냐는 것이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그녀의 곁에 있던 자들이 모조리 머저리거나 혹은, 일부러 망쳐 놓았다는 것.

    ‘내게 온 이상 이대로 둘 수야 없지.’

    닦고 씻기고 사포질하여 최고의 보석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라히크는 창틀에 앉힌 레그리아의 양옆을 짚어 아예 달아날 길 없이 가둬 버렸다.

    이런 행위가 익숙하지 않아 온몸을 바들거리며 눈을 꼭 감는 게 귀엽기 그지없다.

    그가 아는 키스야 혀를 섞어대며 서로를 쪽쪽 빨아먹을 듯이 덤벼드는 거지만 그런 걸 이 순진해 빠진 여자가 알 리가 없지.

    끽해 봐야 입술 좀 부딪치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거면서 그조차 용기를 내야 하는 게 꽤 식욕을 돋운다.

    라히크는 여전히 망설이는 레그리아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 느릿이 속삭였다.

    “생각해 보니 결혼하기 전에 배도 맞춰 봐야 알 텐데. 잘하는지, 아닌지.”

    “뭐, 뭘 맞춰? 기가 막혀!”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할 말이 없으면 기가 막힌다고 하더군. 입버릇인가?”

    먹잇감을 그물에 밀어 넣어두고 즐기는 유희는 제법 유쾌했다. 이 정도는 음담패설 축에도 끼지 못하는데 대체 얼마나 고상한 삶을 살아왔으면 한 마디 한 마디에 전부 반응을 하는 건지.

    라히크는 제 얼굴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 어서.”

    키스해.

    “싫다면 내기는 아예 없던 것으로 할까.”

    나직한 종용에 파르르 떨던 레그리아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왔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두 손으로 그의 턱을 부드러이 쥐고 입을 맞추자 말캉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 이제 됐지?”

    하지만 그건 고작 해 봐야 몇 초간의 환상일 뿐.

    기운을 슬며시 섞어 보기도 전, 레그리아는 서둘러 떨어져 나가며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키스의 정의가 뭔지 모르는 것 같은데.”

    “그거면 됐지!”

    “글쎄. 네가 한 건 보통 어린아이들이 하는 행동이고. 어른의 행동은 아니지.”

    올려다보는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다.

    이 모든 행위가 처음이라 이런 반응인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껍다.

    혀를 비비는 것도, 몸을 달구는 것도, 전희부터 후희까지 모두 그가 가르치고 익히게 하리라.

    “레그리아.”

    한쪽 손목을 다정히 감아쥐어 여린 면에 이를 세우자 레그리아가 어쩔 바 모르는 게 느껴졌다. 거기서부터 짧게 몇 번씩 입 맞추며 팔목을 타고 오르던 그는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며 단숨에 허벅지 사이에 제 몸을 끼워 넣었다.

    “아, 잠시! 흣…!”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이 새하얀 살집을 탐욕스레 움켜쥐었다. 가슴도 아니고 고작 허벅지일 뿐인데 돌아오는 반응은 신선하기 그지없다.

    라히크는 마치 금역을 탐한 듯한 배덕감마저 느끼며 설원 같은 그곳에 함부로 입을 가져다 댔다.

    “하, 읏…….”

    누구도 밟은 적 없던 곳에 붉은 꽃이 피어난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레그리아의 몸에 흥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는 서서히 안쪽의 습지로 고개를 움직였다.

    들이켜기만 하면 되는 뜨거운 꿀물이 그곳에 고여 있으리라.

    처음에는 키스 정도로도 만족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오랜 시간 수절한 탓에 그의 몸은 서툰 자극 하나에도 쉽게 반응한다.

    특히 이 살냄새, 달큰하면서도 따뜻한 향이 그를 힘겹게 만들었다. 당장 이 가여운 여자의 안을 파고들어 헤집고 싶었으나 이성이 완전히 끊기기 전, 두 손이 그의 이마를 밀어냈다.

    “아, 안 돼!”

    “싫노라고는 못할 터인데.”

    “그래도 안 돼. 겨, 결혼도 안 하고 이런 짓을…! 이 짐승!”

    “네가 입은 그 몸이 남자를 몇이나 아는지 들으면 기절하겠군.”

    혀를 차던 라히크는 앙큼하기 짝이 없는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달아나려는 손가락을 덥석 물고 우물거리자 이젠 귀까지 빨개진 게 보인다.

    이성적으로는 이쯤에서 봐줘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계속 놀리고 싶어 문제였다.

    예쁘게 생겨서는.

    특히 저 혀가 문제다. 발갛고 살짝 통통한 것이 그의 구미를 완벽하게 자극해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오늘은? 내일이 또 있단 소리야?”

    “내일은 이런저런 책을 보낼 테니 그거라도 보고 공부하도록. 다음번엔 고작 그 정도 입맞춤으로 넘어가 주지 않겠다.”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강압적으로 취할 생각은 없었다. 언제고 레그리아는 제 발로 직접 그에게 걸어 들어와야 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 라히크는 충분히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었다.

    그녀를 한입에 통째로 집어삼킬 수만 있다면 기다림의 고통마저 달콤할 터였다.

    * * *

    신황청에서 비밀 파티가 열린다.

    그 소식은 벨리그레엄 사교계를 단번에 뒤흔들었다.

    백작 이하의 작위를 지닌 가문들은 비밀 파티에 초대를 받을 수 없기에 부러움을 삼키며 떠들어댔다.

    이번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대체 어떤 분이실까.

    미친개의 몸을 택한 거야 암암리에 기정사실로 떠돌고 있지만 그렇다고 성격이 진짜 그와 비슷하실까, 등등.

    “가실 겁니까?”

    “불렀으니 가야지.”

    “일전에… 그런 일이 있으셨지 않습니까. 황태자가 알게 되면 어떤 보복을 할지 모릅니다.”

    금박을 입힌 청록색 종이봉투에 담긴 초대장은 신성 기사단 ‘팔라디누스’의 단장실에도 어김없이 배달되었다.

    초대장을 뜯어 대충 읽어 내리는 표드르의 곁에 정중히 서 있는 기사는 신성 축복을 받은 자는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는 건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다.

    신성 기사라면 안대를 할 만큼 다칠 리가 없으니까.

    표드르는 초대장으로 책상을 톡톡 치다가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채도 낮은 붉은색 머리칼을 바라보며 음울히 입을 열었다.

    “디트리히. 비체가 살아 있다. 그거면 됐어.”

    “아주 확실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증거는 오직 그 신성인이 한 말뿐입니다.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갓 강림한 신성인이 무슨 술수를 쓸 수 있다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체가 없어지지 않았다. 그 몸 안에 있는 거야.”

    “……형님.”

    디트리히 로에르멜.

    여름 울타리의 둘째이며 비트리체의 동생인, 이제 갓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기사다.

    어려서부터 표드르와 자주 만났기에 친했고, 친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존재.

    “너무 기대를 갖지 마십시오. 그렇다 한들… 신성인을 내쫓고 누님의 의식을 다시 불러올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글쎄. 모를 일이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나.”

    표드르는 자신의 희망이 덧없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도저히 놓을 수 없을 뿐이다.

    그러면 한순간이나마 그 미련스러운 황태자비 후보에게 끌린 적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아침이 되어 도망치듯 신황청을 빠져나온 표드르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녀와의 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깃털처럼 보드랍던 살결과 그에게 바짝 안겨들며 추위를 잊어 보고자 하던 미약한 몸짓.

    사교계를 지배하는 철의 여인들에게선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가녀림이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표드르는 지옥 같은 밤을 보냈다. 그의 아내가 되어야 했던 여인의 모습. 하지만 비트리체와는 모든 것이 다른, 낯선 여자.

    그녀가 잔상처럼 들러붙어 떼어내 지지가 않았다.

    “파티 때 보자, 디트리히.”

    “…알겠습니다.”

    디트리히가 경례를 하고 떠난 후, 표드르는 마른세수를 하며 그를 괴롭히는 잡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녀는 그저 신성인일 뿐이다. 비트리체가 돌아오게 해야 한다. 비트리체의 몸에서 내쫓으면 원래 몸으로 돌아가겠지…….

    그의 속삭임이 맥없이 허공을 떠돌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신황청 곳곳에 불이 밝혀졌다.

    비밀 파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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